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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서울 백지계획(상- 하) / 손정목의 서울 도시계획이야기 中

Varsika 2023. 12. 26. 0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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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속에서

 

- "김현옥 이전에도 김현옥없고 김현옥 뒤에도 김연옥은 없다." 그는 1966년부터 70년대까지 재임 4년(와우아파트 붕괴사건으로 퇴임) 동안 실로 엄청난 일을 저지른 인물이었다. 내가 여기서 '저질렀다'는 표현을 쓰는 것은 '엄청난 것을 이룩했고 파괴했고 조성했으며 동시에 해서는 안 될 일도 했다'는 뜻이다. 숱한 지하도를 팠고 140개가 넘는 보도육교를 놓았으며 청계고가도로도 만들었다. 남산에 두 개의 터널을 뚫었고 불광동길, 미아리길도 그가 넓혔다. 한강개발, 여의도개발, 강남개발도 처음 한 것은 그였다. 400동의 시민아파트도 지었고 광주대단지도 그가 만들었으며 봉천동, 신림동, 상계동 등지의 거대한 불량지구 마을도 그가 만들었다. 한 마디로 그는 일에 미친사람이었따. 

 

- 김현옥 시장이 발설한 백지계획안에 대한 위 다섯명의 평을 간단히 줄여서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1) 이구 - 새서울 만들 필요성이 있음은 인정한다. 그러나 아직은 시기상조라고 생각하며 오히려 현재의 서울을 개선하는 데 주력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본다. 한꺼번에 여러 사업을 벌이면 무모한 계획이 되기 쉽다.

* 영친왕의 아들이며 조선왕조 마지막 종손, MIT에서 건축을 공부함

 

(2) 손정목 - 앞으로의 인구증가, 교통의 혼잡 등에 대비해서 새서울을 만들 필요성은 인정한다. 후보지 선정에 있어 새서울은 현 서울과 멀리 떨어져서는 안 되며 그 규모도 3~4천만평에 인구 100~150만(김현옥 시장의 초기 구상)은 무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좀더 좁은 면적에 건물을 고층화, 고밀도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각 분야 전문가들에 의한 충분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한다.

* 당시 '도시'에 관한 글을 가장 많이 발표하는 신진학도 

 

(3) 김중업 - 한 도시를 건설한다는 것이 어느 한 사람의 영감이나 결단에 의해 될 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새서울의 모습은 한 마디로 토탈 시티(집중화, 고층화된 도시)여야 될 것으로 믿으며 김시장이 발설한 규모는 무모하다고 본다. 새서울과 구서울 사이엔 녹지대를 만드는 등 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 

* 당시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4) 윤정섭 - 이 계획이 성공하려면 기본계획, 세부계획, 재정계획 등 전체적 계획을 치밀하게 짜야 한다. 인구규모느 ㄴ30~40만 정도가 적합하지 않을까. 위치는 한강 이남이어야 하며 현 서울 중심 120km권 안에 들어가야 한다. 범 국민적 예지를 집중하는 신중함을 가해야 한다.

* 대학에서 도시계획을 강의하는 극히 드문 전임교수(서울대 교수)

 

(5) 이한순 - 장차 사회적으로 안정된다는 전제가 붙는다면 찬성이지만 현재로서는 안정성이 확보되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새서울이 건설되더라도 경비만 낭비하고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새서울은 사회적 안정을 이룬 뒤에 장기개발계획으로 추진되어야 한다. 

* 당시 거의 유일한 도시지리학자(경희대 교수)

 

- 1990년대 후반기인 현재의 시점에서 1966년 김현옥 시장에 의한 새서울계획의 발설, 그리고 명색이 전문가들이라는 분들의 논평을 읽어 보면 정말 가소롭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1965년 말 현재 서울시 인구수는겨우 347만명이었고 1인당 소득수준은 105달러에 불과했다. 도시계획의 경험이라는 것은 겨우 40만평 정도의 구획정리사업을 몇 군데 해 보았다는 기술축적밖에 없었던 시대였다. (...) 한 개의 도시를 만들기가 얼마나 힘들고 또 그것이 미치는 파급효과가 얼마나 큰지 알기 위해서는 그로부터 10년이 더 지난 후,  즉 여의도 80만평, 영동 800만평, 잠실 400만평, 광주대단지 300만평을 조성하는 데 천신만고하는 체험을 겪고 난 뒤에야 알 수 있는 일이었다. 1966년 새서울 계획안은 하나의 허황된 꿈에 불과했다.

 

- 건축가 박병주. 새서울백지계획안은 박병주의 작품이었다. 박병주는 약 4반세기 동안 우리나라 도시계획게의 제1인자로서 마산, 전주, 경주, 구미 등 주요 지방도시의 도시계획과 서울 여의도, 잠실, 도심부 재개발계획에 깊이 관여하였다. 

 

-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 상임위원 이성옥이 박병주를찾아가서 "새서울 백지계획"을 그려 달라고 의뢰한 것은 김시장의 발설이 있은지 약 한 달이 지난 그해 6월 하순이었다. (...) 이성옥이 박병주에게 이 작업을 의뢰할 때 제시한 조건은 "4,000만평 정도의 넓이와 상주인구 100만 내지 150만 명의 규모 긜고 도시의 외곽을 무궁화형으로 해 달라."는 것뿐이었고, "그밖의 일체는 박선생에게 일임한다."는 것이었다. 박병주의 당시 직함은 대한 주택공사 단지연구실장이었으니 이 작업은 아르바이트 였다. 내가 당시 서울시 예산서를 찾아보았더니 작업비는 50만원이었던것 같다.

 

-

(좌) 르코르뷔지에의 300만명을 위한 오늘의 도시 (우) 박병주의 새서울 백지계획 평면도

 

- 박병주가 1966년 7월에 그린 새어울 백지계획은 코르뷔제가 그린 "300만을 위한 오늘이 도시"의 모방이라고 생각한다. (...) 새서울 계획이 300만 도시처럼 옆으로 뻗을 수 ㅇ벗었던 것은 무궁화라는 테두리에 맞추기 위해서 불가피한 일이었다. 새서울 백지계획은 어디까지나 정사학형의 되풀이었고 그 바깥에 그려 넣은 타원의 다섯 개 꽃잎은 단순한 테두리일 뿐이었다. 그러니까 무궁화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러한 모티브였다.

 

만약 무궁화 모습에 충실하려고 했으면 4각형의 도시가 아니고 5각형의 시가지를 그렸어야 했을 것이다. 일본의 북해도 하코다테에 있는 오능곽은 다섯 개의 꼭지로 이룩된 성곽이고, 미국 워싱턴에 있는 국방성 펜타건은 5각형의 건물이다. 만약에 무궁화에 충실하려고 했으면 5각형의 시가지는 충분히 그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박병주에게 있어 새서울 백지계획의 무궁화는 처음부터 테두리일 뿐이었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

 

모방이었건 아니었건 간에 당시 이만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박병주 이외에는 없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 주원과 대학국토계획학회

그가 어디서 어떻게 해서 국토계획, 도시계획을 공부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여하튼 광복이 되고 한국전쟁을 치른 후 50년대, 그는 국토계획, 도시계획 분야에서 이 나라 안의 제1인자였다. (...)

 

그가 광복 후부터 1980년대의 말까지 이 나라 안 국토, 도시계획 분야에서 군림할 수 있었던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세 가지 이유는 바로 그의 큰 공적이기도 했다.

 

(1) 이 나라에 최초로 국토계획, 도시계획의 개념을 도입했다.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 나라 도시계획의 주류는 토목이고 건축은  부수적이었다. 주원이 처음으로 국토 도시계획에는 토목, 건축의 기술적인 측면에 앞서 사회경제적인 측면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그것을 인식케 한 것이다. 그는 국토, 도시계획의 실무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경국제세가였다. 

 

(2) 많은 인재를 양성했다. 그에 의해서 진로가 개척도니 사람들, 예컨대 한정섭, 윤정섭, 이성옥, 김의원, 한근배, 장명수 등은 그후 한국 도시계획계에서 주류적 인맥을 형성한다. 그가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의 창설에 직접, 간접으로 기여한 것도 인재양성이 무엇보다도 앞서야 된다는 열의 때문이었다.

 

(3) 그가 1958년에 창설한 대한국토계획학회 때문이었다. 지금은 대한국토 도시계획학회로 그 명칭을 마꾸었지만 이 학회가 끼친 공적은 엄청나게 크다. 초창기부터 1970년대의 중반기까지 약 20년간 이 학회는 주원의 권위에 의해서 관리, 운영되었고 1976년 그가 회장직을 물러나고 명예회장이 되고 난 뒤에도 그는 항상 이 학회의 정점에 있었다.

 

- 김현옥 시정의특징은 즉흥적, 저돌적이라는 점이다. 김현옥이 예산의 뒷받침없이 일을 저질렀으며 예산조치가 그것을 뒤쫓아갔음은 그가 시장으로부임한 66년 4월부터 그해 12월 말까지의 9개월 동안 여덟 번이나 추경예산을 편성, 시행했다는 사실에서 충분히 알 수가 있다. 

 

- 서울시 도시 기본계획의 내용

(1) 계획기간은 1966년에서 85년까지 20년간이며 목표인구는 500만. 1965년 말의 인구가 347만이었으니 20년 동안 약 150만명이 더 늘 것으로 추정한 것이다. 

 

(2) 계획의 수법으로 전국성, 지역성, 종합성, 능률성, 과학성 등 5개항을 들고 있다. 

* 전국 각 지역의 중심지로서의 서울(전국성)

* 서울 중심 반경 40km 권내에 들어가는 중부지역 중심지로서의 서울(지역성)

* 인간활동의 질과 양을 풍요롭게 하고 자원과 산업, 가계 긜고 각종 사회적 시설이 일체성 유지(종합성)

* 국가발전은 생산과 생활활동량의 극대화에 있다 그러므로 교통, 통신, 시장, 주택, 학교, 공원 등 일체의 시설이 생산, 생활활동 극대화를 위한 수단으로써의 능률향상을 지향해야 한다. (능률성)

* 계획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통계 및 기술혁신에 따른 과학성이 제고되어야 한다.(과학성)

 

(3) 기능분산과 인구배분

정치와 행정기능을 입법, 사법, 행정으로 구분하여 입법부를 남서울(현 강남-서초)에 사법부를 영등포에 입지케하고 행정부는 요산일대에 그리고 현 행정중심부인 세종로지역은 대통령부로 하여 대통령 관저 및 대통령 직속기관ㅇ르 배치토록 한다. 

 

(4) 기타

* 노면절차는 철거하고 교통량이집중되는 광화문 네거리와 시청앞 광장은 지하차도를 계획한다. 특히 시청앞 광장 지하는 지하도시화한다.

 

- 국토계획학회가 기본계획의 개요를 서울시에 제출한 것은 아마 1966년 8월 11일경인 것 같다. 서울시장은 신문기자 회견을 자청하여 13일에 발표했다. (...) 국토계획학회가 서울 도시기본계획의 정식보고서를 서울시에 제출한 것은 그해 12월 말이었다. 

 

- 8월 13일에 도시기본게획안을 발표할 때 김현옥 시장도 많은 비판이 쏟아질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 발표석상에서 "준열한 비판과 보다 좋은 대안을 제시해 달라. 그와 같은 비판과 대안제시를 겸허하게 받아들여 12월 말까지 완전한 계획을 수립하겠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또 그는 기본계획의 시행년도가 20년 이상 장기간이라는 점도 고려하여 12월 말까지 완성되는 기본계획의 내용을 "서울도시계획법" 또는 "수도권정비법"이라는 이름으로 법제화하여 누가 시장이 되더라도 변경할 수 없도록 못을 박아 놓겠다는 약속까지 하고 있다.

 

- 새서울 도시계획의 발표와 그에 따른 여론에 대한 박병주의 평

▷ 신문보도는 한결 같이 '도시계획은 훈장과는 다르다. 무궁화 속에 도시를 그린다는 것은 우스운 얘기'라고 비꼬았다. 신문이 이 백지계획을 대서특필했고 그 후보지의 예상기사까지 취급하리 만치 떠들썩했다. 신수도건설을 그렇게 가볍게 본 신문보도도 우습거니와 확고한 방침도 결정되지 않은 마당에 마치 신수도 건설방침을 굳힌 것 같은 인상을 던진 시 당국의 처사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 사싱살 이 백제 계획을 그린 사람은 오랫동안 베일에 가려 있었다. 시 당국이 작가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그림ㅇㄹ 그린 장본인이 그것을 밝히지 않았으니 알 까닭이 없었다. (...) 1992년인가 93년인가, 어느 날 두 사람만의 술자리에서 "손선생, 새서울 백지계획을 그린 사람은 나였소."라는 실토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김중업 등이 도시는 훈장이 아니다, 중학생이 그린 용기화 수준이다 등등으로 평가했기 때문에 부끄러움이 앞서서 지금까지 비밀로한 것이오."라는 것이었다. 

 

도시기본계획안에서 수도기능의 단핵 집중을 막기 위해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를 각각 용산, 영등포, 강남에 배치하였다. 기 계획은 '남향한 삼두 마차' 같다는 비판을 받았는데 정부기능만 분리한다고 해서 도심부에 집중되는 업무기능과 사람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다.

 

- 도시 기본계획안이 수립된 그해, 1966년 10월 1일 현재로 국세조사가 실시되었다. 서울의 인구수는 총 379만 3,280명이었다. 서울시 당초예산 규모는 일반, 특별 회계를 합쳐서 170억원(1967년 예산)이었다. 1966년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끝나는 해였다. 이 제1차 5개년 계획이 끝나면서 그 지긋지긋한 '보릿고개', '절량농가' 현상도 끝이 난다. 이해 8월 9일에 서울의 쌀값이 한 가마당 4,000원을 돌파하여 크게 문제가 되었다. 당시 공무원 봉급(4급을 주사보)은 6,960원이었다. 서울시 신 편입지구였던 영동(현 강남, 서초구) 일대의 땅값이 평균 한평 당 2,000원 정도의 시대였다. 서울 시내를 달리던 자동차 총수는 겨우 2만대였고 택시 요금은 기본 2km가 50원, 500m를 초과할 때마다 10원이 추가되었다. 1966년도 중앙정보 세입세출 총예산규모가 1,200억원이었으며 공식 달러환율은 275대 1이었다. 그러한 시대에 3,250억원이라는 금액은 어마어마한 것이었고, 인구 500만의 미래는 아득할 수 밖에 없었다.

 

- 그러나 66년 여름에 처음수립되었던 도시기본계획은 엄청나게 큰 뜻을 가지고 있다. 그 첫째는 그것이 문자그대로 최초의 기본계획이었다는 점이다. 둘쨰는 이 계획안에서 처음으로 도심부재개발이니 고도지구, 미관지구의 개념이 도입되고 일반에 공개되었다는 점이다. 셋째는 불완전하나마 20년 장기계획이라는 것의 틀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1970년대, 80년대에 걸쳐 전국 각도시마다 수립된 그 숱한 도시기본계획안이라는 것은 이 66년 서울계획이 모델이 된 것이다. 

 

- 김현옥의 4년 재임기간의 그 숱한 자기과시 행위들 중에서 가장 으뜸인 것이 8.15전시였다. "내가 앞으로 전개해 나갈 도시계획사업의 주된 내용을 모형과 도면으로 나타내어 전시함으로써 대통령을 비롯한 온 시민에게 널리 홍보하는 일", 그것이 8.15 전시였다. 도시계획 내용을 이렇게 미술전람회처럼 전시한 일은 전세계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서도 그 전례가 없었을 것이다. (...) 

 

전시품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강건희가 주관한 도시기본계획 모형이었다. 이 모형은 평면이 3천분의 1, 높이가 4천분의1로 작성되었다. 좌우 넓이가 28m 정도나 되었고 모형 밑에는 1m 정도의 좌대를 만들었다. 강건희는 당시의 사정을 아래와 같이 회고하고 있다.

 

"모형이 거의 완성되어 갔을 때부터 청와대 경호실 사람이 출입했습니다. 작업장에서 전시회장까지 갈 때에는 경호실에서 호송을 햇습니다. 전시회장에서 조립을 끝냈더니 사진도 못 찍게 하고 작업반원 전원을 내보냈어요. 저도 그자리에 있지 못하도록 해서 부득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시가 끝난 뒤에는 경호실에서 그 모형을 파괴해 버렸습니다. 간첩들이 사진을 찍으면 안 된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 모형사진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 이 전시회가 끼친 공과 과 각각 하나씩을 들어보고 싶다. 그 공은 도시계획의 대중화였다. 그때까지 도시계획이라면 극히 이부 전문가들의 전유물이었고 일반시민은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전시회가 개최된 후 일반시민도 도시계획이라는 것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먼 것이 결코 아니다. 바로 신변의 문제이다.'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

 

(신편입지구의 간선가로뿐만아니라 세로망 계획까지 기입해두었다. 이 세로망 계획은 국토계획학회에서 그려 넣은 것이 아니었다. 시청주변 토목 설게사무소에 배분하여 말단 직원들에게 시켜서 나누어 그리게 했다는 것이다.) 전시장을 찾은 변두리 시민들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이 가로망을 주의깊게 들여다보았다. 바로 자기 집, 자기 땅에 그려진 세로망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서울시가 저지른 큰 과오였다. 훗날 지적측량을 끝마치고 제대로 세운 세로망계획이 이 전시회의 세로망과 일치할 리가 없었다. 서울시는 그 후 오랫동안, 이렇게 함부로 그려 넣었던 전시회 세로망 때문에 곤욕을 치르게 된다. 자기 땅 바로 앞에 가로가 놓일 줄 알고 있었는데 그 위치가 달라졌으니 부정이 있지 않았느냐 하는 변두리 시민의 항의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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