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감상
학창 시절 일부만 읽은 뒤 거의 20년 만에 다시 읽은 소설. 내용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나이를 먹고 연작 전체를 읽게 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릴 때 일부를 읽고 느꼈던 감상과는 아주 많이 다른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 책을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에서라도 읽게 된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모임에 나가기 위해 읽게 된 책인데 추후 일상이 구축되면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감탄하며 읽었다.
특히 동일한 세계관을 공유하나 각 파트마다 화자가 달라지는 연작소설은 거의 읽어보지 못했는데 이 소설을 통해서 그 매력을 알게 되었다. 단순히 읽는 재미뿐만 아니라 대립관계에 놓인 인물들 각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다각도로 조명함으로써 소설 속 이야기를 좀 더 심도 있게 살펴보고 생각할 수 있었다. 기승전결의 일방향으로 이야기가 나아가는 것을 넘어서 하나의 이야기를 두고 조금 멀리서 다양한 각도로 그것의 모든 면을 살펴보는 느낌이었다. 읽는 재미의 측면에서도 이야기가 끝났을 때 남겨지는 질문들, '그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와 같은 궁금증들이 어느 정도 해소되어 이야기의 참담함과는 별개로 독자로서 만족스러웠다. 여러모로 이 책을 읽은 건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2. 목차별 줄거리 & 책속에서
(1) 뫼비우스의 띠
수학교사는 학생들에게 굴뚝 청소를 한 두 소년, 뫼비우스의 띠, 앉은뱅이와 꼽추 등 몇 가지 이야기를 말한다. 앉은뱅이와 꼽추는 철거 이주민이이다. 철거민들로부터 입주권을 사들이고 되팔아 폭리를 취하는 사나이를 다시 찾아내지만 이미 팔려버린 입주권을 되찾지 못한다. 대신 둘은 돈을 훔쳐 달아난다. 그 과정에서 앉은뱅이는 입주권을 팔아치운 사내를 죽이고 곱추는 그런 앉은뱅이와 함께 하기를 거부하고는 이내 각자의 길을 떠난다.
철거 피해자였던 앉은뱅이는 살인자가 되고 폭리를 취하던 사나이는 살인의 피해자가 된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 끝으로 내부와 외부가 따로 없는 입체는 없는지 생각해 보자. 내부와 외부를 경계 지을 수 없는 입체, 즉 뫼비우스의 입체를 상상해 보라. 우주는 무한하고 끝이 없어 내부와 외부를 구분할 수 없을 것 같다.
(2) 칼 날
신애가 사는 집은 새벽이 되어야 물을 졸졸 나오는 곳이다. 자다 일어나 물을 받아야 겨우 살아갈 수 있는 곳에서 그녀는 살고 있다. 수도업자는 우물을 파고 큰 비용을 들여야만 물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신애는 그런 돈이 없다. 어느 날 난장이가 수도꼭지를 간단히 손보면 기존보다 몇 시간 더 빠르게, 더 수월하게 물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말한다. 수도업자는 그런 난장이를 걷어차며 폭력으로 억압한다. 신애는 그 순간 자신이 가진 칼을 가져와 수도업자를 찌른다. 얕은 상처를 입은 수도업자는 도망가고 난장이는 위기를 모면한다. 신애는 난장이에게 그녀 역시 난장이라고 말한다. 그날 밤 과연 신애는 몇 시간이나 일찍 물을 받을 수 있었다.
- 저희들도 난장이랍니다. 서로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한편이에요.
- "수도국 사람들이 왔었어요?"
"그들은 받을 돈을 계산할 때 말고는 결코 오는 법이 없단다."
- "다른 집 사람들은 일찍 받을 수 있다는 그의 말을 믿지 않더구나."
"그가 누구예요?"
"그런 사람이 있어."
"좋은 사람?"
"그래, 좋은 사람이야"
(3) 우주여행
부유한 집안의 아들 윤호가 가정교사 지섭을 만난다. 아버지의 기대는 윤호가 A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이다. 윤호는 점차 아버지의 기대를 멀리하게 된다. 지섭은 쫓겨나고 윤호는 입시에 실패한다. 재수를 하는 윤호는 부잣집 아들 윤호와 여학생 은희를 만난다. 윤호는 부잣집 아이들과의 관계에서도,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도 애정을 느끼지 못한다. 그의 관심은 오직 타락하지 않은 은희뿐이다. 은희를 포기할 테니 답안을 보여달라는 인규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답안지에 인규의 수험번호를 적는다. 둘은 모두 입시에 실패한다. 윤호는 아버지의 권총을 은희에게 주며 자신을 쏘라고 말하고, 은희가 윤호를 끌어안는다. 어머니가 없는 윤호를, 마치 어머니가 아들을 감싸 안듯이.
- 윤호는 잿더미에 내려앉듯 주저앉았다.
- 나는 도도새야 불쌍하지만 너도 그래 우린 중요한 것만 고랄 배반하는 쓰레기들 속에서 살고 있어.
- 그녀는 어머니처럼 다가가 눈물로 범벅이 된 윤호의 얼굴을 가슴과 두 팔로 감싸 안았다. 지섭이 그날 난장이네 집에 가서 무슨 일을 했는지 윤호는 몰랐다. 난장이와 그의 식구들은 조각마루에 앉아서 저녁식사를 했다. 그들은 말 한마디 없었다. 윤호는 지난 이 년 동안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4)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난장이와 아내, 두 아들과 딸 영희는 곧 철거될 집에서 살고 있다. 난장이는 친구 지섭을 통해 <일만 년 후의 세계>라는 책을 읽게 되고 이를 통해 달나라로 가 천문대에서 일하는 꿈을 꾼다. 난장이는 꿈을 꾸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가족들은 입주권을 팔았다. 입주권을 판 돈에서 내보낸 세입자의 보증금을 제하니 얼마 남지 않았다. 영희는 가출한다. 영희를 기다리며 가족들은 집을 떠나지 못한다. 철거일 아침, 집에서 밥을 먹고 있는 와중에 인부들이 와 집을 부수기 시작한다.
가출한 영희는 입주권을 사들인 남자를 따라갔다. 그 남자는 입주권을 되팔아 큰돈을 벌고 있었다. 영희는 그의 집에서 지내며 기회를 엿보다 입주권을 되찾아 도망쳐 나온다. 가족의 소식은 끊겼고 집은 철거되어 있었다. 신애 아주머니를 찾아가고 그녀로부터 굴뚝에서 투신한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 천국에 사는 사람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도 천국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다. 하루하루의 생활이 지겨웠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활은 전쟁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
- 벽돌공장의 높은 굴뚝이 눈앞으로 나가왔다. 그 꼭대기에 아버지가 서 있었다. 바로 한걸음 정도 앞에 달이 겹쳐 있었다. 아버지는 피뢰침을 잡고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자세로 아버지는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 p.90 / 그들은 엉뚱하게도 계획을 내세웠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계획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많은 계획을 내놓았다. 그런데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설혹 무엇을 이룬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의 고통을 알아주고 그 고통을 함께 져줄 사람이었다.
* '계획이 필요 없다'라는 부분에서 영화 <기생충>이 생각나기도 했다.
- p.94 / "사이다, 포도, 라면, 빵, 사과, 계란, 고기, 쌀밥, 김." / 먹고 싶은 것을 그리 길게도 말하지 못하는 명희
* 음식이 줄줄이 언급되는 장면은 마치 첫 휴가를 앞둔 훈련병 같았다. 훈련소는 통제된 환경인데, 명희 역시 통제된 환경과 다름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 p.112 / 한결같이 영양이 나쁜 얼굴들이었다. 거기서는 눈물 냄새가 났다. 나는 눈물 냄새를 가슴으로 맡았다.
- p.123 / 대문을 두드리던 사람들이 집을 싸고돌았다. 그들이 우리의 시멘트 담을 쳐부수었다. 먼저 구멍이 뚫리더니 담은 내려앉았다. 먼지가 올랐다. 어머니가 우리들 쪽으로 돌아앉았다. 우리는 말없이 식사를 계속했다. 아버지가 구운 쇠고기를 형과 나의 밥그릇에 넣어주었다. 그들은 뿌연 시멘트 먼지 저쪽에 서서 우리를 지켜보았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대로 서서 우리의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 p.133 / 내가 가지고 가야 할 것은 이제 없었다. 집을 나올 때 입었던 옷, 뒷굽이 닳은 신발, 큰오빠가 사준 줄 끊어진 기타는 이미 그 집에 없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현관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가 반대로 밀었다. 문은 닫히면서 스스로 잠겼다.
* 영희가 가출할 무렵, 꿈속에서 영희가 폐수에 팬지꽃을 던진다는 내용이 나온다. 영희가 가출할 때에도 팬지꽃을 챙겨 나갔다는 것이 소설 속에 표현된다. 여기서 팬지꽃은 영희 그 자체를 뜻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팬지꽃은 아름답지만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꽃이라고 한다. 영희는 집으로 돌아올 무렵에는 자신이 팬지꽃을 챙겨 집을 나왔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하다.
- 정이란 게 이렇게 더러운 게라우. 그 말이 우리 눈에 고춧가루를 뿌렸다.
-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부르는 악당은 죽여버려."
"그래. 죽여버릴게."
"꼭 죽여."
"그래. 꼭."
"꼭."
(5) 육교 위에서
신애의 동생은 입원했다. 신애는 육교를 건너다 동생의 가장 친했던 친구가 다니던 직장을 보게 된다. 동생과 친구의 기질은 너무나 같았다. 대학시절 함께 생각하며 활동했던 친구는 유혹에 넘어가 동생에게 상처를 입혔던 사람의 옆방으로 가 일하고 있다. 그는 안락한 삶을 살고 있다. 동생은 병실에 있다. 신애는 육교를 건너 내려와 동생의 병실로 간다.
- 두 사람에게 이 사회는 괴물덩어리였다. 그것도 무서운 힘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괴물덩어리였다. 동생과 동생의 친구는 저희 스스로를 물 위에 떠 있는 기름으로 보았다. 기름은 물에 섞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도 합당한 것은 못 된다. 정말 무서운 것은 두 사람이 인정하든 안 하든 하나의 큰 덩어리에 묻혀 걸러간다는 사실이었다.
- 같은 생각을 갖고 자주 만나 이야기한 학생들도 그때는 이미 둘의 편이 아니었다. 이때의 둘을 생각하면 신애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큰 소리로 구호를 외쳐대던 아이들이 군에 들어간 뒤였다. 몇 개의 법도 새로 만들어졌다. 아이들은 캠퍼스 안에서 포커를 시작했다. 아이들은 카드놀이의 재미를 뒤늦게 알았다. 동생과 동생의 친구는 엉뚱한 때, 엉뚱한 곳에 서 있었다. 둘만 남은 것 같았다. 동생과 동생의 친구는 어떤 희망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없었다.
- 주간의 관찰은 정확했다. 그러나 그 정확이 옳은 것은 아니었다.
- "그의 말이 이제 와서 왜 유혹으로 느껴질까? 협박이라는 말도 우습지만, 유혹이라는 말이 더욱 이상하지 않아? 그런 게 유혹으로 느껴진다면 지금까지 너는 뭐였니? (...) 너는 정작 우리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가난이 아니라고 말해왔어. 그런데, 알 수 없는 일 아냐? 도대체 네가 말하는 유혹은 어떤 거냐?"
- "나는 용서할 수가 없다!" 친구는 말했다.
"모두, 한 치 앞도 못 보고 끌려가는 이 마비 속에서 뻗어버려라!"
신애가 보이게 동생과 동생의 친구는 너무나 닮은 선천적인 기질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육교의 난간을 잡은 채 신애는 생각했다. 누가 동생의 친구를 죽였을까?
동생의 친구는 변해버렸다. 처음에는 기진해 쓰러진 것이라고 동생은 말했었다. 그러나 동생은 오랫동안 친구를 만날 수 없었다. (...) 친구는 애써 잃어버린 희망을 찾지 않기로 생각했을 것이다. (...) 아이들은 너무 빨리 늙어 죽는다. 마비 속에서. 신애는 육교의 층계를 내려오면서 생각했다. 동생의 친구는 정말 그가 술집에서 말했던 대로 용서하지 않았다.
- 동생 머리맡에 사진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아내가 갖다 놓은 것이다. 동생의 아이들이 사진 속에서 웃고 있었다. 사람을 제일 약하게 하는 것이 아무것도 모르는 채 웃고 있었다.
(6) 궤도회전
입시를 포기한 윤호는 아버지에게 철사로 구타를 당한다. 아버지는 윤호의 낙방을 반항이라 여겼고 그런 아버지를 윤호는 불쌍하게 생각했다. 아버지의 매를 피하지 않았다. 윤호의 집은 이사를 가게 되고 그곳에서 윤호는 경애를 만난다.
경애의 할아버지는 은강방직의 소유주였다. 그가 죽자 윤호의 아버지가 조문한다.
경애는 윤호에게 호감이 생겨 윤호가 지섭의 영향으로 소지하게 된 '노동수첩'에서 영감을 얻어 관련 모임으로 윤호를 초대한다. 윤호는 그 모임에서 아무도 10대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에 대해서 관심 갖지 않는 것을 목격한다. 윤호는 모임에서 고문을 모티프로 한 퍼포먼스를 하게 되고, 고문을 받는 역할의 경애는 '생활 전체가 죄인'이라는 말을 한다. 경애는 할아버지의 묘비문을 써서 윤호에게 주고, 그것을 읽은 윤호는 그녀와의 결혼을 상상한다.
- 아버지는 지난 몇 달 동안 남의 나라의 묵은 법을 꺼내 밑줄을 그었다. 윤호는 아버지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 화를 너무 쉽게 냈던 무서운 욕심쟁이가 여기 잠들어 있다. 돈과 권력에 대한 욕심 때문에 그는 죽었다. 평생을 통해 친구 한 사람 갖지 못했던 어른이다. 자신은 우리의 경제 발전을 위해 큰 업적을 남겼다고 자랑하고는 했으나 국민생활의 내실화에 기여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가 죽었을 때 아무도 울지 않았다.
(7) 기계도시
윤호를 만난 난장이의 아들은 은강 공원(工員)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은강그룹의 주인을 죽이겠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윤호의 집에 머물게 해달라 말하지만 윤호는 도움을 줄 수 없다고 말하며 은강의 경영주는 현재 해외에 있다고 말한다. 난장이의 아들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지"라는 말을 남긴다.
- 은강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서울에 있었다. 은강 사람들은 필요하다면 공중 집회를 갖거나 시위를 벌일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입을 벌렸다. 윤호는 아버지가 무서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늘 생각했다. 수많은 공장, 그 공장을 움직이는 경영인들, 그리고 그 경영인들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서울에 있었다. 그들은 공장 기계를 돌리기 위해 물리적 힘만을 사용하고, 그 힘의 일부로 은강의 공해도를 측정, 발표했다.
(8) 은강 노동 가족의 생계비
은강자동차에서 드릴 업무를 하는 나(영수)는 '쌍권총의 사나이'로 불렸다. 일이 고되어 잠자리에서 코피까지 흘렸지만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처우 개선을 요구하자 분위기는 싸늘하게 바뀌었다. 내가 밥을 나눠줄 때마다 웃던 공구실 조역도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나는 해고자 명단에 이르기 전에 은강자동차에서 나와 은강방직으로 옮겼다.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나는 어머니의 가계부를 보았다. 어머니가 두 개의 어금니만 뽑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달에 삼천 원의 돈을 문화비로 지출할 뻔했다. 이 돈을 벌어오기 위해 우리는 죽어라 일했고 어머니는 늘 불안해했다. 릴리푸트읍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 영희는 시간에 쫓겨 허겁지겁 먹었다. 허겁지겁 먹고 다시 현장으로 들어가 직기 사이를 뛰듯 걸었다. 영희는 한 시간에 칠천 이백걸음을 걸었다.
- 우리는 반줌의 재를 흐르는 물 위에 뿌려 넣었다. 영희와 나는 눈물을 주먹으로 쓸어내리며 울었다.
- 어머니는 바 줌의 재를 쌌던 흰 종이를 물 위에 띄었다. 우리는 물가에 앉아 흐르는 물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없어졌다. 바람이 불었다. 햇볕이 따뜻했다. 몇 마리의 새가 어머니 옆에서 날았다.
- 아버지의 시대가 아버지를 고문했다. 난장이 아빠는 경제적 고문을 이겨내지 못했다.
- 은강은 릴라푸트읍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영희는 그것을 가슴 아파했다. 모든 생명체가 고통을 받는 땅이었다. 우리는 살기 위해 은강에 왔다. (...) 나는 생명처럼 추상적인 것은 없다고 생각하고는 했다. 그것은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우리에게 준 것이었다.
* 릴리푸트(혹은 릴리퍼트)는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소인국이다.
(9)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은강에서는 모든 것이 지옥 같았다. 이곳에 온 이후로 호흡장애와 두통을 달고 사는 어머니,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잠을 깨우기 위해 옷핀으로 그들의 팔을 찌르는 반장. 난장이의 아들은 아버지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 나는 은강에서 생존비를 생각했다. 생활비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생존비였다.
- 어머니는 은강에 온 후 계속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호흡 장애, 기침, 구토 증상도 자주 일으켰다. 영희는 청력 장애를 일으켰다. 직포와 작업 현장의 소음이 영희를 괴롭혔다. 나는 그때 보전반 기사 조수로 일하고 있었다. 밤일을 하는 영희를 보는 순간 나는 죽고 싶었다. 영희는 졸음을 못 참아 눈을 감았다. 두 눈을 감은 채 직기 사이를 뒷걸음쳐 걷고 있었다. 그 밤 작업장 실내 온도는 섭씨 삼십구 도였다. 은강방직의 기계들은 쉬지 않고 돌았다. 영희의 푸른 작업복은 땀에 젖었다. 영희가 조는 동안 몇 개의 틀이 서버렸다. 반장이 영희 옆ㅇ로 가 팔을 쿡 찔렀다. 영희는 정신을 차ㅣ고 죽은 틀을 살렸다. 영희으 작업복 팔 부분에 한 점 빨간 피가 내배었다.
- 노동자들은 싸고 독한 술만 마셨다.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복음만이 그들에게 위안을 주었다.
- 모두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다. 예외란 있을 수 없었다. 은강에서는 신도 예외가 아니었다.
- 어머니는 지섭을 보고 아무 말 못 했다. 몇 초 후 돌아서더니 소매를 눈에 대었다. 어머니는 돌아간 아버지를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를 서울 행복동에서의 마지막 시절로 끌어갔다. 우리는 뿌연 유리를 통해 과거를 들여다보았다.
(10) 클라인씨의 병
나(영수)는 은강방직에서 노동운동을 하게 된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걱정한다. 나는 지섭을 다시 만나고 노동현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지섭과 헤어진 후에 나는 이상한 병을 보게 된다.
- 은강에는 장님이 많았다.
- 이 병에서는 안이 곧 밖이고 밖이 곧 안입니다. 안팎이 없기 때문에 내부를 막았다고 할 수 없고, 여기서는 갇힌다는 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벽만 따라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죠. 따라서 이 세계에서는 갇혔다는 그 자체가 착각예요.
(11)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
나(경훈)의 숙부가 살해당했다. 숙부는 은강그룹의 총수로 오해받았다. 살인자는 은강방직 직원이자 난장이라 불린 사나이의 아들이라고 했다. 변호인은 은강그룹의 가혹한 노동환경과 사회의 부정함이 이 사태를 만들었다는 식으로 말했다. 나는 그것이 불쾌했다. 변호인이 요청한 증인 한지섭은 손가락이 여덟 개 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마음이 약한 나의 사촌(숙부의 아들)은 그들의 말에 귀 기울였지만 나는 그것조차 못마땅했다. 공판이 끝나자 사촌형은 떠났고 난장이의 큰 아들은 사형을 선고받는다.
- 그들은 저희 자유의사에 따라 은강 공장에 들어가 일할 기회를 잡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마음대로 공장일을 놓고 떠날 수가 있었다. 공장일을 하면서 생활도 나아졌다. 그런데도 찡그린 얼굴을 펴 본 적이 없다. 머릿속에는 소위 의미 있는 세계, 모든 사람이 함께 웃는 불가능한 이상사회가 들어있었다. 그래서 늘 욕심을 억누르고, 비판적이며 향락과 행복을 거부하는 입장을 취하고는 했다. 이상에 현실을 대어 보는 이런 종류의 엄숙주의자들은 생각만 해도 넌더리가 났다.
- 나는 처음부터 그의 말을 듣지 않기로 했다. 증인으로 나온 사람에게 손가락이 여덟 개밖에 없다는 것 자체가 기분 나빴다. 잃은 두 개가 사물에 대한 그의 이해에 끼쳤을 영향을 나는 생각했다.
- 변호인이 억압이란 말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다. 그러자 아버지가 산하 회사 공장 종업원들에게 쓰는 억압은 언제나 생존비 또는 생활비와 상관이 있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제일 무서워할 수밖에 없는 경제적인 핍박을 의미한다고 지섭이 말했다.
- 나는 책을 읽다 잠이 들었고, 깨기 직전에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물을 쳤다. 나는 물안경을 쓰고 물속으로 들어가 내 그물로 오는 살찐 고기들이 그물코에 걸리는 것을 보려고 했다. 한 떼의 고기들이 내 그물을 향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살찐 고기들이 아니었다. 앙상한 뼈와 가시에 두 눈과 가슴지느러미만 단 큰 가시고기들이었다. 수백 수천 마리의 큰가시고기들이 뼈와 가시 소리를 내며 와 내 그물에 걸렸다. 나는 무서웠다. 그것들이 그물코에서 빠져나와 수천수만 줄기의 인광을 뿜어내며 나에게 뛰어올랐다. 가시가 몸에 닿을 때마다 나의 살갗은 찢어졌다. 그렇게 가리가리 찢기는 아픔 속에서 갈려달라고 외치다 깼다. 서쪽 유리창에 황적색 저녁놀이 와닿았다. 그것이 아름답게 느껴져 창가로 가 내다보았다.
- 사랑으로 얻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밝고 큰 목소리로 떠들 말들을 떠올리며 방문을 열고 나갔다.
(12) 에필로그
수학교사는 학생들의 성적부진을 이유로 윤리교사로 전직하라는 명을 받았다. 교사는 학생들에게 이러한 사태의 부조리함을 이야기한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말했던 앉은뱅이와 꼽추의 이야기가 다시 시작된다. 그들은 자신들을 이용하고 도망간 사장을 찾아다닌다. 앉은뱅이는 사장을 잡으면 죽일 것이라고 말했지만 꼽추는 칼을 버리라 말한다. 그들은 난장이의 큰 아들이 갇혀 있다 죽어서 나온 형무소를 본다. 도망간 사장을 잡지 못한 채 이야기는 끝난다.
○ 작가의 말
- 이것 역시 괜한 이야기일지 모르겠는데, 그 당시 나에게 큰 감동을 준 예술가들은 이상하게도 뛰어난 작품을 남긴 것과 상관없이 개인적으로는 모두 불행한 삶을 살던 사람이었다.
- 혁명이 필요할 때 우리는 혁명을 겪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자라지 못하고 있다. 제3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경험한 그대로, 우리 땅에서도 혁명은 구체제의 작은 후퇴, 그리고 조그마한 개선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우리는 그것이 목격자이다.
○ 해설
- 골드만에게 있어서의 소설은 타락한 세계와 진정한 가치 간의 대립에서 추구되는 변증법적 양상을 이루고 있거니와 조세희의 소설들 역시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타락한 세계에서 타락한 방법으로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형식을 얻고 있다. 우리가 <난쏘공> 연장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은 골드만이 말하는 바의 소설 장르의 본질적 성격에서뿐만 아니라 여기서 드러나는 세계관과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 자체가 타락과 승화의 대립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관계는 변증법적인 지양을 전망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대립을 오히려 더 깊이함으로써 초월의 가능성을 모색하게 한다는 데에 특이한 관찰이 요구된다. 그것은 그가 인식한 세계에서 대립된 두 계층이 절망적인 대결로 유도된다는 점에서, 그리고 타락한 장르로서의 소설과 승화를 지향하는 서정시의 대결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볼 수 있다.
- 그는 인물과 세계, 세계와 세계는 깊이 단절되어 있고 그것들의 화해 가능성에 대해서는 절망한다. 이러한 세계 인식이 골드만이 말하는 '타락한 방법'으로서의 소설로 표현되고자 할 때 그는 다시 한번 자기와 작품 대상과의 단절을 체험한다. 그가 대상과의 대립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의 대립적 세계관은 무효로 될 것이며 그 대답을 전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소설의 성립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단절감은 이중화된다. 그래서 그가 택할 수 있었던 것은 대립을 방법적으로 구축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니까 서사적 공간 속에서 서정적 구조를 갖는 것이다. 이러한 실제적 표현은 여러 수법으로 나타나고 있다.
나는 그의 금고에서 우리의 것을 꺼냈다. 그의 금고 속에는 돈과 권총과 칼이 함께 들어 있었다. 나는 돈과 칼도 꺼냈다. 나는 달 천문대 밑에서 쪼그리고 앉아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했다. 아버지는 이미 오십억 광년 저쪽에 있는 머리카락좌의 성운을 보았는지 모른다. 오십억 광년이라면 나에게는 영원이다. 영원에 대해서 나는 별로 할 말이 없다. 한밤이 나에게는 너무나 길었다. 나는 그의 얼굴에서 수건을 떼고 약병의 뚜껑을 닫았다. 나에게는 영원이다. 영원에 대해서 나는 별로 할 말이 없다. 한밤이 나에게는 너무나 길었다. 나는 그의 얼굴에서 수건을 떼고 약병의 뚜껑을 닫았다. 나에게 더없이 고마운 약이었다. 첫날 그 약이 괴로워하는 나의 몸을 마취시켜 잠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처음 표정을 볼 수 없었다. 나는 손가방을 열어 그 안의 것들을 확인했다. 모두 가지런히 넣어져 있었다. 나는 옷을 입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
이 문장들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거의 전부가 단문으로 유지되었다는 것, 그 단문들 사이에는 접속사가 전혀 없다는 것, 과거와 대과거의 시제가 문법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는 것, 객관 묘사와 내면 의식이 간격 없이 이어져 있다는 것 등이다. (...) 내면 의식들이 서경시처럼 객관적으로 표출되고 있다. 의식과 사건의 진행이 동일한 차원의 문체 구조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신중한 해석을 요구하는 그의 기법과 더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접속사가 없는 단문의 연속 배치는 개개의 묘사 대상에 연속성을 주면서 그 연속 대상들 사이의 끊임없는 단절감을 부여한다. 시제의 혼란은 표면적으로 단절감을 계속 환기시키면서도 의식상으로는 연속된 심리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환상 혹은 내면과 현실과의 몽타주 수법은 개개의 독립된 묘사 대상을 서로 대조시키며 심층 구조에서의 동질성을 강화한다. 요컨대 조세희의 문체와 기법은 단절-연속, 대립-동질, 또는 단절/연속, 대립/동질의 세계관을 함축하고 있다. 그것은 직사각형 - 뫼비우스의 띠에서 설명된 세계관과 통한다. 다시 말하면 인물과 세계, 작가와 대상, 간명과 복합, 단절과 연계, 그리고 서사적 공간과 서정적 구조의 대립과 초월을 위한 방법적 표현인 것이다.
3. 타인의 감상 / 그밖에
- 시멘트 바닥에 낙서를 할 때가 가장 행복했었다는 주인공의 대사가 너무 가슴 아프다. 돌아보면 그것이 난장이 가족이 유일하게 행복했던 장면 같다.
- 교회에서 골판지를 훔쳐와 배를 만든 장면이 있는데 골판지를 빼온 교회는 멀쩡한데 그것으로 만든 배는 고장 나 가라앉는 장면이 역설적이다.
- 난장이의 이름 '김불이'의 '이'는 과거 노비 이름에 주로 쓰이던 한자이다. 즉, 김불이의 이름은 '노비가 아니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
- p.129 / 차는 행복동을 떠나 낙원구를 벗어나고 있었다.
* 어쩌면 이것은 반어적 표현이 아닐지 모른다. 가족들이 행복했던 기억은 행복동에서 끝나고 만다.
- 난쏘공의 배경이 된 장소는 중랑천이 지나는 면목동과 서대문구 현저동이다.
- 소설 속 25만 원으로 책정된 이주비는 현재 가치로는 약 500만 원 상당이라고 한다.
- 영희가 부동산 업자의 집에서 도망친 이후 지속적으로 현기증을 느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그녀의 임식을 암묵적으로 말해주는 것 같다.
- 생디칼리즘(syndicalism, 노동조합주의): 노동자의 직접 참여로 사회를 변혁하자는 운동
- 한국의 노동상황은 더 개선이 필요한가, 혹은 이미 충분히 좋아졌는가?
▷ 이야기 속 난장이의 큰 아들이 요구하는 수준의 개선은 이루어진 것일 수 있다. 이야기 속에서 사측은 집행할 비용과 회사의 수익을 알려주지 않고 그저 '돈이 더 들어갈 곳이 많다'라는 수준의 핑계만 댄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비교적 이런 부분이 공개되기 때문에 정보가 공개되지 않아서 발생하는 답답함이나 피로함은 많이 줄어들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남아있는 큰 문제는 정보 공개의 차원보다는 현재 기준(법)으로도 정해진 노동 환경을 준수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최저임금, 안전 관련 규정). 실제로 대화에 참여한 한 독자(간호사)는 수술방을 소독할 때 규정에서 명시된 마스크나 보호장구 없이 일을 하고, 보건 감독이 나올 때만 장구를 제공받는다고 했다.
'리뷰 > 독서 기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희랍어 시간(한강) (1) | 2025.12.13 |
|---|---|
|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유홍준) (2) | 2025.12.08 |
| 허송세월(김훈) (0) | 2024.08.31 |
| 인디문학1호점 2023 수필집 오! 나의 글스타그램(윤태원) (0) | 2024.07.28 |
| 슈독(필 나이트) (1) | 2024.07.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