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의 경연은 오늘날 자문회의와 유사한 성격을 갖고 있다.
- 많게는 다섯 번 기본적으로 하루 세 번 이루어졌다. 왕의 정무공간인 경복궁 사정전 혹은 창덕궁 선정전에서 진행되었다. 보통 왕과 십수 명의 신하가 함계 참여했다. 조선시대 신하들은 모두 과거에 합격한 자들이니 갓 즉위한 왕과는 당연히 지식수준에 격차가 있었다. 경연은 조선시대 유일한 세습권력은 왕권의 자격을 함양하는 장치였다.
- 경연에서 의심되고 어려운 부분이 있어 임금이 경영관에게 물으니 모두 대답하지 못하였다. 이에 임금이 이렇게 말하였다. "의문을 품고 연구해 들어가면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 모르는 것이 없다고 스스로 말하는 자들이야말로 변변치 못한 자들이다. 그러니 그대들은 알지 못하는 것으 꺼리지 말라." - <세종실록 58권> 세종 14년 12월 22일
세종은 재임 기간 경연을 약 2300회 열었다.
- 세종대에는 최초로 경연 전임관을 두었다. 궁궐 안에 별도로 관사를 마련하여 경영 전임관을 두었다.
당시 집현전이 경연을 담당하였는데 이곳에서 한글뿐만 아니라 의학, 농업 등 나라의 기틀을 세운 각종 서적을 편찬하였다. 집현전은 고려때부터 존재하였으나 당시에는 궁중 도서관 정도의 기능을 하고 있었고, 조선시대에 와서 그 기능이 확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태종이 인재를 모으며 집현전의 역할이 강화되기 시작했고 세종이 즉위 2년차에 집현전을 본격적으로 재정비한다.
집협전에는 정1품 영집현전사(영전사), 정2품 대제학, 정2품 제학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다른 관직과 겸직하던 자리였다. 정3품 부제학부터가 전임직이었다. 대제학의 별칭은 문형文衡이었는데 '학문의 저울'이라는 뜻이었다. 당시 신하들은 대제학의 자리를 영의정보다 더 영예롭다고 여겼다.
집현전은 사정전의 바로 옆 수정전에 위치해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다.
- 단종은 아침, 점심, 저녁 하루 세번 공부하는 삼강제도를 확립했다. 단종 이후 성종은 경연의 틀을 확대했다. 성종실록에는 경연이 총 9242회 언급된다. 이는 조선실록 전체에 언급된 3만 6천여 건 중 약 4분의 1에 달하는 수치다. 성종은 3강 제도에 이어 야대(밤에 진행)와 소대召對(왕이 부르면 수시로 열리는 세미나)까지 개설했다. 성종은 나라의 기틀을 확립한 왕에게 붙이는 묘호인데, 그 이유를 여기서 짐작할 수 있다.
- 세조는 직접 신하를 가르친다는 친강이라는 독특한 경영 방식을 도입했다. 세조의 친강 대상은 문신, 무관, 종친, 성균관 유생까지 다양했다. 그러나 이는 임금과 신하가 서로 배운다, 사회의 다양한 의견을 청취한다는 경연의 취지에 어긋나는 강연에 가까운 행위였고 자신의 찬탈을 정당화하는 작업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이념통제에 가까운 작업. 자신은 임금이자 곧 스승이다. 소통이 아닌 주입)
실제로 세조 재위 기간 동안 집현전은 폐지된다. 성종 즉위 이후 집현전 부활에 대한 여론이 있었고 선왕이었던 세조를 부정할 수 없었던 성종은 결국 즉위 9년차인 1478년 경연 관청을 '홍문관'이라는 이름으로 설립한다. 홍문관 인재를 선발할 때는 개인적인 인격 결함은 물론 조상 중에 부정한 청탁에 연루된 사람이 있는지도 확인했다. 등영록에는 홍문관 관리의 인적 사항이 모두 기록되어있다.
- 사가독서 / 동호독서당
사가독서는 온전히 학문에만 열중할 수 있도록 배려한 유급휴가였다. 사가독서는 지금의 옥수동에 위치한 동호독서당에서 진행되었다. 지금도 한남오거리부터 응봉사거리까지의 거리 행정명칭이 독서당로이다. 한강 동호에 세워져 동호독서당인데, 동호 일대는 중랑천과 한강이 만나 수역이 넓고 유속이 느려 잔잔한 호수처럼 보여 동호라 불렀다. 지금의 동호대교 역시 동일한 어원을 가진다. 독서당 출신 학자로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가 있다.
- 세자의 공부 서연書筵
법강: 매일 하루 세번 공부하는 정규 강의
회강: 매월 두 차례 토론하는 공개 강의
고강: 5일 마다 치르는 시험
세자의 서연은 세자시강원에서 전담했다.
세자의 스승은 사부라 하였는데 사는 영의정, 부는 좌의정과 우의정이 맡았다.
- 연산군의 1504년 갑자사화 후 경연은 완전폐지되었다. 갑자사화 2년 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은 폐위되었다.
- 광해군 역시 경연에 소홀했는데 광해군 실록에서 검색되는 경연은 약 100회 정도다. 광해군은 경연을 통한 합리적 판단보다는 사주팔자와 풍수지리와 같은 좌도左道에 의존했다.
경연에는 소홀했으나 친국에는 정성이었다. 조선실록에 등장하는 친국은 1268건인데 이중 광해군 실록의 기록이 340여건을 차지한다.
"왕이 즉위한 후로 경연을 연 적이 없었고 매양 병 때문이라 했지만 죄인을 친국할 때에는 밤늦도록까지도 했다. 어찌 그리 사람을 죽이는 일은 급하면서 학문을 강론하는 일은 등한히 한단 말인가. 내의원에서 옥체가 평안해졌다고 아뢰었는데도 왕은 오히려 조리해야 한다고 대답했으니 평안한 옥체를 조리한다면 어느 때에 학문을 강론할 수 있겠는가." - <광해군일기(중초본) 89권> 광해 7년 4월 2일
-군자여욕화민성속 기필유학호
"사람을 바꾸고 문화를 성취하고자 한다면 언제나 배움을 통해야 한다." - <예기> 중 <학기>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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