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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호칭문화와 킹차 갓무직

Varsika 2023. 7. 9.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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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KI1nNMgnDx0?t=336 

일리야 : 러시아에서는 상대방의 이름 대신에 직책을 부르는 것이 모욕이라고 느낀다. 상대방의 인간성을 배제하고 그 자리를 부르는 것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는 직책이 아니라 이름이나 애칭을 부르며 부르는 표현에 따라 그 둘이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있다. 소설에서 화자에 대한 설명이 없어도 호칭만으로 애인인지 친구인지 부모인지 모르는 사람인지 알 수 있다. 한 사람에 대한 호칭이 다양한 것은 그 호칭이 관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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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서는 이름을 직접적으로 부르는 것을 오랫동안 꺼려왔다. 제왕들의 피휘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역시 자나 호로 서로를 불렀던 역사가 깊다. 반면 서양에선 이름을 부르는 문화가 자리 잡혀있고 이 점은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다. 그러나 일리야가 말한 '직책으로 사람을 부르는 것은 인간성을 베재하고 그 자리를 부르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표현이 정말 와닿았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인간성을 배제하고 자리로 불리는 것을 더 선호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한 때 온라인에 '킹차 갓무직'이라는 표현이 유행했다. 익명 게시판에 자신의 학벌에 대한 자부심을 내비치던 사람을 보고 누군가 어느 대학을 나왔냐고 물었다. 그러자 글쓴이는 학벌을 직접적으로 밝히진 않고 이렇게 말했다. "현차 사무직이야" 마치 관계서열에서 유용히 써먹을 수 있는 마패처럼 제시된 그의 직장은 학벌뿐만 아니라 직장까지 완벽하다는 내적 충만감을 외부에 효과적으로 표출하는 하나의 수단인 것 같았다.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때는 바야흐로 10년도 더 지난 대학교 신입생 시절이었다. 신입생 시절과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죄명으로 '반수생'이라는 배신자 딱지가 나도 모르게 덕지덕지 붙은 상태였다. 그 딱지가 그다지 부정적으로 느껴지지도 않았고, 잘 이용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에 당시 내 미니홈피는 서울시내 주요 대학의 입학 커트라인과 전형별 지원팁과 같은 입시자료로 가득했다.
 
다른 학교에 다니던 한 친구가 학교별 입학 커트라인을 보더니 자신이 다니던 A대학이 더 높아야 정상인데 B대학 아래에 있다며 순위가 조작된 것 같다고 댓글을 달았다. 물론 장난이었다. 나는 A대학도, B대학도 다니지 않았으므로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B대학에 다니던 다른 친구가 갑자기 욕설을 하며 댓글을 남겼다. "B대학을 욕하는 새끼는 얼마나 좋은 대학 다니는지 들어나보자" 둘은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B대학에 다니던 친구는 오래전부터 열등감이 심한 것으로 친구들 사이에 유명했다고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는 당시에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B대생의 댓글마저 농담인 줄 알고 가볍게 넘기려 했던 나는 오래지 않나 분노에 찬 B대생의 전화를 받게 되었고, A대생과 '주먹다짐'이라고 하고 싶다며 내 미니홈피 곳곳에 결전의 투지를 남겼다. 영문도 모른 채 사이버 테러를 당한 A대생은 허무하고 허탈하고 어처구니가 없다고 말했고, 나 역시 동일한 상황이라며 A대생을 위로했다. 
 
A대생은 무의미한 싸움이지만 질 수는 없다며 과를 속여 의대생이라고 B대생을 압박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B대생의 전투력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었는데 내 미니홈피 곳곳에 남긴 결투초대장이 무안하게도 사태는 몇 시간 만에 진정되었다. 나는 이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6년쯤 지난 뒤 B대생과 일상적인 안부를 묻다 "의대생이라던 A대생은 요즘 뭐 하냐?"라는 질문을 받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학벌에 대한 자부심이 얼마나 강하면 모르는 사람에게도 시비를 걸다가도, 가상의 의대생에서 패배했다는 감정에 6년 동안 그 일을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도 단 하루, 불과 몇 시간 동안 벌어진 일을.
 
쉐도우 복싱의 일인자 B대생, 그도 킹차 갓무직 콘텐츠를 봤을 것이다. 그는 과연 보고 무엇을 느꼈을까. 내로남불에 빠져 킹차 갓무직을 비웃었을까, 혹은 킹차 갓무직의 주인공이 자신보다 좋은 대학을 나왔을지 모른다는 상상에 두려워했을까. 혹은 자신도 어서 마패를 꺼내야 한다는 조급함에 비슷한 글을 남기고 있지는 않을까. 아니면 킹차 갓무직이 A대생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분노에 떨었을까. 밖에는 비가 내리고 옛 생각만 짙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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