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중 교수는 재일교포 2세로 일본에서 쭉 살아왔다. 재일 한국인이라는 차별을 견디며 한국인 최초로 도쿄대 교수가 된다(재일교포로 살아오면서도 한국 국적을 유지). <고민하는 힘>은 2009년에 발표된 책으로 원문은 일어로 쓰였고 후에 한국어로 번역되었다. 책의 주된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고민 = 삶의 원동력,
고민하는 삶 = 청춘의 삶,
고민의 연속 = 현대사회의 당연한 과제이자 현상이라는 것.
고민하지 않고 요령껏 살아가는 청춘은 이미 탈색한 청춘이고, 편안한 노년에도 끊임없이 고민하는 이들은 영원히 청춘으로 살 수 있다는 내용이다.
중세시대에는 종교가, 중세 이후 근대까지는 전통과 관습이 우리 삶의 기준을 정했다면 현대사회에서는 종교, 전통, 관습이 모두 해체되어 오로지 스스로 삶의 기준을 정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시대에 고민하는 것만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을 줄 수 있다는 내용이다. 즉 고민하는 힘은 바로 살아가는 힘과 직결된다는 것이 저자의 메시지.
대학에서 다닐 때 젊은 교수님께서 "뭘 해야지라는 생각보다 뭘 했어야 하는 생각이 들면 늙은 것이다."라는 말씀을 했는데 나는 정확히 후자의 상태였다. 그때 나는 25살이었다. 그때 이후로 몇 가지 시도를 꾸역꾸역 한 탓에 조금은 늙음을 유예할 수 있었다. 이 책을 읽고 그 교수님의 말씀이 떠올랐고 불현듯 감사했다.
* 소설 속의 인물로 여러 인간군상을 분석하는게 참 묘하고 재미있다. 이런 재미를 아직 잘 알지 못해 소설을 읽지 못하는 것 같다.
* 9장 늙어서 '최강'이 되라를 읽으면서는 오래 전 공연에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애들아, 나이 먹는 거 겁먹지마라. 나이 먹으면 더 좋아..좋은게 더 많아."
젊은 시절, "왜 이런 고민을 자꾸 하는 걸까? 내가 예민한 걸까?"라며 자책하던 순간도 많았은데 그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많은 위로가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고민의 무게에 종종 지칠 때, 또 고민의 효용(?), 가치, 의미에 대해서 알고 싶을 때, 한 번쯤 위로를 얻고 싶은 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 (일당백 리뷰) 고민하는 힘으로 스스로를 단단하게 만들 수 있다. "모든 혁명은 습관 때문에 실패한다"
- 그러나 이 두 사람(나쓰메 소세키, 막스 베버)은 감정 기복이 심했던 내 청춘을 수놓은 우뚝 솟은 위대한 존재였습니다. 나는 두 사람에게서 '고민하는' 것이 '사는' 것이며, '고민하는 힘'은 살아가는 힘'임을 배웠습니다.
- 정신의학자 빅터 E. 프랭클은 "호모 페이션스(patience, 고민하는 인간)의 가치는 호모 파베르(faber, 도구를 사용하는인간)보다 더 높다", "고민하는 인간은 도움이 되는 인간보다 더 높은 곳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은 그의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어머니를 떠올립니다. 어머니는 고민의 바다를 품고 있었기 때문에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가 줄어들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 이제 고민은 의미가 없는 것이고 가치 따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재앙'일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고민하는 인간'은 그저 운이 나쁜 불행한 인간에 불과한 것일까요?
- 경제인류학자 칼 폴라니는 공동체가 지닌 목가적 연결이 해체되고 있는 시장경제를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말을 빌려 '악마의 맷돌'이라고 불렀습니다.
- '변하지 않는 가치'와 같은 것이 거의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이런 상황에 맞춰 인간 또한 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생각에 빠져 있으면 뒤처지고 맙니다. 지금의 상황을 다른 말로 하면 '죽느냐 사느냐'가 아니라 '죽느냐 변할 것이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변하지 않는 가치'를 찾으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사랑이나 종교 등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 또한 변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변화를 추구하면서 변화하지 않는 것을 찾습니다. 이렇듯 현대인은 상반된 욕구에서 정신이 조각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나쓰메 소세키는 문명이 발전하면 할수록 인간은 구원받기 힘든 고립의 상태에 이른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 자아의식은 결국 신경쇠약을 낳는다. 신경쇠약은 20세기의 모두가 공유하는 병이 될 것이다. (나쓰메 소세키)
- 자기의 성만을 만들려고 하면 자기는 세워지지 않는다. 그 이유를 궁극적으로 말하면 자아라는 것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 타자를 배제한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 시대의 흐름 속에서 모든 가치가 변화하는데 돈만은 불변의 가치를 지닌 일종의 기호로서 계속 존재해 온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이래서 돈은 경시하기 힘듭니다.
- 만약 청춘이라는 것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땀을 흘리고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거나 육체의 젊음을 노래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내 청춘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1장에서도 말했지만 그 시기의 나는 고민의 바닥에 깊이 가라앚는 답이 나오지 않는 물음에 사로잡혀 괴로워했기 때문입니다. '발랄'이라는 형용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번민만 있던 때였지요.
- 인간이 무엇인가를 졸업하고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계절이 봄입니다. 그러나 모두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곁눈질하면서 그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즉 봄이라는 계절은 어떤 의미에서는 잔혹한 계절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 의미를 알 수 없는 불안에 사로잡혀 그 불안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했습니다. 여하튼 그 시절의 나는 그것이 무엇이든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막스 베버와 나쓰메 소세키의 청춘시절의 모습을 살표보면 (...) 보상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 청춘을 얼마간 허무와 함꼐 보내고, 그래도 의미를 묻지 않고는 살없다는 욕구에 시달렸습니다. 좀 추상적이긴 하지만 '허공에 걸려 있는 청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실존적 공허함'과 같은 것입니다. 당시에 나는 '나뿐만이 아니라 이 사람들도 그렇구나'라고 느끼며 힘이 난 적이 있습니다.
- '해답이 없는 물음을 가지고 고민한다' 그것은 결국 젊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달관한 어른이라면 그러 일은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는 청춘이란 한 점 의혹도 없을 때까지 본질의 의미를 묻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알고 싶다'는 자기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갈망과 같은 것을 솔직하게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는 좌절과 비극의 씨앗이 뿌려져 있기도 합니다. 미숙하기 때문에 의문을 능숙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발이 걸려 넘어지기도 합니다. 위함헌 곳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이 청춘이라고 생각합니다.
- "청춘이란 밝은 것만이 아니고 한 꺼풀만 벗기면 죽음과 맞닿아 있는 잔혹한 것이다."
- 자아의 어둠을 찾다 보면 이유도 모르는 이매망량(魑魅魍魎, 온갖 유령과 도깨비)이 나타나기 쉽기 때문에 그것을 피한다는 의미에서 고민 없이 사는 것도 현명한 삶의 방식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얼핏 원숙한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진짜로 원숙한 것이 아니라 바닥이 얕은 원숙함, 즉 원숙한 기운망 풍기는 것이지요. 그들의 태도는 온갖 인간관계에서 분명한 태도를 취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깊이 들어가지 않고 능숙하게 피해 가는 방법과 통합니다.
- 본래 청춘은 타자와 미칠 듯이 관계성을 추구하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공공연한 생생함은 적극적으로 피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 타인과 깊지 않고 무난한 관계를 맺고, 가능한 한 위험을 피하려고 하며,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별로 휘말리지 않으면서 모든 일에 구애받지 않으려고 행동하는 그런 '요령이 뛰어난' 젊음은 정념과 같은 것은 사전에 잘라낸, 또는 처음부터 탈색되어 있는 청춘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나는 청춘 시절부터 '나'에 대한 물음을 계속하며 '결국 해답은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니 그 보다 '해답을 발견할 수는 없지만 내가 갈 수 있는 곳까지 갈 수밖에 없다'라는 해답을 찾았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 '종교의 자유'라는 말이 있듯이, 현재의 종교는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종교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계 그 자체였으며, 생활 그 자체, 좀 더 확장하면 사람들의 인생과 일체화된 것이었습니다. 신앙을 의미하는'religion'의 어원은 라틴어로 'religio'로 제도화된 종교라는 뉘앙스를 갖고 있습니다.
즉 종교라는 것은 '개인이 믿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속해 있는 공동체가 믿는 것'이었습니다. 공동체의 생활 그 자체였기 때문에 종교는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의문의 여지가 전혀 없는 설득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나는 무엇을 믿으면 좋을까'라는 물음 자체가 생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매우 행복한 상태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수많은 질문에 대해 주변에 있는 세계가 이미 해답을 준비해서 알려주었습니다. 의미를 자동적으로 공급해 주었던 것이지요. 달리 표현하면,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보호막에 의해 보호를 받고 영양분을 받으면 살아가는 태아와 비슷합니다.
- 신앙에 의한 은폐가 사라지고 '개인'에게 모든 판단이 맡겨진 근대 이후 해결하기 힘든 고민이 시작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 무언가를 선택하려고 할 때마다 자아와 마주쳐야 하고, 그때마다 자기의 무지와 어리석음, 추함, 교활함, 연약함 등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점에서는 역설적일지도 모르지만 "현대인은 마음을 잃었다"라는 말이 틀렸고 오히려 전근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마음을 잃고 살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 개화가 진행될수록 또한 직업의 성질이 분화될수록 우리는 단편적인 인간이 되고 마는 묘한 현상이 일어난다. (나쓰메 소세키 <도락과 직업>)
- 사회에 살아가기 위해서는 타자로부터 어떤 형태로든 동료로 인정을 받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위한 수단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일을 통해서 비로소 '거기에 있어도 좋아'라는 인정을 얻게 됩니다.
- 사회 속에서 형성되는 사람들의 관계는 깊은 친구 관계나 연인 관계, 가족 관계 등과는 다른 면이 있습니다. 물론 사회 속의 관계도 '상호 인정'의 관계이지만 이 경우 나는 '배려(위로의 눈길을 향하는 것)'라는 표현이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가 자기로 살아가기 위해' 일을 합니다. '자기가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어서 좋다'는 실감을 얻기 위해서는 역시 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 나는 나쓰메 소세키가 살았던 시대보다 훨씬 황폐한 불모지가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더 많은 '자유'를 손에 넣엇기 때문입니다. (...) 뭐든지 자유라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판단의 기준을 잃고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자유라는 것은 이처럼 곤란함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라는 가벼운 생각으로 선택한 사랑은 '언제든지 대체 가능한 사랑'이 되기 쉽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이 소모품이 될 우려가 잠재되어 있습니다.
- 사랑이 남녀의 상호작용에 의한 결과라는 의미에서 그들은 결코 사랑에 대해 게으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즉, 간단하게 처리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사랑은 그때그때 상대의 물음에 응답하려는 의지입니다. 사랑의 모습은 변합니다. 행복해지는 것이 사랑의 목적이 아닙니다. 사랑이 식을 것을 처음부터 겁낼 필요는 없습니다.
- 피해자입장에서 보면 전쟁이나 역병으로 생명을 빼앗긴 것과 같은 '부조리'를 느끼게 되고, 그래서 왜 자기 아이가 죽어야 했는가 하는 의미를 절대로 찾아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의미의 피안'이 생기고 마는 것이지요.
- 사람들은 자기 인생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면서 살아갑니다. 물론 하나하나의 의미를 일일이 생각하며 사는 것은 아니고 의미를 확신하고 있기 때문에 이해가 무의식화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 되었든 그것이 사람에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됩니다. 따라서 의미를 확신하지 못하게 되면 사람은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 늘 삶보다 죽음이 귀하다고 믿고 있던 내 희망과 조언은 결국 불쾌함으로 가득한 삶을 초월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그것은 나 스스로 평범한 자연주의자임을 드러낸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지금도 반신반의하는 눈으로 물끄러미 내 마음을 바라보고 있다.
- 우리는 자유를 얻은 대가로 관습이라는 제동장치 대신에 살아갈 수 있는 추진력이 될 무언가를 각자 손에 넣어야만 합니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만이 죽음에 대한 억제력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 '뇌'를 특화해서 피상적으로 이해하거나 '나'에 갇혀서 성을 만들지 말고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 타자를 인정하는 것은 나를 굽히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상대를 인정하고 나도 상대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니다. 거기에서 얻는 힘으로 나는 내가 되어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내가 비로소 내가 된다는 의미에 대해 확신할 수 있습니다. (...) 자기의 의미를 확신한 사람은 우울증에 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고민하는 것은 좋은 것이고, 확신할 때까지 계속 고민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중간하게 하지 않고 진지하게 끝까지 고민하는 것. 나는 거기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 인간에게 가장 궁극적인 공포는 바로 '죽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인의 힘'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힘'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도 생각해 봅니다. 과거처럼 피라미드 형태로 인구가 구성된 사회라면 노인은 소수일 것이고, '죽음' 또한 특별하고 무서운 것이었겠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저세상에 가면 고통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식으로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며 자기들이 견딜 수 있는 것으로 바꾸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고령화사회에서는 죽음은 아주 흔한 것으로 바뀝니다.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죽음이 허무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죽음이 두렵기 때문에 이런저런 의미를 부여하는 것과 반대로 '각오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 나는 '젊음에 무한한 가치를 두는' 듯한 생각을 전복시켜 보려는 심술쟁이가 될 떄도 있습니다. (...) 이제는 고령자가 문화를 만들어야 하는 시대입니다.
- 주위를 둘러보면 소악인이라든지, 소 악당, 프티 내셔널리스트, 프티 결벽증 등 소나 프티가 붙은 것이 너무 많습니다. 너무 적당하게 사는 게 아닐까요? 이왕이면 좀 더 규모가 있는 느낌이 좋습니다. '조금 나쁜 아버지' 따위는 이제 그만둡시다.
젊은 사람들은 더 크게 고민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고민을 계속해서 결국 뚥고 나가 뻔뻔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새로운 파괴력이 없으면 지금의 일본은 변하지 않을 것이고 미래도 밝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옮긴이) 막스 베버는 '의미의 거미줄(web of meaning)'이라는 말을 남겼다. 우리는 모두 의미의 거미줄에 매달려 있는 거미와 같다는 말이겠다. 우리는 이 거미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만 그 의미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할 것인지는 상당 부분 우리에게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