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이야기들/독서

20세기 서울, 20만에서 1,100만으로(손정목)

Varsika 2023. 12. 25. 14:03
728x90
반응형

 

○ 책 속에서

 

- "봉건도시 중에서는 그 사회의 수도가 뛰어나게 당당하다. (...) 몇 개의 사회에서는, 예를 들면 옛날의 한국 같은 데서는 수도는 유일한 진정한 문화의 중심지였고 성공을 바라는 사람들은 모두 여기에 거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G. Sjoberg가 발간한 <전산업형도시> 중)

 

- 박지원은 그의 소설 <허생전>에서 "조선은 배가 외국과 통하지 못하고 수레가 국내를 두루 다니지 못하므로 백물百物이 이 안에서 생기고 이 안에서 사라진다."고 지적하고 폐쇄적 체제 속에서 자급자족하는 경제가 얼마나 취약한 것인가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따. 

 

- 상해와 동경에서의 외국인 거유는 조계, 거류지라는 일정한 지역범위가 구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의 외국인 거주는 원칙적으로 원주민과의 잡거였다. 미영 공사관이 있는 정동에는 구미인이 모여 살았고, 남산 아래 진고개와 명동 일대에 일본인이 살았으며, 중국인은 수표교 일대에 산동계가, 서소문 입구에 절강계가, 그리고 덕수공 동남(현 프라자 호텔자리)에 광동계가 군거하였다.

 

- 1910년 8월 하순 서울은 일본 제국주의의 한 식민도시가 되어 있었다. 이해 서울(한성 오부) 인구수는 약 27만명, 그 중 일본인은 45,100명(약 16.7%), 중국인 1,823명, 구미인은 약 305명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종전의 5부 8면제였던 경성부의 구역은 5부와 용산만을 관할하는 36.1km2으로 크게 축소된다. 즉 종전에 한성부를 구성했던 성저 10리의 농촌부는 고양군에 편입되어 용강, 연희, 은평, 숭인, 한지면(현재의 성동구, 용산구, 중구 일대)이 된다. 

 

 

(좌) 1910년 경성부 경계 (우) 1914년 경성부 경계

 

 

- 1930년대의 서울

1930년에 들면 도시에의 인구집중은 더욱 더 두드러진다. 농촌빈곤으로 인한 압출 요인, 그리고 도시부 노동력 수요에의한 흡입 요인이 겹쳤기 때문이다.

 

한반도 농촌의 절대적 빈곤의 원인은 우선 1910년대에 추진된 토지조사사업에서 비록되었다. 전근대적인 토지소유의 정리라는 명목 아래 추진된 토지조사사업으로 수많은 농민들이 토지를 잃어야 했고 자작농에서 소작농으로 전락이 강요되었다. 농민층 빈곤의 두 번째 요인은 1920년 12월부터 착수하게 된 산미증식계획이었다. 수없이 많은 수리조합을 만들고 종자 개선 등을 추진한다는 사업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른바 토지겸병정책 즉 일본인 등 대지주층의 소유농지 확장, 조선 농민의 농토포기, 이농 현상 속출이었다. 

 

도시에 있어서의 인구 흡인 요인은 일제에 의한 한반도 공업화정책이었다. 한반도는 초기 식민정책자들에게는 단지 원료 공급지, 제품 판매지에 불과했는데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대륙 침략의 병참기지로 화한 것이다. 

 

1920년대까지 단 한 개도 없던 근대적 제조공장 다수가 경성, 인천, 대구, 부산, 평양, 신의주, 흥남 등지에 입지하게 되었고 그 결과 전 조선 내 갑싼 노동력을 흡수하게 되었으니 경성부 인구수가 늘 수밖에 없었다. 1931년에서 1941년까지 만 11년간 서울(수원 포함)과 인천에 입지한 규모가 큰 근대적 제조공장은 모두 65개나 되었으며, 미쯔이 미쯔비시, 리껜, 가네보 등 거의가 일본 본국에 본사를 둔 재벌들이었다. (...) 1935년에 실시된 국세조사 결과 서울의 인구수는 44만 4천이었고, 1930년 인구수에 비하여 약 5만 명의 증가를 나타내고 있었따.

 

1930년대에 들면서 4대문 안과 용산만으로 이루어진 경성부의 행정 구역은 한계에 도달하게 된다. 좁은 면적에 45만 인구를 수용하는 데도 문제가 있었고, 동대문 밖 청량리, 왕십리(숭인면, 한지면), 신촌, 마포(연희면, 용강면), 노량진(북면), 영등포읍도 서울의 행정구역 바깥에 둘 수는 없게 되었다. 1936년 4월 1일을 기하여 고양군 내 용강면, 한지면 전역, 연희면, 은평면 일부, 시흥군 내 영등포읍 전역, 북면과 동면의 일부, 김포부 내 양동면 일부 등 1개 읍, 2개 면 전역과 6개면의 각 일부를 경성부에 편입하여 행정구역 면적이 종전의 3.75배인 135.355km2으로 확장된다. 동쪽은 중랑천, 북쪽은 홍제천, 서쪽은 안양천, 남쪽은 영등포읍까지 였다.

 

 

이 구역 확장으로 경성부 인구는 종전까지의 45만에서 70만으로 당시 일본의 지방도시 치고는 일약 대도시의 범주에 들어가게 된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난 잏 군수 물자의 생산과 수송, 군 관계 기관 및 시설에서의 노동력 수요 등으로 도시에의 인구집중은 가속화되었고, 1940년 국세조사 결과 경성부인구는 935,464명으로 집계되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노동력 수요는 더욱 증가되어 1942년 말 상주인구 조사결과 경성부 인구수는 111만 4천으로 집계되었다.

* 1935년 인구 44만 명에서 1940년 93만 명으로 약 110% 증가함

 

● 1940년대 후반기

광복으로 한반도 전역에 거주하고 있던 71만 3천의 일본인과 34만 7천의 일본군인인이 땅을 떠났다. 38선 이남에서 약 70만의 일본인이 떠나쏙 대신 해외에서 거주하던 120만 동포가 귀국하여 주로 서울, 부산, 대구를 비롯한 도시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48만이 넘는 북한 주민들이 공산체제를 벗어나 남하하였다. 

 

정부수립 이후 최초로 실시한 1949년 5월 1일 전국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 인구가 20,189,000인이었고, 서울시 인구는 141만 8천으로 집계되었다. 1949년 8월 13일 발표된 대통령령 제159호에 의하여 8월 15일부터 뚝도, 숭인, 은평면 전역과 시흥군 동면에 속했던 도림리, 구로리, 대방리 등이 서울시 구역으로 편입되어 인구가 약 15만 명 늘어났으며, 동대문구 일부와 새로 편입된 숭인면 지역이 합쳐져 성북구가 생겼다.

 

 

- 1950년대 이 땅의 도시인구 집중에 미친 영향 중 최대의 요인은 한국전쟁 중 시골에서도 많은 사람이 대구, 부산 등지로 피난을 감으로써 자기 고장 이외의 터전에서도 살 수 있다는 체험, 도시에서는 보다 더 잘 살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체험했다는 사실이고, 동시에 많은 시골사람들이 서울ㅇ르 비롯한 도시로부터의 피난민을 맞아 서울사람도 별 수 없다, 자기도 서울만 가면 서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자신을 체득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체험이 그후의 급격하 ㄴ도시화를 초래한 심리면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1995년 센서스 결과 서울 인구는 156만 9천이었는데 1960년 조사 때는 서울 인구가 244만 5천으로 집계되었다.

 

- 원래 공업화가 되지 못한 데다가 대부분의 생산시설이 파괴된 탓으로 일자리는 부족한데 사람들만 모였으니, 1950년대 후반기 서울을 비롯한 한국의 도시화는 바로 '고용기회를 상회하는 인구의 집중'이라는 이른바 아시아 - 아프리카 지역에 특유한 현상의 대표적인 예가 되었으며, 원조 물자의 판매, 소비를 통한 제3차 산업에의 과잉종사를 일으키는 한편, 서울, 인천 등지에 수많은 판자집 지대를 출현시켜 사회불안 요인을 크게 한 것이다. 

 

머리는 지식으로 무장하고 가슴에는 진취의 기상을 안고 도시에 몰려온 젊은이들에게 취업의 기회는 없는 데다가 '몸보춤'이니 '종삼'으로 대표되는 퇴폐풍조만 비췄으니 현실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노적된 현실 불만이 1956년 5월 2일 한강 백사장에서 있었던 야당 대통령 후보의 정견 발표회에 30만명을 모이게 했고, 급기야는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어지게 된다.

 

● 1960 ~ 70년대

 

- 우리나라 도시화 과정에서 항상 문제되는 거싱 서울을 비롯한 몇개 대도시에의 인구 편중집중의 현상이지만, 그것은 1961~1970년까지의 10년간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960년 당시 224만이던 서울이 553만으로, 부산은 116만에서 187만으로, 대구는 67만에서 108만으로, 인천이 40만에서 64만으로 그 인구 규모를 넓혔다.

 

- 두 차례에 걸친 유류파동으로 국내외 경기가 크게 침체되고 위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울산, 포항, 구미, 여천 기타 전국 각지에 조성된 공업도시에서 많은 노동력을 흡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에도 서울에의 인구집중은 여전히 강세로 계속되어 1975년에 689만명, 1980년에는 836만명으로 돌파함으로써 세계적인 거대도시의 반열에 끼었다.

 

이렇게 대규모 인구증가가 계속되었으니 개발의 손길을 멈출 수가 없었다. 영동지구 600만평, 잠실지구 400만평의 대규모 구획정리사업이 전개된 한편으로, 지하철 1호선 및 수도권 전철이 건설되었으며, 여의도, 영동, 잠실지구에 고층아파트가 건립되어 마침내 아파트시대의 도래를 맞이하게 된다. 지하철 2호선이 착공된 것은 1978년 3월 9일이었고, 54.2km 전장이 개통된 것은 6년 2개월이 지난 1984년 5월 22일이었다.

 

● 1980년대

1980년대 서울을 유도한 것은 전두환 정권에 의한 주택 500만호 건설과 지하철 3, 4호선 건설, 노태우 정권 당시에 전개된 주택 200만호 건설, 1986년과 1988년의 양대 행사였다.

 

전두환 정권시절 발표된 <택지개발촉진법>으로 인하여 강남 개포지구 242만 평,강동구 고덕지구 90만 평, 노원구 상계지구 112만 평, 중계지구 48만 평, 목동지구 130만 평이 차례로 개발되었다. 주택공사, 토지개발공사, 서울시가 주로 참여했다. 한편 서울 지하철 3, 4호선이 1980년 2월 29일 착공되었고 1985년 10월 18일 개통됨에 따라 서울 1기 지하철 건설이 마무리되었다. 

 

노태우 정권은 취임 직후인 1988년 가을부터 1993년까지 주택 200만호 건설계획을 실시하였다. 대치-수서지구, 계양-방화지구, 분당, 일산, 평촌, 산본, 중동지구 등 대규모 주택단지가 형성되었다. 1980년대 초에 시작하여 1990년대 초에까지 걸친 주택 건설이 엄청난 노동력 흡인요인이 되었고, 서울에서의 인구집중을 가속화하는 요인이 되었다. 1985년 서울의 인구는 960만 명으로 집게되었고 1990년에는 1천만이 넘게 된다. 1998년 기준으로 세계 주요 도시 중 인구 1천만 이상의 도시는 한국의 수도 서울 뿐이다. (도쿄 800만, 상해 820만, 멕시코 시티 820만, 상파울로 980만 등)

* 1955년 150만 명에서 1966년 380만 명으로 크게 증가하였고 1975년에 690만 명, 1985년에 960만 명, 1990년에 1천만 명을 돌파한다. 

 

- 경쟁에서 이긴다는 것, 그것은 경제적 부와 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의미한다. 즉 경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부와 권력의 집중지역인 수도 서울에 모여드는 것이다. (고밀도 국가는 필연적으로 고경쟁 사회를 낳았고, 일제강점비에 겪은 피지배의 경험, 한국전쟁의 비애가 이를 더욱 강화했다.)

 

서울에의 급격한 집중현상은 물가의 인플레 현상과 더불어 지난 30년간 중앙정부가 해결하려고 노력해 온, 가장 큰 과제의 하나였다. 서울에서 불과 40km도 안 되는 전방에 휴전선이 그어져 있고, 북쪽과 일촉즉발의 무력으로 대치하고 있는 상태 하에서의 수도 인구 다집중은 국가안보라는 측면에서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었다. 1964년 9월 22일 야간 국문회의에서 의결, 발표된 20개 항목에 달하는 이른바 <대도시 인구집중방지책>이라는 것이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20여년간 공업입지, 학교입지 등을 억제하는 정부 각 부처의 시책과 <공업배치법>, <수도권 정비계획법> 등의 법령이 실시에 옮겨진 한편, 전국적인 인구증가 억제, 울산, 구미, 창원, 여천 등 동남권에서의 대규모 공업단지 개발, 지방 중소 도시 갭라 지원정책, 지방대학 육성, 기타 여러가지 시책이 강구되었다. 그러나 거주 이전의 자유, 직업선택의 자유가 헌법상의 기본인권인 이상 도도한 유입의 흐름을 억제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 결론적으로 서울은 토지 이용 면에서 이미 인구 수용의 물리적 한계에 도달해 버렸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반도 통일이 언제 어떤 형태로 될 지 모르지만 만약 북한 주민에게 무제한의 거주이전이 허용됨으로써 북한 주민 중 10%가 되는 250만명 정도가 서울로 이주해 온다고 가정하면 서울은 일시에 지옥과 같은 거주환경이 되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해 두는 것이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