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감상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남도의 황토, 남도의 들판 부분에서는 내가 남도를 여행하며 느꼈던 그곳의 산과 들판에 대한 정취가 언급되어 반가웠다. "남도땅의 산등성은 참으로 포근하게 감싸주는 아늑함이 있네요."
표현이 맛깔스럽다. 읽는 맛이 있다. 아래에 발췌한 가야산에 대한 묘사가 대표적이다. 땅에 대한 정보와 자신의 경험이 순서를 다투듯 쾌활하게 독자를 향해 밀려오는 느낌도 좋다. 나도 이렇게 기억을 이야기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관동지방의 폐사지 파트가 정말 재미있었다. 답사의 급수부터 진전사와 선종의 이야기는 당장 다시 답사를 떠나고 싶게끔 만드는, 그리고 지난 나의 답사를 머릿속에 재상영하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국수 마시듯 후루룩 읽어 버렸다. 읽는 재미만으로도 왜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별개로 해학이 가득 담겨 있어 마치 흥겨운 술자리 대화에 낀 듯 수시로 웃었다. 긴 세월이 지난 후에 나온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제주도 편의 글이 젊잖은 편인 것과 비교해 보니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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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속에서
-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정조시대 유한준이라는 문인이 석농 김광국의 수장품에 부친 글)
- 땅의 의미란 그런 것이다. 모르고 볼 때는 낯선 남의 땅이지만, 그 역사적 의미를 알고 보면, 내 나라의 땅, 우리의 땅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 학생의 말대로 대흥사는 큰 볼거리가 있는 절은 아니다. 비록 나라에서 보물로 지정한 유물이 셋 있으나 그것은 역사적 가치일 뿐 예술적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초의스님은 선운사 백파스님이 <선문수경>을 지어 오직 수선에 전념할 것을 갈파했을 때 초의는 <선문사변만어>로써 선과 교 어느 한 가지만 고집할 일이 아님을 주장했다. 백파가 초의의 이런 논지에 반박하여 "교, 선을 둘이 아님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곳(誤處)"라고 지적하자 초의는 "당신이 오처라고 한 것은 바로 내가 깨달은 바의 오처(悟處)"라고 당당하게 맞받아쳤다고 한다. 그것은 불가 나름의 실학정신이었다.
- (별도 요약) 추사와 초의는 우정을 나누었고 추사는 초의에게 차를 배웠다. 추사의 명작으로 꼽히는 <명선茗禪> 역시 차를 마시며 참선에 든다는 뜻으로 작품의 옆엔 잔글씨로 작품을 쓰게 도니 내력을 말하고 있다. "초의가 스스로 만든 차를 보내왔는데 (중국의 유명한 차인) 몽정과 노아보다 덜하지 않다. 이 글씨를 써서 보답하는바, (한나라 때 비석인) 백석신군비의 필의로 쓴다. 병거사의 예서"
- 답사를 다니는 일은 길을 떠나 내력있는 곳을 찾아가는 일이다. 찾아가서 인간이 살았던 삶의 흔적을 더듬으며 그 옛날의 영광과 상처를 되새기고 나아가서 오늘의 나를 되물으면서 이웃을 생각하고 그 땅에 대한 사랑과 미움을 확인하는 일이다. 그런 답사를 올바로 가치 있게 하자면 그 땅의 성격, 즉 자연지리를 알아야 하고, 그 땅의 역사, 즉 역사지리를 알아야 하고,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내용, 즉 인문지리를 알아야 한다. 이런 바탕에서 이루어지는 답사는 곧 '문화지리'라는 성격을 갖는다.
- 오대산에서부터 뻗어내려온 차령산맥 줄기가 서해바다에 다가오면서 그 맥을 주춤거리다 방향을 아래쪽으로 틀면서 마지막 용틀임을 하듯 북쪽을 향해 치솟은 땅이 가야산이다.
- 배흘림 기둥은 삼국시대 이래로 우리 목조건축의 중요한 특징이며, 그리스 신전에서도 이 형식이 나타나 이른바 엔타시스(entasis)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왜 기둥에 배흘림을 가하게 되었을까? 지금 영국바르부르크 미술사연구소장으로 있는 곰브리치는 이것을 아주 명쾌하게 설명한 바 있다. "(엔타시스 형식을 취한) 기둥들은 탄력성 있게 보이며, 기둥모양이 짓눌려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지 않은 채 지붕무게가 기둥을 가볍게 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마치 살아 있는 물체가 힘 안 들이고 짐을 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 신라시대 역사를 서술하면 진평왕(재위 579~631), 선덕여왕(재위 632~646) 시대는 삼국간의 전쟁이 한창인 시절로만 묘사되어 이 시기에 무슨 문화창조가 있었을까 싶게 느끼게 된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지금 경주에 가서 볼 수 있는, 통일신라가 아닌, 고 신라의 대표적인 문화유물들은 거의 다 진평왕과 선덕여왕 때 만들어진 것이다. 국보 83호 금동반가사유상과 남산 선방곡 삼존불은 진평왕 때 유물로 추정되며 황룡사 구층탑, 분황사, 첨성대, 삼화령 애기부처, 남산 불곡의 감실부처님 등은 모두가 선덕여왕 시절 유물들이다. (...)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지극히도 비진보적인 여성관을 갖고 있었는데, 그가 선덕여왕조 끝머리에 "중국에서도 황후는 있어도 여자 황제를 세운 일이 없는데 음양의 원리를 거역하고 여자를 왕으로 세운 것은 참으로 난세의 처사였으며,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라고 논하면서도 "약한 돼지가 껑충거리고 뛰논다"라고 빈정댄 것은 여왕시절 문화가 별 볼 일 없어야 하는데 오히려 찬란하게 피어났음을 역설로 말해준 구절이다. (...) 이 여왕의 배포가 큰 것은 황룡사 구층탑만 보아도 알 수 있다.
- 황룡사를 생각할 떄 나를 놀라게 하는 사실은 두 가지가 더 있다. (...) 9층 목탑을 준공한 것은 92년 후인 645년이다. 그러니까 완공까지 걸린 기간이 장장 1세기에 육박하는 것이다. 698년 벼락을 맞아 720년 수리를 하고 754년에 에밀레종보다 세 배나 더 큰 종을 만들었을 때가 가람배치의 마지막 완공이라고 본다면 그것은 200년이 걸린 셈이다. (...) 우리 시대 어느 누가 90년 후에야 열매 맺을 과일나무를 심겠는가? 또 하나 놀라운 것은 황룡사 구층탑을 설계한 것은 신라 조정의 초청으로 백제 정부에서 파견되어 온 아비지였다는 사실인데 (...) 이때가 역사가들이 한결같이 말하고 있듯이 한창 통일전쟁을 하고 있던 시절이라면 어떻게 상대국에게 이런 청을 하고 또 응했겠는가. 또 9층탑을 지으면 아홉 오랑캐의 침략을 막을 수 있다 해서 층마다 나를 말하면서 일본, 중국, 말갈, 예맥을 다 적었는데 왜 고구려와 백제가 없는가?
- 신문왕은 부왕의 뜻을 이어받아 즉위 이듬해(682)에 완공하고는 부왕의 큰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감은사라 하였다. 신문왕은 문무대왕이 죽어 용이 되어 여기를 지키겠다는 유언에 따라 감은사 금당 구들장 초석 한쪽에 용이 드나들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놓은 것이 지금 감은사터 초석에서도 볼 수 있다.
- 무릇 심오한 진리는 가시적인 형상 이외의 것도 포함하나니 눈으로 보면서도 알지 못하며, 진리의 소리가 천지간에 진동하여도 그 메아리의 근본을 알지 못한다. 그런고로 부처님께서는 때와 사람에 따라 적절히 비유하여 진리를 알게 하듯이 신종을 달아 진리의 둥근 소리(圓音)를 듣게 하셨다. 무릇 종소리란 (...) 그 메아리가 끊이지 않으니 장중해서 옮기기 힘들며, 함부로 다루지 못한다.
- 남천우 박사가 주장한 바, 에밀레종이 납형법으로 제작되려면 22톤의 쇳물, 감량 20~30%를 계산하면 약 25톤~30톤의 쇳물을 끓여 동시에 부어야 한다. (...) 27톤의 끊는 쇳물을 거푸집에 일시에 붓는데 - 염영하 박사의 조사에 의하면 10곳에 주입구가 있었던 흔적이 있다고 한다 - 그 압력이 대단하여 거푸집이 웬만큼 튼튼하지 않고는 못 견딘다고 한다. 또 쇳물이 쏟아질 때는 거품이 일어나 버글거리는데 이때 공기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면 공기를 품은 채 굳어버려 기포가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이 공기를 어떻게 빼내었을까? 요즘 만든 주물에는 기포가 많은데 그때는 없었다니 신비할 따름이다.
- 사람들은 놀기를 좋아하면서도 단순히 노는 것에는 금방 싫증을 느낀다. 노는 중에 무엇인가 하나라도 얻을 수 있는 앎의 기쁨이 동반될 떄 비로소 논다는 일은 더욱 즐겁고 계속 즐길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답사야말로 진짜 즐거운 여행길이 되는 것이다.
- 언젠가 저 철조망은 거두어질 것이며, 저 끔찍스럽게 추한 초소도 헐리게될 것이다. 그날이 생각보다 빨리 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가 오면 나는 저 초소를 헐지 말자고 주장하고 싶다. 저 추한 모습이 마치 폐사지의 유허(遺墟)처럼 '폐군사지'의 유물로 남게 하여 훗날 문화유산 답사객들에게 냉전시대, 분단시대, 군사독재시대의 아픔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20세기의 문화유적으로 남겨놓자고 주장해보고 싶은 것이다.(양양 낙산사)
- 답사의 초급자들은 어디에 가든 무엇 하나 놓치지 않을 성심으로 발걸음을 바삐 움직이며 골똘히 살피고 알아먹기 힘든 안내문도 참을성을 갖고 꼼꼼히 읽어간다. 그러나 중급의 답사객은 걸음걸이부터 다르다. 문화재뿐만 아니라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는 여유를 갖는다. 그러면서 그는 다른 곳에서 보았던 비슷한 유물을 연상해 내어 상호 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곧잘 비교해보곤 한다. 말하자면 초급자가 낱낱 유물의 개별적, 절대적 가치를 익히는 과정이라면 중급자는 상대적 가치를 확인해 가는 수준인 것이다.
그러나 고급의 경지에 다다른 답사객은 얼핏 보기에 답세이의 열정과 성심이 식은 듯 돌아다니기보다는 눌러앉기를 좋아하고 많이 보기보다는 오래 보기를 원한다. 지나가는 동베분과 시잡지 않은 객담을 늘어놓고 가겟방을 기웃거리다가 대열에서 곧잘 이탈하곤 한다. 허나 그것은 불성실이나 나태함의 작태가 아니라 그 고장 사람들의 살내음을 맛보기 위한 고급자의 상용수단인 것을 초급자들은 잘 모른다. 고급자는 문화유산의 개별적, 상대적 가치에 대한 이해를 넘어서 그것을 총체적으로 인식하고 싶어 하는 단계인 것이다.
- 답사 코스를 보면 그것 자체에도 급수가 있다. (...) 결과론적으로 말해서 입장료를 내야 들어갈 수 있는 절은 초급, 입장료 없이 들어가는 절은 중급이다. 돈을 내도 많이 내야하는 불국사, 화엄사 등은 생초보 코스이고, 적게 내고 들어갈 수 있는 부안 내소사, 영천 은해사 같은 절은 비료적 중급에 가깝다. 그러면 고급과정은 어떤 곳일까? 그것은 절대 중도 없는 폐사지이다.
- 진전사탑은 석가탑의 전통을 기초로 하여 세워진 것이다. (...) 그러나 석가탑은 높이가 8.2m인데 진전사탑은 5m로 현격히 축소되어있다. 바로 이 점 때문의 석가탑의 장중한 맛이 진전사탑에서는 아담한 맛으로 전환되었다. (...) 석가탑에는 일체의 장식무늬가 없으므로 엄정성이 강한데 진전사탑에는 아름다운 돋을새김이 친근함을 더해준다. 이것이 두 탑의 차이다.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차이는 불국사는 통일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에 있고, 진전사 변방의 오지에 있다는 사실이다. 불국사의 가람배치는 다보탑과 함께 쌍탑인데 진전사는 단탑 가람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불국사가 중대신라 중앙귀족의 권위를 상징한다면, 진전사는 지방호족의 새로운 문화능력을 과시한 것이다. 중앙귀족이 권위를 필요로 했다면 지방호족은 능력과 친절성을 앞세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 점은 보통 차이가 아닌 것이다.
- 달마대사에서 시작된 선종이 6조에 와서 남북종으로 나누어져 남종선은 조계혜능부터 다시 시작됨은 내남이 모두 알고 있는 바 그대로다. 달마대사가 "편안한 마음으로 벽을 바라보면서" 깨달음을 구했던 것이 혜능에 와서는 "문자에 입각하지 않으며, 경전의 가르침 외에 따로 전하는 것이 있으니, 사람의 마음을 직접 가리켜, 본연의 품성을 보고, 부처가 된다(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고 호언장담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 서라벌에 돌아온 도의선사는 스스로 익힌 홍주종의 외침을 부르짖고 돌아다녔다. 경전이나 해석하고 염불을 외우는 일보다 본연의 마음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변혁사상이며, 인간의 평등과 인간성의 고양을 부르짖는 진보적 세계관의 표현이었다. 당시 통일신라의 왕권불교는 왕즉불의 엄격한 체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왕은 곧 부처요, 귀족은 보살이고, 대중은 중생이니 부처님 세계의 논리와 위계질서는 곧 사회구성체의 지배와 피지배 논리와 절묘하게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런 판에 도의가 서라벌에 와서 그 논리와 질서를 송두리째 흔들어놓은 것이었다. 서라벌의 승려와 귀족들은 도의선사의 외침을 '마귀의 소리'라고 배격했다. (...)
그래서 도의는 서라벌을 떠나 멀고 먼 곳으로 가서 은신할 뜻을 세웠으며, 그가 당도한 곳은 설악산의 진전사였따. 보림사의 보조선사비문에 의하면 "아직 때가 이르지 못함을 알고 산림에 은둔"한 것이라고 한다.
- 도의선사의 사상은 그의 제자 염거화상에 전해지고, 설악산 억성사에 계시던 염거화상의 가르침은 보조체징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보조선사는 장흥 가지산에 보림사를 세우고 여기에서 그 법을 전하니 이곳이 곧 하대신라 구산선문 중 가장 앞에 나오는 가지산파의 개창 내력이 된다. 그래서 보조선사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 때문에 달마가 중국의 1조가 되고 우리나라에서는 도의선사가 1조, 염거화상이 3조, 우리 스님(보조 선사)이 3조이다.] 도의가 '아직 때가 되지 못해 감추었다는 빛'은 그의 손자 제자 되는 시기에 와서 비로소 빛을 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도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것은 서라벌의 귀족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방에서 나름대로 경제적, 군사적 부를 키워온 호족들이었다. 호족의 입장에서 보면 도의가 주장한 자심즉불, 일문일가는 하나의 구원의 사상인 셈이었다. (...)
체제와 질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깨침의 능력이 중요하고 스스로 일가를 이룰 수 있다는 사상은 곧 호족도 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비약하게 된다. 이에 호족들은 다투어 지방에 선종사찰을 세우게 된다. 선종의 구산선문이 한결같이 오지 중의 오지로 들어가 보령의 성주사, 명주의 굴산사 등은 오늘날에도 폐사지로 남고 영월 법흥사, 남원 실상사, 곡성 태안사, 문경 봉암사, 장흥 보림사처럼 답사객을 열광케 하는 심산의 명찰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리고 역사의 진행은 이내 호족 중의 한 사람인 왕건의 승리, 불교의 이데올로기는 선종의 우위라는 확고한 전통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 모든 진행의 출발이 곧 여기 진전사에서 비롯되었으니 어찌 우리가 도의와 진전사를 모르고 역사를 말할 수 있겠는가.
- 위대한 조형물 부도의 탄생. (...) 진전사를 발굴한 정영호 교수는 이 부도가 곧 도의선사의 부도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으며 그것은 미술사학계에서도 공인된 학설이다. (...) 부도란 고승의 시신을 화장한 납골(사리)를 모신 건조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선종의 유포와 갚은 연관이 있고, 부도의 유행은 곧 하대신라 사회의 변혁적 기류의 한 상징물임을 잘 모르고 있다. 지금 우리가 가르치고 배우고 있는 문화사 교육은 이처럼 본연의 내용을 빼버린 겉껍질 이름 외우기만 급급한 실정이다. (...)
부도의 탄생, 그것 또한 위대한 탄생이었다. 도의선사 이전에도 부도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그것은 확실한 것도 아니고 설령 있다 하더라도 그것의 문화사적 내지 사상사적 의미는 다른 것이다. 신라시대의 저 유명한 고승들, 원효, 의상, 진표, 자장 등 어느 스님도 그 부도가 남아 있지 않다. 화엄세계의 거대한 논리와 질서 속에서 고승의 죽음이란 그거 죽음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대선사의 죽음은 이제 다르게 생각되었다. "본연의 마음이 곧 부처"이고 그것을 깨달은 사람은 곧 부처와 동격이 된다. 일문일가라고 했으니 그 독립성의 의미는 더욱 강조된다. 일문을 이끌어온 대선사의 죽음은 석가모니의 죽음 못지않은 것이다. (...) 그리하여 우리나라 구산선문의 제일문인 가지산파의 제1조 도의선사의 부도가 진전사 뒤쪽 산등성에 모셔진 것이었다. 이제 전에 없던 새로운 창조물을 진전사에서 처음 시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 염거화상의 제자인 보조선사의 부도에 이르면 우리는 9세기 하대신라의 석조물에서 부도가 지닌 위치를 확연히 확인하게 된다. 9세기 경주의 중앙 귀족문화를 본뜬 석탑은 일종의 매너리즘에 빠졌다손 치더라도 새로운 양식인 부도의 건조에는 온갖 저성을 다하게 되는 현상을 우리는 실수 없이 확인 할 수 있다. (...) 9세기는 부도의 세기였으며, 호족의 세기였고, 선종의 세기였던 것이다.
- 지증의 명성이 어처럼 높아지자 경문왕은 정중히 편지를 내어 서라벌 근처 아름다운 곳에 절집을 지어 모시고 싶다면서 "새가 자유로이 나무를 고르듯 훌륭한 거동을 아끼지 말아 주십시오"라며 간청하였다. 그러나 지증은 이 영광된 부름을 거부하면서 "진흙 속에 편히 있게 하여 나를 예쁜 강물에 들뜨게 하지 마십시오"라는 답을 보냈다. 이후 지증의 명성은 더욱 온 나라에 가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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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양산은 문경새재에서 속리산 쪽으로 흐르는 소백산맥의 줄기에 우뚝 솟은 기이하고 신령스러운 암봉이다. (...) 가은읍에서 봉암사 쪽으로 꺾어들어서면 제법 시원스러운 들판 저 멀리로 희양산 영봉이 신령스럽게 비친다. 북한산 백운대 인수봉과 진안 마이산을 합쳐놓은 것처럼 불쑥 솟은 봉우리가 기이하기 짝이 없다. 최치원의 표현으로는 "갑옷을 입은 무사가 말을 타고 앞으로 나오는 형성"이라고 했다. 다시 지증은 나무꾼이 다니는 길을 따라 지팡이를 짚고 희양산 한복판 계곡으로 들어가 지세를 살피니 "산은 사방에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으니 마치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치며 올라가는 듯하고, 계곡물은 백 겹으로 띠처럼 되었으니 용의 허리가 돌에 엎드려 있는 듯하였다." 이에 지증은 감탄 어린 어조로 탄식하여 말하기를 "여기는 스님의 거처가 되지 않으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 나 역시 봉암사에 당도하여 넋을 잃고 먼 데 산봉우리를 보고 또 보니, 낙성식에 온 한 '아지매 보살'이 넋 빠진 나를 넋을 잃고 보다가 "좋치예, 우리 할배가 커던데예, 봉암사는 열두 판 연꽃봉우지에 뻥하니 둘러 있다 캅디더. 그라고 절집은 꽃봉우지 화심이라 카던데예. 좋체예"라고 말하고는 잠시 아는 척한 것이 스스로 좀 쑥스럽게 생각됐던지 얼른 등을 돌리고는 종종걸음으로 돌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속으로 그 집 할배 문자 속이 최치원보다 나은 구석이 있다고 생각했다. 사실 최치원 글의 단점은 저처럼 사랑스럽게 달려와 안기는 맛이 전혀 없었던 점, 그래서 옹혼한 이미지의 구사가 때로는 너무 현란하다는 점이 내 나름의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 오호라! 별들은 하늘나라로 되돌아가고 달은 큰 바다로 빠졌다. (嗚呼 星廻上天 月落大海) (...) 이런 장대한 이미지 구사가 나올 때 최치원의 글은 제격이었다. / 지증대사의 입적에 대한 최치원의 표현.
- "절이란 돌덩이, 쇳덩이 앞에서도 무릎을 꿇을 수 있다는 자기 겸손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 술은 자기가 변해가는 모습을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아요. (왜 술을 어두운 지하실에서 숙성해야 하냐는 질문에 대한 답)
- 양산보가 원림의 이름을 소쇄원이라 하고 사랑채와 서재가 붙은 집을 '제월당', 계곡 가까이 세운 누정을 '광풍각'이라고 한 것은 송나라 때 명필인 황정경이 주무숙의 인물됨을 "흉회쇄락 여광풍제월(胸懷灑落 如光風霽月) (...) 이라고 한 데에서 따온 것이다.
- 무릇 설화 속에는 그 설화를 가능케 한 한 가닥의 근거는 있는 법이다. 본래 이 지방에는 도적이 많았는데 검단이 와서 해안에사는 사람들에게 소금 만드는 법을 가르쳐 생업을 삼게 했다는 얘기가 사적기에 나오는데 이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불교를 포교하던 초기 스님들은 이처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이익을 중생들에게 베풀면서 포교를 시작했었다. (...) 그것은 소금을 만드는 이 고장을 검단리라고 하고, 또 8.15 해방 때까지만 해도 이곳 염전마을 사람들이 보은염이라고 해서 선운사에 소금을 시납 했다는 사실로도 뒷받침된다.
- 백파는 임제선사가 확실한 개념규정 없이 제시한 이른바 임제삼구에 모든 교와 선의 요지가 포함되었다고 보면서 이 임제삼구의 내용에 따라 선을 의리선, 여래선, 조사선으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백파는 마음의 청정함(佛)을 대기, 마음의 광명(法)을 대용이라 하고, 그 청정과 광명이 함께 베풀어짐(道)을 기용제시(機用齊施)라 생각했으니, 이 역시 임제선사의 사상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백파스님은 조사선에서는 대기대용이 베풀어지면서 세상의 실상과 허상, 드러남과 감추어짐이 함께 살활자재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었다.
- 백파가 <선문수경>을 세상에 내놓자 이에 맞서 반박논리를 편 것은 해남 대흥사 일지암의 초의 선사였다. 초의는 실학의 불교적 수용자라고 지칭되는바, 그는 교와 선은 다른 것이 아니라며 조사선이 여래선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입각처가 선이면 조사선이고, 교면 여래선으로 된다면서 "깨달으면 교가 선이 되고, 미혹하면 선이 교가 된다"는 유명한 명제를 내세웠다.
- 가난하기는 송곳 꽂을 자리도 없었으나 기상은 수미산을 덮을 만하도다 어버이 섬기기를 부처님 모시듯 하였으니 그 가풍은 정말로 진실하도다 속세의 이름은 긍선이나 그 나머지야 말해 무엇하리오. 완당학자 김정희가 찬하고 또 쓰다. (추사의 백파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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