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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준비해온 대답:김영하의 시칠리아 - 여행 에세이 | 쿠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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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상

 

  김영하 작가는 방송 촬영을 위해 한번 시칠리아를 다녀온 후, 5개월 만에 다시 아내와 함께 그곳을 찾게 된다. 첫 여행은 일주일 남짓이었으며, 두 번째 여행은 책의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건대 두 달 반 가량인 것 같다. 시칠리아에 머물며 그는 젊은 날을 회상하고, 다른 여행지의 이야기를 꺼내 보고, 사람을 만나고, 요리하고, 수천 년 전의 일화와 신화들을 꺼내어 본다.

 

 

  책의 시작에서 이사 준비하며 대청소하는 일, 버릴 것과 남길 것을 고르는 일을 보여줄 때는 묘한 기시감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이사를 하면서 고민한 것들이 마치 내가 몇 주 전 주말에 했던 그것과 꼭 닮아있었다. 쓸데없는 것들로부터 도움을 받기는커녕 그것들을 위해 살아가고 있지는 않냐는 말이 인상 깊었다. 후회를 미래로 이월해 버린다는 표현도.

 

 

  여행지에서 난감해하는 그의 모습에선 누구나 낯선 곳에서는 같은 고민을 한다고 느꼈다. 그의 혼잣말과 생각이 나에게 전해지면서 마치 그의 바로 옆에서 같은 고민을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가 시칠리아 여행과 다른 여행의 경험을 비교하듯이 나도 그의 여행과 나의 여행을 비교하며, 반추하며, 그리워하며 그의 여행을 조용히 따라다녔다. 그와 짧은 하루 동안 여행을 함께하며 묘한 흥분감과 만족감에 책장을 덮는다. 

 

 

  다시 첫장면으로 돌아가 짐정리에 고민하던 그는 서가에서 버릴 책을 고르다가 웃음을 주거나, 감동을 주거나, 유익한 정보를 준 책만 남기는 것으로 결정한다. 이 기준은 고대 그리스 수사학에서 가르치는 좋은 연설의 3가지 조건이라고 했다. 나에게는 이 책이 웃음도, 감동도, 유익한 정보까지 건네준 그런 책이었다.

 

 

 

 

○ 책 속에서 

 

9) 인생은 길지 않다. 과거에 쓴 책을 보면 더욱 그렇다. 쓸 때의 느낌은 아직 생생한데 판권면을 들춰보면 그게 벌써 십 년 전이고 십오 년 전이다. 그런 책들은 마치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로 보내온 메시지 같다. 

▷ 나 역시 오래 전 쓴 글을 읽을 때면 그것들이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쓴 편지 같다고 느낀다.

 

 

 

9) 이 책이 나오던 해에 아이폰이 우리나라에서 출시된다. 그러니까 이 여행은 스마트폰 이전 시대에 경험한 마지막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 나에겐 군 입대 전 마지막 기차 여행이 그러했다. 

 

 

10) 그 여행 이후 내 삶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이 땅을 떠나 오래 사는 첫 경험을 했고, 요리를 즐기게 되었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명확히 알게 되었다.

▷ 나도 유럽 교환학생을 다녀온 뒤 이렇게 생각했다. 이 땅을 떠나 오래 사는 것 첫 경험을 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명확히 알게 되었다. 

 

 

22) 제법 좋은 차였지만 늘 막히는 내부순환로에서는 별로 쓸모가 없었다. 거기선 모든 차가 평등했다.

 

 

 

25) "애들 가르치면서 배우는 것도 있어." "잃는 게 더 많을 거야. 내가 당신을 알아 당신은 눈앞에 있는 모두를 만족시켜야 되는 사람이야. 그게 얼마나 피곤한 일이야? 왜 당신이 그런 일을 해야 돼? 학생들은 어차피 자기가 알아서 커나가게 돼있어. 선생이 누구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 안 그래?"

 

 

 

28) 여러분의 내면에는 상처받기 쉬운 어린 예술가가 있다. 여러분의 가장 큰 실수는 그 어린 예술가를 데리고 예술학교에 들어온 것이다. 물론 이곳은 좋은 학교이고 훌륭한 선배 예술가들이 있다. 그러나 예술의 세계는 질투라는 에너지로 이루어진 성운이다.

 

 

 

29) 여러분의 임무는 여러분 내면의 어린 예술가가 상처받지 않도록, 그가 겹겹의 방어막으로 단단히 자신을 감싸 끝내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정신적 불구가 되지 않도록 잘 아끼고 보호하여, 그를 학교 밖으로 무사히 데리고 나가는 것이다. 배움은 다음 문제다.

 

 

 

32) 고대 그리스의 수사학 학교에서는 좋은 연설에 다음 세가지가 필수적이라고 가르쳤다. 사람들을 감동시키든가 웃기든가, 아니면 유용한 정보를 줘라.

 

 

 

35) 쓸데없는 것들을 정말이지 너무도 많이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들로부터 도움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그것들을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 인터넷서점에서 습관적으로 사들인 책들이 왜 자기를 읽어주지 않느냐고 일제히 나를 비난하고 있었다. 그런 비난이 두려워 우리는 후회의 순간을 미래로 이월해 버린다. 나중에는 보겠지. 언젠가는 들을 날이 있을 거야. 그러나 그런 날은 여간해서 오지 않는다. 

 

 

 

36) 그들에게 훌륭한 인간이란 자신을 열어두는 사람이다. 하나의 사상이 나라는 필터를 거쳐 한 권의 책이 되고 한 곡의 음악이 나라는 필터를 거쳐 아름다운 문장이 된다. 이럴 때 나의 힘은 더욱 순수하고 강해진다. 모든 것이 막힌 것 없이 흘러가며 그 과정에서 본래의 자신이 아닌 그 어떤 것을 생성하게 될 때, 인간은 성숙하고 더욱 위대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78) 시칠리아의 와인은 싸고 훌륭하다. 대체로 5유로에서 7유로 사이의 와인들을 사다가 식사에 곁들여 먹었다. 술은 가능하면 언제나 그 지역의 것을 먹는다는 게 내 원칙인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여행>이라는 책에서 하루키는 '좋은 술은 여행하지 않는다'는 더 멋진 말로 표현하기도 했다.

 

 

 

81) 텔레비전도 인터넷도 없는 저녁은 짧다. 설거지를 마치면 이내 졸음이 쏟아지고 우리는 잠자리에 든다. 아무것도 걱정할 게 없을 것 같은 평온한 하루. 걱정들은 종일토록 잠복해 있다가 밤을 틈타 우리를 내습한다. 서울에 남겨놓고 온 것들,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꿈을 빌려 나의 밤을 괴롭힌다. 리파리의 하루는 그렇게 간다.

 

 

 

91) 나는 시라쿠사의 퇴색한 석회암계단에 앉아 저멀리 희붐하게 빛나는 지중해의 수평선을 보며 열아홉 살의 봄에 경험했던 찬란한 행복을 회상했다. 모두 같은 색의 티셔츠를 입고 손을 높이 쳐든 채 <젊었다>를 부르던 그날을. 그럴 때 여행은 낯선 곳으로 떠나는 갈 데 모를 방랑이 아니라 어두운 병 속에 가라앉아 있는 과거의 빛나는 편린들과 마주하는, 고고학적 탐사, 내면으로의 항해가 된다. 

 

 

 

124) 어떤 풍경은 그대로 한 인간의 가슴으로 들어와 맹장이나 발가락처럼 몸의 일부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가볍게 전해줄 수 없는 그 무엇이 되어버린다. 

 

 

 

140) 방심한 여행자가 일단 향수의 표적이 되면 움직이기 어려워진다. 그럴수록 그는 더더욱 한곳에 머물러 있고자 하며 마냥 깊은 우물만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 속에 자기가 찾는 모든 것이 있다는 듯이. 그러나 세상의 모든 우물이 그렇듯 그곳은 비어 있다.

 

 

 

156) <대부> 3부작에서 똑똑하고 유능한 2대 대부인 마이클이 마침내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인간은 결코 운명을 이길 수 없으며 복수의 신은 용서를 모른다는 것이다. 

 

 

 

179) 농촌은 그런 곳이다. 나른한 일상 뒤에서 태연히 살육이 진행된다.

 

 

 

191) 그들에게 비너스란, 즉 아름다움이란 무엇이었을까? 누군가에게 미란 정욕을 불러일으키는 음란한 매혹이며 또 누군가에게 미란 다다를 수 없는 천상의 특질이며 또 누군가에게 미란 정복함으로써만 송유 가능한 일종의 재산이며 또 누군가에게 미는 끝내 이해불가능한 난해한 개념이며 또 누군가에게 미는 즉각 제거해야 할 불길한 미혹이었을 것이다. 미는 이렇게 끝내 합의되지 않은 채 천상의 도시 깊은 곳에서 어지러운 풍문과 더불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224) 십 년 후에, 혹은 이십 년 후에 오더라도 별로 변하지 않을 것 같은 도시가 있다. 시라쿠사가 그런 곳이다. 

 

 

 

246) 노토의 진짜 좋은 식당들은 당일치기 관광객이 신병들처럼 행진하는 비토리오에마누엘레 거리가 아닌 거기서 50미터쯤 걸어 올라가야 하는 카보우르 거리에 있다. 마치 그것은 관광객용 음식과 토박이용 음식의 절충점을 찾겠다는 조용한 선언처럼 보인다. 노토의 식당들은 거만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몸을 낮추지도 않는다. 

 

 

 

287) "가이드북 보니까 이탈리아에 이런 속담이 있대. 사랑은 무엇이나 가능하게 한다. 돈이 모든 것을 이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그리고 죽음이 모든 것을 끝장낸다."

 

 

 

297) 젊게 생각한다는 것은 늙은이들과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늙은이들은 걱정이 많고 신중하여 어디로든 잘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육신과 정신을 이제는 아주 잘 알고 있다고 믿는다. (...) 늙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세상과 인생에 대해 더이상 호기심을 느끼지 않게 되는 과정이다. 호기심은 한편 피곤한 감정이다. 우리를 어디론가 움직이게 하고 무엇이든 질문하게 하고 이미 알려진 것들을 의심하게 만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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