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감상
김영하의 에세이는 언제나 많은 사유를 하게 한다. 단편적이고 일시적인 자극이 아니라 지속적인 진동을 남긴다. 마치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눈다는 착각이 들 정도다. 이 책의 분량이 기대보다 짧다는 것이 유일한 단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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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속에서
- 바르트는 텍스트가 저자의 손을 떠나는 순간, 어떤 의미에서 더 이상 저자와 관련계가 없다, 왜냐하면 텍스트는 독자에 의해 무한히 재생산, 재창조될 대상이다, 텍스트에서 저자는 명목상의 저자일 뿐이다, 그러므로 텍스트에서 오독이란 무의미한 말이다,라고 설파한 바 있다. 그는 독자를 텍스트로 유희하며 새로운 텍스트를 생산하는, 다시 말해 텍스트를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는 존재라고 보았다.
- 내 생은 아마 반환점을 돌았을 것인데 여전히 내 앞에는 1968년에 받은 일회용 인생이 그대로 남아있다.
- 엄마가 (아들인 김영하에 대해) 너무나 자신 있게 한 말이 그렇게 많이 틀렸다는 것에 아내는 놀라곤 했다. 그러면서도 아내가 엄마의 말에 매번 다시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은 그 '앎'의 정확성에 대한 믿음 때문이 아니라 세상이 부모에게 부여한 앎의 권력(자식의 명목상의 저자라는 권위)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엄마는 자식을 정말로 잘 알았던 것이 아니라 '자식을 잘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권력', 즉 다른 사람이 귀를 기울이게 만들 힘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 천 개의 강에 비치는 천 개의 달처럼, 나라고 하는 것은 수많은 타인의 마음에 비친 감각들의 총합이었고, 스스로에 대해 안다고 믿었던 많은 것들은 말 그대로 믿음에 불과했다.
- 철학자 한병철은 우리 사회를 '모든 고통스러운 상태가 회피되'는 '고통공포'로 진단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사랑의 고통조차 의심스러운 것이 된다. (...) 한병철에게 긍정심리학은 진통제이며 마취제이다. 오늘날 고토 경험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고통이 무의미한 것으로 지각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통은 무의미하지 않다. 모든 진실은 고통스럽고 고통은 결속이자 자아의 윤곽을 드러내며 고통은 현실이다. 이 현실의 반대편에는 좋아요like의 세계가 있다. 문제는 아무리 고통을 회피하려 해도 고통은 반드시 귀환한다는 것이다.
(...)
한병철은 "만성적 고통이 견딜 수 없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오늘날의 사회가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만성적 고통은 의미를 상실한 우리 사회를, 우리의 이야기를 잃어버린 시대를 반영한다고" 진단한다.
(...)
요즘 유행하는 이야기들 속에서 주인공은 전능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주인공의 시련은 독자에게 불쾌한 경험을 제공할 뿐이다. 주인공은 시련이나 통과의례 없이도 매우 유능하거나, 미래에서 와서 과거의 일을 훤히 알고 있다. 또는 갈등 자체를 회피하면서 자기만의 성에 고립된 채 무해하게 살고 있다.
- 어떤 모임과 멀어지는 것은 그냥 그 모임과 안 맞아서다. 막상 들어가보니 모임의 분위기, 주도하는 사람, 모임이 부과하는 의무들. 이런 게 싫을 수 있다. 그래서 안 가는 것이고 원래 인간은 싫은 것을 하지 않으면 기분이 나빠지기는커녕 좋아진다. 그런데도 예전 모임 사람을 만나면 일단 좀 슬픈 표정을 지으며 변명하게 된다. (...)
아, 그 동아리? 너 아직도 거기 있니? 난 너무 지루했고, 그 누구더라, 회장 선배 좀 권위적이고, 다들 남 험담하기 좋아하는 분위기잖아? 다신 돌아가고 싶지 않아. 요새 다른 동아리 들었는데 거긴 정말 재미있어. 너도 그리로 와. 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어쩌면 우리는 모임을 떠난 사람들이 불행하기를 내심 바라는지도 모른다. 자기는 어떻게든 버티며 남아 있는데 떠난 사람들이 행복하면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떠난 사람들은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해 애써 불행을 연기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떠나는 사람들의 행복과 행운을 빌어주는 영화 장면이 늘 감동적인 것은 그게 쉽지 않아서일 것이다.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주인공 토토는 영사실에서 일하는 알프레도 할아버지와 친하다. 기차를 타고 로마로 떠나는 토토에게 알프레도는 분명히 말한다. "돌아오지 마라. 절대 그리워하지도 마라. 편지를 쓰지도 마."
이런 사람은 드물다. 드물어서 감동적이다. 대부분은 떠나지도 말고, 떠나더라도 어서 돌아오라고 한다.
- 리플리처럼 뛰어난 연기력만 있다면 교양은 비슷하게 흉내낼 수 있다. 그러나 교양인의 사회에는 의외로 익혀야 할 규칙이 많고 그 적용도 섬세함과 유연함을 필요로 한다. 오래 계속하다가는 탄로가 난다. 그들은 이카로스처럼 추락한다.
- 나는 언제나 이런 유의 이야기에 끌리곤 했다. 스탕달의 <적과 흑>이 그랬고 <위대한 개츠비>가 그랬다. 신분을 속이거나 없는 교양을 꾸며내어서라도 더 높은 사회적 존중을 얻으려는 인물들의 이야기. 이런 이야기들은 여전히 내 마음속 깊은 곳의 어떤 불안을 건드린다. (...) 내가 어딘가 잘못된 곳에 와 있고,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로 다시 '이탈'해야만 할 것 같은 이 익숙한 충동은 여전히 내 안에 있다.
- 대체로 젊을 때는 확실한 게 거의 없어서 힘들고, 늙어서는 확실한 것밖에 없어서 괴롭다.
- 가르쳤던 학생들 중 몇몇은 작가가 되었는데 그중에 내게 가능성 같은 것을 물으러 온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은 묻지 않고 그냥 썼다.
- "포커판에서는, 1등이 아니라 2등을 해야 돼요. 1등을 크게 한 번 하는 것보다 꾸준히 2등을 하는 게 최선이에요. 2등은 사람들 눈에 잘 띄지도 않고, 개평 달라고 보채는 사람도 없고"
- 어릴 적 나는 인생을 선불제로 생각했다. 좋은 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죽어라 공부만 하며 현재를 '지불'하면 그만큼의 괜찮은 미래가 주어지는 줄 알았다. 밤을 새워 소설을 쓰고 몸을 축내면 그 대가로 편안한 미래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 잘 모르겠다. 다른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내 인생은 후불제인 것 같다. 어린 날이 오히려 '공짜'였고 지금은 계산을 치르는 중이고 해가 갈수록 더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만 같다. (...)
무한대로 남아 있는 것만 같은 시간은 지독히도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마구 낭비해 버렸다. 얼굴도 모르는 이들과 지금은 이유도 기억나지 않는 일로 밤을 새워 키보드를 두드리며 싸웠다. 대충 살아도 온 우주가 너그럽게 보아주던 시간이었다. (...)
글은 가끔 쓰지만 책은 언제나 읽는다. 그런데 글을 예전만큼 읽기 어렵게 되었고 앞으로는 더 나아질 것 같지도 않으니 후회가 차오른다. 어두운 지하 술집에서 낭비했던, 눈이 지금보다는 훨씬 밝았던 이십 대의 밤들에 나는 침대에 누워 책을 더 보고 있어야 했다.
-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물의 참된 성격은 오직 시련을 통해서만 드러난다고 믿었고 그 믿음에 따라 그리스 비극을 만들었다.
- 꿈에는 카타르시스가 없다. 젊어서 나는 아주 어두운 이야기들을 몇 편 썼고, 그것들은 소설이라기보다 악몽에 가까웠다. 그떄의 나는 내 안의 어둠과 싸우느라 독자들을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 꿈과 이야기에는 크게 다른 점이 있다. 꿈은 연속극이 아니다. 간밤에 꿈이 아무리 좋아도 그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 인간만이 꿈이라는 이상한 세계, 잠에서 깨어나는 즉시 휘발되기 시작하는 이 아까운 환상적 질료를 언어로 고정시키는 방법을 개발했고 그것이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본다는 것은 작심하고 꿈을 꾸겠다는 의미다.
- 그시절의 내 우울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같은 소설에 녹아 있다. 자기 파괴적 충동을 타고난 것은 불운이었지만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내 도덕적 운이었다. 그냥 흘러가게 두었을 때, 삶은 자연스럽게 악몽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악몽을 문장으로 옮겨 쓰기 시작하고 나서야 내 안의 어둠은 조금씩 질서가 있는 이야기로 변화하기 시작했고, 나는 핸들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어 비로소 주변의 세상에 눈을 돌릴 수 있었다.
- 내 눈앞의 세계는 단순한 현실이 아니라 내가 하마터면 살 수 있었을 n개의 인생 중 하나로 보인다. 지금 이 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거소가 스스로 결정한 것들이 뒤섞여 만들어진 유일무이한 칵테일이며 내가 바로 이 인생 칵테일의 제조자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 삶을 잘 완성할 책임이 있다.
- 내가 다른 삶을 상상하거나 거기에 매혹되는 이유는 어쩌면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불가역한 시간이라는 개념에 익숙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만약 여기에서 벗어난다면 좀 더 편안하게 미지의 미래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미래처럼 보이는 과일 테니까. 이미 일어난 일인데 내가 아직 모를 뿐이니까. (...)
내 삶이 어쩌면 가능했을지도 모를 무한한 삶들 중 하나일 뿐이라면, 이 삶은 값은 0이며(1/무한대) 아무 무게도 지니지 않을 것이니, 존재의 이 한없는 가벼움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더는 단 한번의 삶이 두렵지 않을 것 같다. 태어나지 않았을 때 나는 내가 태어나지 않을 것을 몰랐기에 전혀 애통하지 않았다. 죽음 이후에도 내가 죽었음을 모를 것이고, 저 우주의 다른 시공간 어디엔가는 내가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내가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이런 위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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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희열 - 김영하 편(190608 / 여행, 글쓰기, 기록, 여행작가, 여행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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