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저자 소개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이며 사단법인 ‘새말 새몸짓’ 이사장이다. 건명원 초대 원장을 지냈다. 서강대학교 철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베이징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당나라 시대 장자 해석 연구)를 받았다. 저서로 《탁월한 사유의 시선》, 《나는 누구인가》,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경계에 흐르다》가 있고, 《중국사상 명강의》, 《장자철학》, 《노장신론》 등의 책을 해설하고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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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영상
(1) 삼프로 TV - 황당한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 이유
(3) 하와이 대저택 - 더 높은 곳에 당신의 시선을 두어라
○ 책 제목과 주요 카피의 의미
(1) 삶의 실력, 장자
장자는 단순히 현실을 회피하거나 초월하려고 하지 않았다. 보다 높은 생존 방식을 고민한 현실적인 철학자였다. 장자의 사상은 독자들에게도 삶의 실력 향상이라는 긍정적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들 장자의 사상이 사회적 성공을 등한시하고 현실적 문제를 도외시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오해다. 장자는 자유를 중시했는데 이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절대적 자유를 추구한 것이 아니다. 자유로운 인간이 그렇지 않은 인간보다 삶의 질과 양이 월등하기 때문에 자유를 중시한 것이다.
(2) 내면의 두께를 갖춘 자유로운 생산자
내면의 두께는 곧 '함량', '덕', '내공'을 뜻한다. 큰 함량을 가진 사람만이 스스로를 바라보고, 반성하고, 다음 단계로 건너갈 수 있다. 내면의 두께가 없으면 불안을 피하려고만 한다. 내면이 두꺼운 사람은 불안을 품고 그것을 새로운 창의의 원동력으로 사용한다. 인간은 자신의 욕망을 알고, 자신을 표현하고, 새로운 것을 생산해야 한다. 인간은 문화적인 존재다. 문화적인 존재란 무엇인가 만들어서(文) 변화(化)를 야기한다는 뜻이다.
(3) '정해진 마음'으로 사는 것을 경계하라
'정해진 마음'이란 곧 기준이다. 모든 기준은 과거의 산물이다. 기준이 기능하면 과거로 돌아가야만 더 진실한 삶을 사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현대인들이 겪는 문제 대부분은 여기서 시작된다.
기준이란 '우리'의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 보이는 것'이다. 거기에 나는 없다. 기준의 역할은 구분하는 것인데, 이 때문에 이익보다 진위를, 강약보다 선악을 중시하고 집착하게 한다. 내가 세상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내 기준이 세상을 대한다. 착하고, 정확하고, 작은 사람이 된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상호 모방이 만연한 사회는 진화가 멈추고 전체가 몰락한다. 스스로 생각하려는 수고를 피하고 타인을 모방하려는 '지적 게으름'으로 인하여 장기적으로는 삶의 질을 떨어진다.
(4) 모든 위대한 출발점은 항상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다.
고유한 사람은 독립적이고 개방적이다. 고유하면 자유롭고 자쾌한다. 자쾌하면 창의롭다. 창의로우면 문화를 만들고 문화는 곧 문명이다. 어떤 문명도, 예술도 그것이 '옳다'는 이유로 탄생하지 않았다.
(5) 기타
소확행의 위험, 자잘해진다. 소확행이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소확행에 집착하면 그것밖에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 스몰토크에 집착하면 스몰토크 밖에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 저자의 말(유튜브 및 기타 강연 발췌)
중국의 사상과 불교의 도입, 도교가 불교에 끼친 영향
- '경'이란 말은 '기준'이라는 뜻이다. 시대에 지켜야 할 이데올로기가 반영되어 있으면 경이라 불린다. 장자의 저서 <장자>는 내내 그 이름을 유지하다가 당나라 때 <남화경> 혹은 <남화진경>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당나라 현종이 존경하고 숭상한다는 의미로 이름을 바꾸었다. 장자가 남화산(南華山)에 은거했다는 전설에서 따온 이름으로 보인다.
- 중국 사상을 이해할 때는 크게 2가지 사건, 축복을 이해해야 한다. 첫 번째는 중국에 불교가 들어온 것, 두 번째는 막스 레닌 주의가 들어온 것이다. 이것은 기존 중국 사상이 한계에 부딪혔을 때 외래의 사상을 흡수하여 새로이 발돋움하게 된 사건이다.
불교가 들어오기 전, 중국 사상의 중심은 도교였다. 도교는 불교에 비해 이론적인 체계가 부족한 편이었다. 불교가 중국에 도입될 때 불교와 도교는 약 200여 년간 이론 투쟁을 한다. 이때 도교의 이론 수준이 높아진다. 당나라 때의 일이다. 성현영(철학자)이 이 체계를 완성하며 <장자>에 서브 코멘터리(소疏)를 붙인다. (최진석 교수는 이를 주제로 하여 '중국이 외국의 사상을 도입하는 방식'에 대한 연구를 했다.)
* 중현학: 위진남북조 시대 도가 사상(현학)에 불교의 반야 공空 사상을 접목하여 성현영 등에 의해 체계화된 도교의 핵심철학.
훗날 중현학의 이론 구조는 송나라 시절 유학자들에게 채택되어 유교에 접목되게 된다. 그리하여 성리학 구조가 완성된다. 이 형상학적 구조는 불교와 도교로부터 차용되어 새로운 신유학, 주자학이 된 것이다. 주자학의 형성 과정과 의미도 도교 연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성, 리, 기, 명과 같은 개념이 모두 도교 개념이었으며 불교 이론 체계를 거쳐 유교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새로운 사상, 새로운 국가
춘추전국시대에 체계가 잡힌 사상들이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르러 수명을 다하고 불교가 들어왔다. 그때 새로이 자리잡은 사상에 바탕하여 중국은 청나라 때까지 살았다. 이후 중국 사상이 한계에 이르러 아편 전쟁이라는 수모를 겪었다. 중국은 당시 서양에 패배한 것에 대해 연구를 진행한다. 처음에는 기술 문명의 차이라 생각하고 양무운동(근대화 운동, 무기 제조기술 도입)을 진행했으나 실패하고 이후 제도를 중심으로 변법자강운동(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본뜸)을 시행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철학과 과학 2가지의 결여가 서양제국주의에 패배한 이유라는 것을 알게 된다. 중국에서는 이후 서양 사상에 대한 많은 투쟁과 논쟁을 벌이고, 결국 막스 레닌 주의를 채택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과학과 철학이라는 근원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상, 새로운 국가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그 과정에 막스 레닌 주의를 채택했다는 역사적 맥락이다.
중국에서는 새로운 사상을 만든 위인으로 2명을 꼽는다. 진시황과 마오쩌둥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과거를 부정한 것이다. 동양 사람들은 '과거를 이상화'하는 한계가 있다. 옛 세상을 낙원처럼 묘사한다. 중국 역사상 '과거가 나쁘고 현재가 좋다(중요하다)'고 말한 사람은 진시황과 마오쩌둥 둘밖에 없다. 진시황이 만든 제도로 청나라때까지 산 것이다. 앞으로 중국은 마오쩌둥이 만들어놓은 사상(신중국)의 토대에서 오래 살아갈 것이다.
(c.f) 가장 높은 사상의 지도이념을 사상, 그다음을 이론, 그다음을 관이라고 표현한다. 중국에서 '사상'이라고 불리는 것은 모택동 사상 밖에 없다.
(c.f 2) 이념의 진시황과 이익의 유방(동아광장, 최진석, 2017.5.13.)
정치 지도자일 때 명분과 이념으로 재미를 보았더라도 국가 지도자는 명분과 이념을 버리고 철저히 부국강병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순수한 명분을 버리고 잡스러운 이익 쪽으로 무게 중심을 이동해야 한다. 명분은 구분의 정치력이다. 이익은 통합의 토대다. 이념과 명분이 강조되는 한, 통합이라는 구호가 실제로는 또 하나의 배제가 될 가능성이 크다.
중국에는 새로운 이념으로 통일 대업을 이루고도 경제를 파탄 내서 결국 국력을 소진한 두 영웅이 있다. 진시황과 마오쩌둥이다. 극단적 이념의 지속적인 적용이 얼마나 허망한가를 본 다음 지도자들은 과감하게 명분과 이념을 버리고 모두 ‘이익’에 집중하여 위대한 성취를 이룬다. 유방과 덩샤오핑이다. 유방은 진시황의 중앙집권 체제 이념을 버리고, 반동 세력이던 지방 분권 체제를 과감하게 수용하여 두 세력을 공존시키며 큰 업적을 남긴다. 덩샤오핑도 마오쩌둥의 극단적 이념성을 버리고, 검든지 희든지 고양이는 쥐만 잘 잡으면 된다고 하면서 철저히 ‘이익’에만 집중한다. 큰 성취가 이뤄지는 토대는 명분이 아니라 이익이다.
명분은 순수하고, 이익은 잡스럽다. 당연히 통치자는 스스로를 더럽히고 욕보이더라도, 국민들은 깨끗하고 명예롭게 살도록 해주는 존재다. 자기를 순수하고 명예롭게 만들려고 애쓰기보다 오히려 잡스러워진 손에 그 명예와 순수를 담아 국민들에게 쥐여 주려는 존재다. 옛날에도 통치자들이 자신을 고(孤), 과(寡), 불곡(不穀), 짐(朕) 등과 같이 아주 비루한 언어로 칭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통치자가 되는 순간 그 사람은 명분을 공유하던 정치 동지들과 혼자 속으로라도 달라져야 한다. 통치자로 변신하면서 하지 않으면 안 될 심리적 결별이다. 그 사람은 고독하다.
'삶의 실력'이란
장자는 자유를 중요시했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인 자유만을 강조하고 현실을 도외시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장자가 자유를 추구한 이유는 자유가 삶의 질과 양을 확장시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질을 높이고 양적인 발전을 이루는 것, 이것이 삶의 실력이다. 따라서 장자는 삶의 실력이 대단히 높은 사람이었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행복이 왜 중요한가. 행복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과 행복하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삶의 질과 양적인 차이가 있다. 그래서 인간은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다. 결국 장자는 현실에서 실력있는 삶을 살기 위한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 사람이다.
* 장자도, 니체도, 모든 다른 훌륭한 철학자들도 현실을 벗어난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현실에 대한 투지를 약화시키기 위해 등장한 철학, 철학자는 하나도 없다. 비현실적인 독자만 있을 뿐이다.
* 현실의 삶과 관련 없는 경지 때문에 자유를 추구한다는 것은 장자의 가르침과 어긋난다. 성공과 경제적인 부를 참된 삶과 대비되는 것으로 보는 착각을 하면 안 된다. 현실적인 삶에 대한 투지가 있어야 한다. 그 투지에서 지치지 않는 것이 장자가 원하는 것이다. 무소유 역시 세상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보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라는 태도를 강조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이를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것'이라고 오해한다.
* 투지가 없는 삶은 본능으로 기우는 삶이다. 에너지를 쓰지 않는 쪽으로 기운다.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인간의 삶은 본능을 극복하는 삶이다. 삶, 문명이란 인위적인 것이다. 인위적인 것이 반복되다 성숙했을 때 그것을 '자연스럽다'라고 표현하는 것이지 인위적인 것 없이 자연스럽다고 말하는 것은 그저 본능에 따른 것과 다르지 않다. 예능에 빠지지 말고 예술에 빠져라. 예술을 감상하려면 긴장해야 한다 에너지가 들어간다. 하지만 그래야 지적 성숙이 이루어진다. 힘쓰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이것을 할 수 있다.
무엇을 갖고 있는 것과 그것을 알고 싶어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알고 싶어하는 희미한 불꽃이 시작될 때 그는 인간이 된다.
- 헤르만 헤세
삶이 힘든 이유는 자신의 판타지에 살지 않고 삶은 어때야 한다는 '정해진 마음'에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처럼 살지 않고 타인처럼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장자 철학을 공부하고 기껏한다는 소리가 '장자처럼 살고 싶다'라고 하면 헛공부한 것이다. 장자는 장자처럼 살았다. 너는 너처럼 살아야 한다."
타인을 보고 배우는 것이 '나답게 살기 위한' 수단이라면 모를까 습관적으로 따라 살면 안 된다. 왜 그렇게 습관이 되느냐 그것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에 비해 수고가 덜 하기 때문이다. (지적 게으름)
장자는 삶의 실력을 습득하기 위한 노력을 등한시 하지 않았다. 지식이 굉장히 많은 사람이었다. 시시비비를 이미 통달하고 지배할 정도로 성숙한 사람이었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게으른 사람들은 지식보다 지혜가 중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치고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 지혜로운 척하기는 쉽지만 지식을 쌓기는 어렵다. 지혜는 지식이 적절히 이용되는 것이다. 지식을 지혜로 바꾸는 것이 바로 포부(판타지)다. 야망과 포부가 없으면 지식이 지식으로만 남는다.
나답게 사는 것이란
나답게 사는 것은 '내키는 대로' 사는 것이다. 나답게 사는 것은 자기 욕망에 따라 사는 것이고, 욕망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수준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욕구는 생존에 필요한 것을 원하는 것이고 욕망은 생존에 불필요한 것임에도 원하는 것이다. 텃밭은 욕구고 정원은 욕망이다. 현재 너머 그 다음을 원하는 것이 욕망이다. 이것이 판타지다. '다음'을 원하는 사람들. 텃밭에 심는 것은 먹을 수 있는 것이고 정원에 심는 것은 먹지 못하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욕망에 사는 사람과 욕구에 사는 사람이 차이가 없을지 모르지만 삶의 결과에서 차이가 난다. 욕망이 있어야 자기를 표현할 수 있어야 창의성이 나오고 산업도 성장할 수 있다. (패션의 사례. 타인의 옷에 관심이 더 많다면 유행만 따라갈 것이고, 그런 사회에서는 패션 산업은 성장할 수 없다.)
* 유행에 따라 옷을 입는 것. 내가 행한다는 의미에서는 주체적일 수 있지만 보편적으로 좋다고 인정하는 것을 내면화해서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믿는 주체라는 의미에서는 종속적일 수 밖에 없다. 좋아하는 것보다 좋은 것을 찾는 문화다.
상호모방에 빠지면 진화가 멈춘다. 공멸한다. 자기처럼 살아야 한다. 자쾌, 자유, 창의, 산업, 사회가 연결되어 있다. 상호모방은 결국 '아류적 삶'으로 끝날뿐이다.
장자가 살았던 시기에는 '따라 살기'의 행태가 심해서 이런 철학이 나온 것이 아니라 진위, 선악, 시비와 같은 옳고 그름, 판단의 문제에 집착하여 사회가 아주 폭력적이었기에 이런 철학이 나오게 된 것이다. 장자는 이러한 편협한 판단의 시선 위에 더 높은 수준의 시선이 있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바로 아름다움에 눈 뜨는 미학의 단계이다. 지덕체가 아니라 '체덕지'가 많다. 진선미가 아니라 '미선진'이다. 아름다움의 경지가 가장 높은 것이다. 장자는 시선의 높이를 강조했다. 관용이 시비선악을 지배해야지 그 반대가 되면 안 된다고 했다.
* 어떤 일이 옳다는 이유로 행동하는 사람이 있고, 선하다는 이유로 하는 행동이 있고, 아름답다는 이유로 하는 행동이 있다. 세상에 새로 등장하는 물건은 참이라는 이유로, 혹은 선하다는 이유로 나오지 않는다. 모든 창의적 활동은 진위나 선악 등을 넘어선다. 기능적으로 불편하거나 집단적인 기준에 따르면 옳지 않다는 시선을 받더라도 그것이 나를 표현하고 나 자신을 완성하는 데에 긍정적이라고 판단되면 과감하게 하는 경우가 있다. 창의적이거나 예술적이라는 평가를 듣는 경우이고 삶의 미학적인 경지이자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태도에서 빚어질 수 있다.
* 진선미: 시비진위 - 선악 - 아름다움. 이것들은 각각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다. 개념의 두께를 쌓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 수양이지 하나의 개념을 결별하고 다른 개념을 찾아가는 것은 수양이 아니다.
* 타인은 비난하려는 잣대를 스스로에게 들이대면 비난할 수 없는 상황이 있다. 그러면 구태여 상대를 비난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름다움의 경지다. 아름다움의 경지에 자주 접촉할수록 성숙해지는 것이다.
아름다움에 눈을 떠야 시시비비로 얻으려는 소득이 더 커지고 더 잘 얻어지는 것이다. 시시비비에 집착하면 본래 얻으려던 결과도 얻지 못하고 스스로를 망치고 타인에게도 폭력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상상력의 힘. 거대한 스케일
우리나라 영화는 대부분 기존의 것을 재해석하거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의 작품이 주였다. 특히 사회문제에 대해서 그렇다. 그러나 황동혁 감독의 <수상한 그녀>는 황당한 설정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화가 시작부터 감독의 능력을 보여준다. 누가 더 황당하냐, 누가 더 상상력이 크냐가 높은 경지를 보여준다. 자잘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양의 신화는 그다지 황당하지 않다. 그러나 서양의 신화는 상상력이 끝도 없다. '이 이상의 상상을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그리스 신화만 봐도 그렇다.
추상 사유능력, 보이지 않는 공간을 보는 힘, 기하학도 서양에서 발전했다. 동양에는 직업적인 '탐험가'가 없다. 서양은 그렇지 않다. 허무맹랑한 도전을 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이것이 시선의 수준과 스케일을 보여준다.
장자, 거대한 스케일
"우 임금 때는 10년 동안 9번이나 홍수가 났는데, 그렇다고 하여 바닷물이 더 불어나지는 않았지. 탕 임금 대는 8번 동안 7번이나 가뭄이 들었는데, 그렇다고 하여 바다의 물이 줄지 않았지."
작은 집단의 박수에 빠진 사람들을 공자는 '향원(동네 현자)'이라고 했다. 향원은 우물안 개구리다. 향원은 덕의 파괴자다. 이들은 자신의 사고를 넘어서는 높고 넓은 얘기는 알아 듣지 못한다. 그래서 놀라지도 않는다.
북녘 바다에 물고기가 있다. 그 이름은 곤鯤이다. 그 크기가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변해서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은 붕이다. 붕의 등 크기가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솟구쳐 날아오르면, 그 날개가 하늘에 가득 드리운 구름과 같다. 이 새는 바다가 움직이면 남녘 바다로 날아갈 것이다. 남녘 바다란 곧 천지天池다.
사람이 정확하냐 아니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크기(크냐 작냐)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늘 추격 국가였다. 큰 사람이 없었다. 선도 국가였던 적이 없다. 지식의 수입국이지 생산국이었던 적이 없다.
작은 사람들은 작은 마음으로 태어난다. 작은 마음이 찰 때나 큰 마음이 찰 때나 어깨가 으쓱해지는 것은 똑같다. 작은 마음이 빨리 찬다. 큰 마음은 어지간하면 안 찬다. 우리나라는 마음이 거의 다 찬 상태다. 다 산 것 같다. 그래서 '그다음'을 꿈꾸지 못한다. 건국, 산업화, 민주화 이후에 더 하고 싶은 것이 없는 마음의 상태다. 민주화 이후에는 꿈이 없다. 장자를 읽으며 압도적인 스케일을 경험해야 한다. 작은 마음으로, 따라하기로 성공한 나라들은 결국에 다 몰락한다. 아르헨티나, 필리핀이 그러했다.
* 꿈이 없으면 상호 모방하거나 시시비비를 가리며 싸우는 일만 남는다. 꿈이 있어야 존재론적으로 계속 성장할 수 있다.
삶 속에 있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라 생각해서 나태하고 진부하다. 그러나 마음이 큰 사람은 삶의 끝, 죽음까지 인식하며 산다. 일본도 성장이 영원할 것이라 생각했기에 잃어버린 30년으로 간 것이다. 생과 사는 함께 있다 삶과 죽음이라는 것은 기가 뭉쳤다 흩어지는 것일 뿐이다. 잘 살고 싶으면 죽음을 인식해야 한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기능적 인간에만 몰두하면, 결국 그것을 넘어설 수 없다. 시시비비를 가리는데 평생을 바치게 된다. 생존의 질과 양을 증가시키는 인간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중요하나 한 단계 높은 곳에서 가야 한다. 시시비비의 시선에 갇히면 안 된다. 시시비비에 집착하면 인간은 고갈된다. 쇠약해진다. 인간 사의 문제 대부분은 '정해진 마음'을 끝까지 지키려 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 一受其成形(일수기성형),不忘以待盡(불망이대진): 어떤 이들은 '한번 사람의 형체를 받으면, 망가뜨리지 않고 다할 때를 기다린다'고 번역하지만 최진석 교수는 '한번 특정한 관점을 가지면 손상하지 않고 끝까지 지키려 한다'로 번역하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다. (글의 맥락상 앞뒤로 성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

"어떤 사람들은 마음을 발동하는 것이 마치 활을 쏘는 것처럼 모진데, 그들은 시비를 가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말을 안 하기를 마치 맹세를 지키듯이 신중한데, 그들은 승리를 차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이 쇠락해가는 것은 가을과 겨울의 생명체처럼 날로 조금씩 시들어간다. 그들이 그런 과정에 한번 빠지면, 회복할 수가 없다. 그들이 꽉 막힌 것은 마치 봉해서 막아놓은 것과 같으니, 이렇게 해서 몸은 쇠약해지고 정신은 고갈된다. 점점 죽음에 가까워지는 이런 마음은 어떻게 해도 생기를 회복할 수가 없다."
높은 시선을 갖는 방법
첫째, 포부를 크게 가져라. 포부를 크게 가지면 어떤 지식을 채워야할 지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둘째, 책을 많이 읽어라. 독서량의 순위와 국력 순위가 거의 일치한다. 유일한 반례가 대한민국이다. 점차 그 취약성이 드러날 것이다. 한국정치의 혼란 역시 그 취약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저성장 역시 마찬가지다. 자기 자신을 키워놓으면 일이 힘들지 않다. 버겁지 않다. 힘들 일이 없다.
직업을 꿈이라고 여기면 그 직업을 갖게 되는 순간 꿈이 사라진다. 성장이 멈춘다. 꿈은 낭만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자기 자신의 존재론적인 문제다. 노벨상은 꿈이 큰 나라에서 나온다. 노벨상을 받으려면 먼저 가설을 받아야 한다. 가설은 판타지다. 한국은 가설을 세우지 않는다.
효율성이 높은 삶이란 자기 판타지를 실현하는 삶이다. 현실을 시궁창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꿈이 없는 사람들이다. 사람은 꿈을 통해서 현실을 해석한다. 왜 꿈꾸는 것을 불안해하는가. 그 꿈이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막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 다른 사람과 대화하지 못하는 것을 불안하게 여기는가. 그것은 내 삶이 다른 사람의 동의를 구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인정욕구가 나를 발전시키는 정도면 충분하지, 그것이 나를 지배하면 안 된다. 어떤 일을 할 때 처음부터 인정을 기대하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인정받지 못한다고 고통스러워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장자를 제대로 읽기
장자를 제대로 읽지 않으면 사람들이 현재의 자신을 하찮게 생각하거나, 혹은 무조건 일을 바꾸려고 든다. 그것이 아니다. 자기가 하는 일을 원하는 일로 만들어야 한다.
* 입처개진
자기 자신에게 설명해야 한다.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그러면 거기서 의미가 나올 것이다. 의미가 있으면 몰입하게 된다.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면 자신이 변하게 된다. 최선을 다하는지가 중요하다.
자기 자신에게 맞는 일을 찾기 위해 너무 많이 시간을 들이지마라. 이것은 확실하지 않을뿐더러 신이 와도 못 찾아 준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착각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은 절대 찾을 수 없다.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라고 결정하는 것일 뿐이다.
* 이것은 함량과도 연결되어 있다. 직장의 '나'는 그저 일할 뿐이고, 주말의 '나'만 진짜 자아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함량이 낮은 것이다. 분열된 자아인 것이다. 분열된 자아에서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일터 역시 함량을 키우는 현장이다.
인문학의 유행과 선진국으로 가는 길
인문학의 유행은 한국전쟁 이후 가장 의미있는 일이다. 우리는 그동안 인문학적 시선보다 낮은 시선으로 살다가 그것이 제공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에 도달한 것이다. 이제 인문학적 시선의 높이가 필요한 시대에 온 것이다. 추격국가, 종속국가, 지식수입국가로써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국가에 도달했다.
그동안은 다른 문명의 '생각의 결과'들을 수용해 살았다. 우리가 생각을 하면서 살았던 것이 없다. 전술국가의 단계였다. 이제 전략국가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을 가장 민감하게 느낀 사람들이 기업인들이다. 우리나라의 인문학 열풍은 인문학자가 아닌 기업인들이 일으킨 것이다. 왜냐, 기업인들이 삶에 가장 철저하니까. 그들이 가장 먼저 한계를 느꼈으니까.
한국의 운명을 결정한 3가지 사건은 건국, 한국전쟁 그리고 시선의 높이를 올리는 지금이다. 이것이 한국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다만 최근 철학책이 시선을 높이를 높이거나 도전적이거나 지적인 방향의 이동이 아니라 위로와 감성을 전달하기 위한 방향으로 소비되고 있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누구를 위로하기 위해 나온 철학책은 하나도 없다. 누구를 힐링시키기 위해 책을 쓴 철학자는 한 명도 없다. 모든 철학은 그 시대에 해결해야할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높고, 가장 치명적인 문제와의 투쟁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철학은 본질적으로 공격적이다. 따뜻하지 않다. 철학은 굉장히 높은 수준의 투쟁의식을 갖고 있다.
그러한 투쟁의식을 쉽게 잃어버리는 것은 인문학적 높이로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법적인, 경제적인 문제는 잘 해결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고 내 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원리적인 영역의 생각(수학, 물리학, 인문학)은 우리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았다. 인문학적 시선을 중심으로 사회를 이룩한 국가를 선진국이라고 한다. 한국은 선진국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
안 해본 것을 해야 한다. 그러면 도전을 해야 한다. 모험을 해야 한다. 모험을 하기 위해서는 해보지 않은 것도 내 현실로 느끼고 받아들이는 능력을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나라는 이 능력이 없다. 그 증거가 후진국형 재난의 지속발생이다. 안전, 준비, 훈련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모두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대비하는 것이다. 경제적인 성과를 기반으로 우리나라가 이미 선진국이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나. 그러나 구조적인 문제를 봐야 한다. 자살률, 노인 빈곤율, 출산율 모두 심각하다.
* 기업인들이 경계에 서 있다는 말은 그들의 몸 속에는 생과 사가 함께 있다는 말이다. 보통 사람들의 몸에는 생만 있다. 절실한 사람에게는 생과 사가 공존한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을 현실로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니까 대증요법만 하는 것이다. 증상이 나타나야만 반응하는 것이다. 상상력이 결여된 것이다. 세상에는 원도, 점도, 선도 없다. 그러나 머릿속에서 그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다룰 수 있어야 한다. 물리 법칙도 마찬가지다. 모두 추상적인 것이다. 추상 능력이 있어야 한다.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철학은 완전 추상이다. 그러나 추상이 오히려 더 실용적인 효과를 크게 낸다. 시선의 높이가 삶의 높이다. 하나의 레시피가 아니라 음식의 원리를 알면 다양한 요리를 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직장을 그저 돈을 버는 곳이고 정신적인 가치가 없는 곳이라고 단정할 필요가 없다. 인문적인 삶, 비인문적인 삶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을 어느 높이에서 운용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경계에 선 자, 기업인들
기업인들은 한 번의 의사결정이 생사를 결정하는 위치에 있다. 이들은 경계에 서 있다. 그러니 불안하고 예민하다.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사람이 약하면 불안을 자꾸 해소하려고만 한다. 불안이 자신을 흔든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 불안을 품어야 한다. 불안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다 자기가 작아서 힘든 것이다. 불안과 투쟁하거나 관찰하거나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마음이 편한 것(심리적 위안)과 행복이 동일한 것이라 오해하면 안 된다.
욕망
직감과 영감은 원하는 것이 한 없이 강렬할 때 찾아온다. 그렇지 못한(강력하게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행복하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그렇다면 행복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말인데, 물어보면 대부분 대답하지 못한다. 하다 못해 '이것을 행복으로 하겠다'라고 결정한 사실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그마저도 없다. 자신의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행복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루지 않고는 잠이 들 수가 없는 무엇이 있어야 한다. 자신의 삶의 목적에 따라서 목표를 정해야 한다. 그래야 목표를 이룬 그 '다음'이 있다.
* 목표는 구체적이며 목적은 존재 가치나 방향성과 관련된 것이다. 주로 질문에 대한 대답의 형태다. 목적없이 목표에 집중하면 중요한 일이 아니라 시급한 일만 하게 된다. 이것은 철학의 쓸모와 관련이 있다. 더 높고 추상적인 목적을 가진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일의 실행과 효율과 성취에 큰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더 높은 시선, 높은 사유를 가져야 통제력도 커진다. 선도력도 생긴다.
* 한국 정치는 목적이 없다. 국가 단위로 정치가 성장하지 못한다. 목표에 매몰된다 진영에 갇혀있다. 국가의 정치가 아니라 진영의 정치다.
강력하게 원하는 것(야망)이 있으면 호기심도 생기고, 질문하는 능력도 생기고, 상상력도 생기고, 순서대로 이룰 수 있다. 야망이 없는 그 순서를 찾는데 시간을 다 쓴다. 야망을 찾는 것은 인생의 진검승부처다. 욕망의 존재가 되어라. 여기 있는 내가 저기로 건너가고 싶은 충동,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욕망이다.
원하는 것이 분명하면 다른 사람들이 크다고 하는 것도 작게 보이고, 좋다는 것도 좋아보이지 않는다. 정년을 8년을 남겨두고 교수직을 그만두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것이 큰 결정이라고 하였으나 나에게는 전혀 큰 결정이 아니었다. 자기가 분명하면 삶이 단순 명료하다. 삶이 단순 명료하면 매일매일이 짜릿하다. 야망이 없으면 삶이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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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밖에
- 첫 자식을 낳았을 때, 우주의 운행에 비로소 참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글자는 영혼이 세상에 직접 강림하기 어려워 머릿 속에서 몇 번 폭파한 후,
팔뚝을 거쳐 팔목을 타고 흐르다가 종이 위에 떨어져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응고된 것.
그래서 글쓰기 가운데 연애 편지가 가장 어렵다.
- 최진석
- 글쓰기와 걷기를 꾸준히, 오래하면 거의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된다. 물론 단번으로는 안 된다. 지속해야 한다. 지속함은 간절함에서 시작된다.
- ★ 봄날 얼음 풀리듯 하라. 얼음도 아니고 물도 아닌 그 상태처럼 경계에 서라. 경계는 양 극단의 정 가운데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와 외부가 연결된 피부와 같은 곳을 말한다. 하늘이 푸르기만 하려면 무너질 것이고 땅이 단단하려고만 하면 쪼개질 것이다. 생명력이란 너 아닌 것과, 이질적인 것과 관계를 맺는 것이 결정한다. 항상 열려 있어라. 항상 깨어 있어라.
- 삶이 힘들다고 느끼면 자기 자신에게 설명해 보라. 힘들어서 위로를 받고 싶은 것인지, 힘들어서 그 힘듦을 극복하고 싶은 것인지, 왜 그것을 힘들다고 느끼는지 이것에 대해 고민하는 지적 수고를 했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그것을 구체적으로 글로 쓸 수 있는지. 자기가 되고 싶은 자기,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위로를 구하는 입장으로 살 것인지, 위로를 제공하는 사람으로 살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삶은 본래 불안이다. 자기를 살리려는 인간은 절대 죽지 않는다.
- 삶의 태도가 확실하면 환경에 휘둘리지 않는다. 숏폼에 빠지더라도 창의적 생산자로 살아간다. 그렇지 못하면 그저 맹목적인 소비자에 머문다. 태도가 '생산자적인 나의 위치를 잃지 않는지'를 결정한다.
- 생각하는 수고의 훈련이 필요하다. 생각하는 습관을 가졌느냐, 외부 생각의 결과를 수용하는 습관을 가졌느냐가 시선의 높이를 결정한다. 시선을 높이는 과정을 '추상화'라고 한다. 철학은 완전 추상이다.
- 인간은 문화적 존재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 변화를 야기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문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문화라 부른다. 자유로운 인간의 창의적이다. 창의적인 인간은 문화를 만들고 문명을 이룬다. 창의적이란 말은 불편함을 해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떻게 불편함을 느끼느냐가 중요하다.
모든 창의로운 사람은 문제를 발견한 사람이고, 그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다. 따라서 먼저 잘 '봐야'한다. 판단하지 말고 시선을 그곳에 두고 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 여기는 나와 세계에 대한 기본적인 사랑과 자비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다.
* 미진선 -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데 머물지 말고 '아름다움'을 추구해라.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중요하지만 단지 그것이 목적이 되면 갈등과 폭력이 심화된다. 판단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판단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다. '나의 판단'이 절대적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라. 시비의 싸움에서 조용히 빠져나와 자기 삶으로 돌아가라.
* 미진선과 체덕지 - 관념이 삶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다. 삶이 곧 앎이다. 개념이 삶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삶이 개념을 만들어 낸다. '용기'를 외워서 용감해지지 않는다. 경험ㅇ르 통과하면서 용기가 체화된다. 체화된 삶의 태도가 곧 '덕'이다.
- 인간은 '지금'에 끝나는 존재가 아니다. (헤르만 헤세)
분명히 이 '다음'이 있다. 그래서 인간은 '건너가는 존재'다. 자신만의 야망,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 먼저 탄력있는 신체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지덕체가 아니다. 체덕지다. 운동, 인간으로 완성되겠다는 큰 포부, 바른 습관, 거대한 지식욕을 바탕으로 '건너가야' 한다. 자기처럼 사는 삶,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삶만이 개인과 사회를 구할 수 있다.
- 정해진 마음에 사는 것은 크게 2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1) 과거에 사는 것
모든 기준은 과거다. 옛 성현의 가르침을 그대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의 현실'에서 필요한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즉 바라보고 싶은 대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기준과 프레임의 잣대로 세상을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 객관과 사실을 볼 수 있는 사람. 그것이 독립적 주체다. 과거에 살면 시대착오적 인간이 된다.
* 중국의 진시황과 마오쩌둥은 '과거보다 현재가 중요하다'고 말한 유이한 지도자였다.
(2) 타인의 기준에 사는 것
스스로 생각하는 훈련을 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문제다. 단기적 효용에 중독된 생각하지 않고 수용하는 것. 자기 기준을 세우지 못하는 것. 자신의 인생이 남의 인정이나 동의를 구하는 것으로 이루어는 병폐를 낳는다. 스스로 가치를 생각하지 못하고,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고, 외부에 기대어야만 자신의 가치가 증명된다고 생각하는 오류를 범한다. 아류가 된다.
이것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기 욕망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자기 욕망, 자유, 자화, 자쾌. 자쾌할 때 비로소 창의적이다. 비로소 문화적이다. 비로소 문명을 만드는데 기여한다. 인간은 본래 문화적인 존재다. 이것은 존엄한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삶의 태도다. 건너가는 인간이다.
- 두께를 쌓는 일에 집중하는 것
두께를 쌓는 것, 기존의 관념을 돌파하는 것, 큰 포부를 이루는 것이야 말로 인간으로서 수행해야할 과제다. 진선미가 아니라 미진선이다. 그 어떤 문명도, 그 어떤 주도권도 그것이 착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은 없다. 가장 높은 경지로 시선을 올려야 한다.
두께를 쌓으면 불안을 감당할 수 있다. 불안을 감싸 안은 사람만이 문제를 해결하고 창의적 인간으로 거듭난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곳으로 나아가는 것, 질문하는 것, 이것이 문명에 기여하는 인간이다. 두께를 쌓지 못한 사람은 작다. 작은 사람은 불안을 감당하지 못해서 아는 것에만 머무른다. 조선의 서원은 과거만 공부했고 일본의 쇼카손주쿠는 아직 오지 않은 곳으로 가려했다.
- 주요 개념들
(1) 오상아 해야한다. 체계를 벗어난 인간이 되어야 한다. 물론 쉽지 않다. 혁명에 가깝다. 거의 불가능하다.
(2) 경계에 서야한다. 불안을 껴안아라. 진영의 문지기가 되지 마라. 추상사고하라. 모험하라.
(3) 자쾌하라. 나를 향해 걸어라.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마라. 스스로 솟아나는 힘으로 살아라. 자기 욕망의 주인이 되어라.
- 구체적인 수행방법
(1) 인간으로 완성되겠다는 큰 포부를 가져라
(2) 포부는 좋은 습관으로만 이루어진다. 자신이 정하고 평생 지켜라
(3) 지식욕을 가져라.
그리하여 나의 욕망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그 욕망을 사건으로 발동시켜라. 아는 것에서 그치면 안 된다. 반드시 경험해야 한다. 기능적인 성장에 그치면 안 된다. 존재론적인 성장으로 나아가야 한다. 자신을 섬기는 자가 되어라.
- 오상아: 작은 나, 고정된 나를 내려놓았다. 상실이 아니라 해방이다. 평소에 '나'라고 부르던 것은 사회가 만들어준 껍데기다. 그것을 벗어던질 때 진짜 '나'가 나타난다. 그때 세계와 하나가 되는 제물齊物(만물의 평등, 萬物齊同 )의 경지에 들어간다.
- 자쾌: 스스로 즐거움. 외부 조건에 의존하지 않는 내면의 기쁨. 자쾌는 곧 삶의 실력이 완성된 상태의 정서다. 억지로 행복해지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다운 삶을 살 때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다.
○ 책 속에서
- 여러분은 좋은 것을 찾아 헤맸습니까, 좋아하는 것을 찾아 헤맸습니까? '바람직함', '해야 함', '좋음'은 이미 정해진 것이지요. 거기에는 내가 없습니다. 나는 어디에 있을까요? 바라는 것,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에 있습니다.
바람직함을 지키는 일은 질문과 대답 중 어디에 가까울까요? 대답에 가깝습니다. 바라는 것을 하려는 행동은 질문에 가깝습니다.
- 이름名이란 실체實의 손님이다.
"나는 관직 같은 건 안 해!" 누구나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관직을 맡을 정도의 실력도 안 되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냥 자기 위안을 첨가하여 허세를 부리는 가벼움에 불과하니까요. 유명해지는 일을 부정할 정도가 되려면, 먼저 유명해질 건더기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유명해질 건더기를 갖지 않은 사람이 유명해지기 싫다고 말하는 것은 함부로 대충 살다 가겠다는 뜻입니다.
- 청와대에 가서 일하는 것과 도랑에서 멋대로 사는 것 사이에서 어느 것이 더 좋은 일이라고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가 더 나의 내적 자발성과 독립성이 보장되고 실현될 수 있는지를 자세히 따지자고 하는 말입니다.
* 장자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때 생산성이 더 높다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답한 것이다.
- 상선약수, 가장 탁월한 것은 물과 같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선은 탁월하다, 훌륭하다는 의미입니다. '물은 만물을 아주 이롭게 해 주지만 다른 것들과 다투거나 경쟁하지 않는다'
- 장자가 세상은 한순간도 변하지 않을 때가 없는데, 사람은 쉽게 '정해진 마음'에 갇힌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30년, 40년 굳어 있으면 세상의 변화를 맞이할 수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오에서 이탈하라, 그러면 너는 욕을 뒈지게 먹을 것이다. 하지만 너는 도에 가까워질 것이다.'
* 정해진 마음에 들어간 사람은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면 생각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생각이 없어 더 진영이 갇힌다. 악순환이다. 궁금증조차 사라진다. 참된 어른이라면 보편적 가치와 질서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한 진영에서만 통하는 논리는 질서라고 할 수 없다. 질서는 보편적인 것이다.
* 우리는 반독재 투쟁을 했던 사람이 나중에 독재적 행태를 보이는 것을 봅니다. 민주-반민주나 독재-반독재도 사실은 같은 수준의 논리를 공유하는 상태의 적대적 투쟁이기 때문에, 비록 투쟁에서 승리하였더라도 이 논리적 구조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대립하는 양쪽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선택한 한쪽을 흔들림 없이 확신하는 정도로는 사회가 대립적인 양쪽을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는 반복 운동 이상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대개 과학적인 시선으로 자신을 객관화하여 보는 눈이 아직 생기지 않은 탓에 발생합니다. '아직 자신을 분명히 세우지는 못했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 말과 태도에 질서가 없는 사람은 생각이 좁고, 생각이 좁으면 당연한 것이 많고(궁금증의 종말), 당연한 것이 많으면 말이 빠르고 많다. 가르치려고 든다. 자기가 가진 정해진 마음이 진리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꼰대가 되는 것이다. 신중함이 사라지는 것이다. 청춘은 당연한 것이 적은 사람이다.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다.
- 찰기시, 즉 근원이나 본 바탕을 자세히 살펴본 것입니다. 제가 왜 자세히 살피는 걸 강조하느냐면, 자세히 살피는 능력이라는 것이 극소수에게만 허용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은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는 인식의 틀, 그리고 자기가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다고 믿었던 인식의 틀을 작동시켜 '판단'합니다. 자세히 살피는 것을 '본다' 혹은 '살핀다'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세계를 볼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고, 판단하는 사람은 넘쳐납니다. '판단'은 대개 기준을 적용하는 일이고, '본다'는 어떠한 선험적 기준도 없이 대상에 접촉하는 일입니다.
* (c.f) 개념, 평미레
* 근원을 접촉하는 일보다 현상적으로 정해져 있는 기능적인 삶에 빠진 사람들은 우느냐 마느냐, 이렇게 우느냐 저렇게 우느냐 등과 같은 현상적인 구분과 논증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결국, 삶은 종속의 늪을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장자 찰기시의 사례, 현대 한국의 정치판)
* 이야기를 하는 심성을 가지지 못하고, 논증에만 빠지면 자신을 쉽게 상실한다. 이야기하는 사람은 논변하는 사람보다 크고 굵은 사람입니다. 이를 보통 '함량'이라고 합니다. 보통 말하는 덕과도 매우 가깝습니다.
덕과 자쾌의 관계
- 덕은 悳이라고도 썼는데, 이를 풀어 쓰면 직심이다. 直에는 바르다는 뜻도 있고, '즉시'라는 뜻도 있다. 즉, 직심은 툭하고 튀어나오는 마음이다. 어떠한 고려나 계산도 없다. 따라서 덕은 자기의 진심과 관련된다. 데미안에서 말한 '내 안에 솟아나는 것'이다.
혜자는 기존의 관념이나 개념에 맞지 않는 새로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조는 기존 관념에 갇히지 않고, 새롭게 대응했다. (능병기 달권), 기존의 관념을 자신의 통제 아래에 두면서 지배하는 힘. 그것이 덕이다.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성인들이 대승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덕이다. 성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다 칭찬해도 더 힘을 내지 않고, 세상 사람들이 다 욕을 해도 의기소침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 길을 간다. 왜냐하면 내 행위가 바로 내 덕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자신이 자신에게 하는 평판에만 관심을 둔다. '자쾌'일 뿐이다. 자쾌는 덕의 발현이다. 이념에, 이름에, 대중들의 박수에 갇히지 않는다.
덕이 단련되어 있지 않으면, 내 세계에서 내 문제를 발견하지 않고, 다른 누군가가 다른 문제를 해결한 결과로 나온 지식과 이념, 이론을 수입해서 그것들로 내 고유한 문제를 관리하려한다. 비효율적이고 갈등이 만들어질 수 밖에 없다. 세계는 내 문제를 내 힘으로 해결하려는 도전에서만 큰 효율성이 나온다.
* 살피기 전에 판단한다는 것은 글을 읽기도 전에 글에 대한 판단을 마치고 댓글을 다는 행위와 같다.
'본다'는 내 시선을 대상 혹은 사건에 도달시켜 갖다 붙이는 일이고, '판단'은 시선이 대상에 닿기 전에 이미 있는 인식의 틀을 사용해서 '저것은 무엇이다', '저것은 어떻다'라고 결정하는 일입니다. 판단할 때는 시선이 대상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중간에 돌아와 버립니다.
사람이 자기 시선을 대상이나 사건에 갖다 붙이는 것만 해도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더해서 집요함까지 발동하여 시선을 그 대상에 오래 머무르게까지 하니 얼마나 더 대단합니까?
시선을 오래 머무르게 하면서 계속 살피는 일을 '관찰' 혹은 '자세히 보기'라고 합니다. '찰察'은 자세히 쪼개서 보는 것입니다. 과학적 사고의 핵심은 쪼개서 자세히 보는 겁니다. 보지 않으면 관찰이 시작되지 않고, 관찰이 시작되지 않으면 과학적 인식, 철학적 인식, 인문적 인식이 불가능합니다.
아편전쟁 이후 동양이 굴복을 당한 것은 과학과 철학이 없거나, 있더라도 미약했기 때문입니다. 과학과 철학이 있다는 말은 구체적인 생산활동에 과학과 철학을 적용한다는 뜻입니다.
* 과학이 있어야 철학으로 세계를 사유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사유를 사유하는 오류를 범한다.
근대 시기에 중국과 일본은 과학과 철학을 배우기에 적극적으로 나섰지만, 한국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과학과 기술을 구분해서 인식하기 어려워합니다. 대부분 과학과 기술을 '과학기술'이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사용합니다. 이렇게 되면, '기술'이 주인 자리를 차지하고, '과학'은 '기술'을 수식하는 꼴이 되어버립니다.
- 보는 일은 판단하는 일보다 더 생산적인데, 왜 자세히 보지 못하고 가볍게 판단할까요? 그것은 지적 수양이 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보는 일에는 에너지가 들어가고, 판단하는 일은 스스로 생각하기보다는 이미 자기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기준을 적용하기만 하기 때문에 에너지가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보는 일은 어렵고, 판단하는 일은 쉽니다. (...) 모든 수양과 수련은 필요한 수고를 일부러 찾아서 하는 일들입니다. 합당한 수고를 하지 않고 나아지는 일은 없습니다.
- 관념에 갇히지 않아야 한다. (찰기시, 질그릇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른 장자의 사례), 장자의 행위를 그대로 따라 해 보는 것이 아니라, 장자가 가졌던 자세와 시선의 높이를 보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것이 근원이나 근본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겁니다. 더 줄여서 말하면 자세히 들여다보고, 자세히 살피고, 깊이 생각해 보는 태도를 배양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울었는지 아닌지보다는, '찰기시'했다는 것입니다.
도가 철학을 잘못 배우면, 공부도 열심히 안 하고 근면 성실하지 않아야 하는 줄 압니다. 규칙도 잘 안 지키고, 계획도 세우지 않고, 그냥 되는대로 해야 도가인 줄 압니다. 그런 거짓말에 속지 마시길 바랍니다. 장자는 '무소불규', 즉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자신을 단련했습니다.
- 정해진 집단적 관념이나 오래된 관념에 갇힌 자기는 폐쇄적입니다. 굳어 있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개방성도 작동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기적인 삶을 살죠. (...) 우리에 갇혀 있을수록 집단의 관념에 제한됨으로써 폐쇄적으로 되어, 우리를 위할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더 딱딱하게 만들 뿐입니다. 우리로부터 이탈해야 합니다. 우리에서 이탈하여 찰기시할 수 있는 사람만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함께'라는 이념에 갇혀 있는 사람은 '함께'의 외형을 확장할 수 없습니다. 새로워질 수가 없습니다.
- 개념의 槪는 평미레(strickle)를 뜻하는 것으로 여분의 것을 제거하고 공통의 틀 안에 들어가는 것만 남게 하는 것이다. (...) 개념은 특수한 것, 사적인 것, 여분의 것을 제거하고 공통의 틀 안에 들어가는 것만을 생각의 형태念로 저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어에서 concept 또한 con(함께) + cept(받아들이다) 즉, '함께 받아들이다'라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 동사형 conceive의 ceive 역시 '쥐다', '받아들이다'라는 뜻이 있는데, 이는 세계를 자신의 마음에 쥐거나 잡아서 의미화한다는 뜻이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부분(평미레로 밀어버린 봉우리 부분)은 포기하고 손에 남긴 것만 생각의 형태로 저장한다는 뜻이다.
- 자쾌는 고유명사로 산다는 뜻에 가깝기도 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수처작주, 입처개진도 고유명사로 산다는 뜻에 가깝습니다.자쾌는 다른 어떤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 자쾌는 본능적 쾌락, 본능적 희열이 아니다. 자기를 향해 부단히 걸어본 사람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다. 그것을 알아야 모든 일의 완성도가 높아진다.
* 나를 향해 걷는 열 걸음 리뷰(링크)
- '봄'은 실재하지 않죠. 그냥 개념일 뿐입니다. 실재하지 않는 것은 오고 갈 수가 없죠. 그런데 우리는 거짓이 아니라고 서로 합의하고 사는 거지요. 얼음이 풀리고, 땅이 풀리고, 따뜻한 기운이 샘솟고, 나무가 싹을 틔우고 하는 사건들은 실재하죠. 하나하나를 다 말하기 곤란하니까 그런 사건들이 다 함께 일어나는 시기를 우리는 '봄'이라고 개념화해서 부르는 것입니다. (실재하지 않는 '봄'은 오고 갈 수가 없지만, '봄'이라는 일반명사의 효율성 때문에 우리는 합의하에 그것을 사용한다.)
그것은 나의 봄이 아니라 우리의 봄입니다. 개념은 우리의 것입니다. 거기에는 '나'보다는 '우리'가 주체입니다.
- 무소유는 이 세계를 자신의 의지대로 정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재산을 갖는 것, 혹은 안 갖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이 세계를 내 뜻대로 정해서 관계하려는 소유적 태도를 부정하는 것이죠. (개념, 손에 쥐는 것에 의미에 대하여 설명 中)
* (c.f) 무아. 고정된 내가 없으니, 나의 것도 없다. 무상. 모든 것은 변한다.
- 개념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도록 태어난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계를 가진 개념의 사용법을 다르게 가져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진실을 드러내고 창조하는 방식 가운데 '시'가 있습니다. 시는 드러나지 않은 진실을 드러나게 해주는 것이지, 허위와 환상을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개념을 사용하는 데에 급급하지만, 시인들은 개념을 지배하고 조정하고 재배치하는 능력을 발휘합니다. (...) 소설을 쓴 소설가를 만나보면, 소설가와 소설 사이의 거리가 크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를 읽고 나서 그 시를 쓴 시인을 만나보면 시인은 꼭 자기 시같이 생겼습니다. 소설은 쓰는 거지만, 시는 토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자기가 진실하게 드러날 가능성은 소설보다 시에 더 있습니다.
시인의 위대함
시는 진실, 혹은 드러나지 않은 진실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지 허위와 환상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 사람들은 개념을 사용하지만, 시인들은 개념을 지배한다. 일반인들은 개념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정해진 사용법을 벗어나지 못한다. 시인은 개념을 지배하기 때문에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 개념을 지배해서 인간에게 진실을 접촉하는 길을 알려주는 것이다. 시인은 시와 닮았다. 자기가 들어간다. 시는 쓸 수 없고 토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 논증(개념에 통제 당함) < 이야기 < 시(개념을 통제함) < 음악-소리(문자를 벗어남, 개념조차 없음) < 춤(소리마저 벗어남)
* 개념으로 드러날 수 없는 세계의 모습은 이야기, 시, 소리, 춤을 통해 드러난다.
- 음악은 문자가 아니라 소리를 어루만진 결과입니다. 문자는 인간적인 차원의 것입니다. 소리는 신적인 차원의 것이죠. 소리를 문화적 활동 이전부터 존재하던 것이지만, 문자는 문화적 활동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으로부터 이탈한 인간이 문자를 만들어 사용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영혼을 아직 인간 세상까지 다 끌고 내려오지 못해 매일매일 신의 세계를 향한 간절한 그리움으로 채우는데, 그런 사람들이 결국 시인으로 살죠. 인간 세상에 사는 것을 힘들어하면서 말이죠. 그래서 그들은 겨우 드문드문 몇 개의 문자를 배치하면서 그 틈새에 남몰래 고향의 기억이자 신의 기억이 담긴 소리를 박아두는 것입니다. 시로는 소리(운율)를 경험할 수 있지만, 이야기나 논증에는 개념만 있어서 소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영혼의 높이는 논증에서 이야기로, 이야기에서 시로, 시에서 음악으로 상승합니다. 원래 신전에는 문자가 없고 음악만 있었습니다.
문자를 매개로 자신을 만나는 사람보다 소리를 매개로 자신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에게 들어가는 신성을 경험하기가 쉽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신성이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 쇼펜하우어 "음악은 본질을 이야기한다. 다른 예술은 모두 그림자를 말한다."
- (논변과 논문의 치밀성) 빈틈없이 치밀하면 할수록 더욱 배타적이 되고, 배타성이 강하면 강할수록 상대에게 지지 않을 수 있죠. 이야기는 좀 다릅니다. 이야기는 그렇게 치밀하지 않습니다. 빈틈이 많습니다. 치밀하지 않게 허용된 빈틈들은 상대가 찾아들 수 있는 공간이 됩니다. 이야기에 허용된 빈틈은 환대의 공간이자, 겸손의 공간이자, 허용의 공간입니다. (...) 환대하고 환대를 받는 교류 속에서 공감이 발생합니다.
* 아이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논문을 알려주는 것 VS 피노키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 근원을 접촉하는 일보다는 현상적으로 정해져 있는 기능적인 삶에 빠진 사람들은 우느냐 마느냐, 이렇게 우느냐 저렇게 우느냐 등과 같은 현상적인 구분과 논증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결국, 삶은 종속의 늪을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 사람들은 입장이 같으면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입장이 서로 다르면 반대한다. 생각이 같으면 옳다 하고, 생각이 다르면 틀렸다고 한다. 非吾罪也(비오죄야),人之罪也(인지죄야)。 與己同則應(여기동즉응),不與己同則反(불여기동즉반), 同於己為是之(동어기위시지),異於己為非之(이어기위비지)
* 우언을 개입시켜 설명하는 이유. 사마천은 <장자>의 가장 큰 특징으로 우언(이야기 형태)를 꼽기도 했다.
- 치언의 치巵는 술잔을 뜻합니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하는 말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방편方便과 비슷하죠.
* 우언은 비유, 중언은 인용, 치언은 애드리브
우언(寓言)은 바깥의 말을 빌려 말하는 표현방식이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자식의 중매를 설 수 없는데 그건 아버지 아닌 사람이 자식을 칭찬하는 게 아버지가 칭찬하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즉 다른 사람이 누군가의 자식을 칭찬하는 게 아버지보다 설득력을 지녀서이다.
사람들은 자기와 생각이 같으면 따르고,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반대한다. 나아가 자기와 생각이 같으면 옳고,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틀렸다고 여긴다. 그래서 생각이 다르거나, 다른 생각을 틀렸다고 여기는 사람을 설득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우언은 이런 경우 이들을 설득하는데 있어 매우 효과적이다. 그건 스스로에게 잘못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아니면 은근히 깨닫도록 만들어서이다.
중언(重言)은 옛날에 살았던 성인의 말씀에 무게를 얹어 전하는 표현방식인데 한마디로 논쟁을 끝내기 위한 목적이다. 그렇다면 누가 논쟁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이어야 한다. 이런 어르신이 한마디를 하면 떠들썩했던 논쟁도 조용히 끝날 때가 많다.
중언에 말의 무게가 더해지려면 사리와 본말에 맞는 말을 해야 하고, 또 덕을 지녀야 한다. 그래야 옛말을 하더라도 전혀 시대에 뒤처지지 않는 말을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치언은 상대방의 의식 상태와 삶의 상황에 맞추어서 자연스레 표현하는 것으로서 저절로 자신의 흐름을 찾는 말이다.
출처 : 월간원광(http://www.m-wonkwang.org)
사랑 - 합의된 기준과 폭력
사랑은 '사랑'이라고 서로 합의하기 전까지만 진짜 사랑이다. 합의한 이후에는 사랑이 권력투쟁이 된다.
합의한 순간 '사랑은 이러이러하다'라는 개념이 생긴다. 그 개념에 어긋나면 사랑이 아니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사랑'과 나의 '사랑'이 다른 개념의 구조를 갖고 있다.
그런데도 무조건 같은 곳을 봐야한다고 생각하거나, 연락에 대한 기준을 들이대면 문제가 발생한다.
합의한 이후부터 내 개념 구조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을 토대로 상대방의 기준을 바꾸려고 한다.
"왜 나처럼 생각 안 해?" 이것은 폭력이다.
하나가 옳고 다른 하나가 그르면 결론이 쉬운데, 둘다 각자가 옳다고 생각하니 어려운 것이다.
자신의 생각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순간, 인간은 폭력적으로 바뀐다. 각자 자기 진리의 전사가 되어버린다.
이 때문에 사랑은 사랑으로 남기보다 폭력으로 바뀌기 쉽다.
진리간의 투쟁이 곧 폭력이기 때문에 그렇다. '개념'이 가진 본질적인 속성이다.
▷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여자라고 차별하지 말라, 이민족이라고 배척하지 말라, 병들고 가난한 자를 따뜻하게 대하라 하였으나 이 역시 반역죄로 몰렸다.
유가는 개념을 믿고 도가는 개념을 믿지 않는다.
유가는 개념을 정하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집행하자 한다.
도가는 개념을 하나로 고정하는 것 자체를 부정한다.
(c.f) 개념은 현대적인 용어이고 그전에는 언言이나 명名이라고 지칭했다
오상아 - 나는 나를 살해했다.
- 자기 맘에 들지 않는데도 옳은 것을 옳다고 해줄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지적으로 상당히 훈련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우면 <제물론> 편에서 장자가 '자기 살해(오상아)'를 말했겠습니까? 자기를 살해할 정도의 수련을 거쳐야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 반성과 각성이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해주는 수련의 일종입니다. '무아', '무녀무상' 등도 다 이것과 관련됩니다.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견고한 장벽에 갇혀 있다는 것을 장자는 알았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이 장벽을 뚫고 들어가야 하는데, 이 장벽을 뚫고 들어가 틈새를 벌려주는 일로 이야기의 방식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 오상아란 즉 정해진 마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탈아, 무아, 무아, 엑스터시에 가까운 경지다. 영어의 엑스타시는 그리스어 에크스타시스에서 유래했는데 에크는 밖으로 벗어난다는 뜻이고 스테시스는 현재의상태, 특정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를 말한다.
따라서 엑스터시는 특정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나를 벗어난 경지를 뜻한다. (내가 나를 보기 위해서는 나를 벗어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이념과, 신념과, 특정한 지식에 갇혀 있는 자아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의 단기적 효용성 때문이다. 작은 마음이나 정해진 마음이 그 단기적 효용에 집착하게 만든다.
"큰 지혜를 가진 사람은 여유롭지만, 작은 지헤를 가진 사람은 급급하다. 큰 말은 담담하나, 작은 말은 장황하다. 그런 사람들은 잠잘 때도 온갖 잡념에 싸여 깊이 잠들지 못한다."
수양이 높아질 수록 하나는 피부가 좋아지고, 하나는 말수가 줄어든다. 수양이 덜 된 사람은 깊이 잠들지 못하고, 깨어있을 때는 몸이 바쁘다. 쉴 새가 없다. 시선을 높이지 못하고 추상화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삶이나 일상 속에서도 생략이나 절제가 없다.
일단 특정한 가치관이나 신념에 빠져버리면 인간은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 슬프지만 현실이다. 한번 홍위병이 되어버리면, 인간의 원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 유동적 전체성이라는 세계의 진실을 만나려면 시간과 공간과 교육된 내용에 갇힌 폐쇄성을 깨부수는 수밖에 없다.
* 약유진재, 참된 주재자가 있기는 있는데 구체적인 형상으로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실제적인 작용은 있는데 구체적인 모습은 없다. (유정이무형, 여기서 情은 '실제 작용'을 뜻한다) 우리 몸에 뼈가 백 개 정도 있고 구멍이 아홉 개 있고 내장이 여섯개 있다. 우리는 이들 가운데 어떤 것을 특히 더 좋아하지는 않는다. 각자 하나하나가 자신의 역할을 하면서 전체를 이룬다.
장자가 '기'의 이합집산으로 되어 있는 전체적 유동성 혹은 유동적 전체성 자체를 근원으로 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어떤 근원적인 존재 자체가 특별히 있는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전체성을 근원으로, 주재자로 보고 있는 것 같다.
- 자본주의를 어떤 높이의 시선으로 대하는지가 인문적인지 아닌지를 결정하지, 자본주의에 대한 부정 자체가 인문적인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떤 '주의'를 받아들이면, 그 주의의 개념이나 정의에서 삶이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 자기는 결국 주의를 수행하는 대리인으로 전락해 버리고 진정한 삶을 구가하는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 인문적인 태도는 주의뿐 아니라 이 세계의 모든 일이나 존재에 대하여 인문적인 높이로 다루는 것일 뿐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같은 말을 상정해 놓고 대화하면 그것들이 생겨날 때의 시점에 갇히거나 그것들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서로의 관념에 갇히게 되고, 그 갇힌 관념에 상대방이 맞는지 안 맞는지만 따지게 됩니다.
- 정해진 관념이나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 포착된 문제를 중심으로 대화한다는 것은 자신이 그 대화에 전면적으로 열려 있으면서 그 대화를 자기 자신이 전적으로 책임진다는 뜻입니다. 대화나 사유의 주인이 되는 것이죠. 그렇지 않으면 말만 대화지 사실은 자신이 믿는 것을 강요하거나 주의나 관념들을 최초로 생산한 자들의 대리인이 될 뿐입니다.
- 항우와 유비는 세계를 봐야 하는 대로 본 사람들이고, 유방과 조조는 세계를 보이는 대로 보고 거기에 맞춰 반응한 사람들입니다. 유방은 역사의 진행을 정확히 이해하고, 거기에 과감히 올라탄 사람(세상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내면의 힘이 있음, 진실한 자신이 작동할 때 사용하는 힘을 '덕'이라고 한다.)이지만 항우는 시대가 나아가는 방향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자기한테 익숙한 과거의 프레임으로 흐르는 시대를 제어하려고 했습니다. (봉건시대의 질서에 집착)
* 정해진 마음이 없으면 세계를 봐야 하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대로 볼 수 있죠. '성인은 항상 무심하다'는 말은 '자기 마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백성은 이론이 아니라 세상 속에 있습니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봐야 합니다.
- 우물 안의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말해 줄 수 없소. 공간의 한계에 갇혀 있기 때문이오. 여름 한철 사는 벌레에게는 얼음을 말해줄 수 없소. 시간의 한계에 갇혀 있기 때문이오.
- 인식의 확장은 인식의 한계를 자각한 자에게만 허용된다는 것을 북해약은 말해줍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사람은 절대 망가지지 않습니다. 통치자도 권력을 차지한 다음에 부족함을 절감하고 걱정이 깊어져야 통치를 잘할 수 있습니다. 부족함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의 함량의 크기가 어느 정도는 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이 될 가능성은 각성, 자각, 반성 등에서 보인다. 그것이 없는 존재는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없다. 헤르만 헤세도 <데미안>에서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 이상"이라고 말한다. 생각은 곧 반성이다. 반성력이 없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 하백은 그릇이 작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한 일, 자기가 터득한 진리, 자기가 경험에서 얻은 통찰이 자신의 그릇을 금방 채우기 때문에, 자신을 스스로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 향원은 그릇이 작은 사람인데 자신의 그릇이 작은 줄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보다 훨씬 큰 것을 보고도 자신의 부족함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망가져버린 상태에 빠져있습니다. 향원 혹은 그릇이 작은 사람들은 한계를 넘어서는 덕을 발휘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향원을 덕(함량)의 파괴자라고 했던 것입니다.
* 덕은 정해진 가치나 관념에 갇히지 않고 자신을 자신으로 살게 하는 힘입니다.
- 탄성이 있는 지성은 현 상태에서도 자신 너머를 궁금해할 수 있어서 현 상태가 주는 한계를 인식하고, 그 한계 너머의 세계로 건너가려는 꿈을 가질 수 있습니다.
가치와 사실, 과학과 철학
- 북해약은 가치론적이고 주관적인 판단 기준이 아니라 그것들이 철저히 배제된 자연을 견주는 대상으로 삶았습니다. 자연적인 사실을 관찰하고 자연적인 법칙을 수용하는 것으로 인간은 자신의 크기를 더 잘 키울 수 있습니다. 장자(뿐만 아니라 노자까지)도 가치를 확장하는 방식보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인간이 더 잘 성숙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중심축을 가치의 세계가 아니라 사실의 세계에 두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믿습니다.
* (c.f) 자연법칙을 수용하는 태도는 고엔카 명상법이 연상된다.
- 철학을 공부하고 싶으면, 우선 과학을 공부하십시오. 과학적 지식이 부족한 채로 철학만 공부하면 답답한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우선은 과학입니다. 과학에 흥미를 가지십시오. 사실에 대한 인식을 깊고 넓게 가져가는 것이 먼저입니다.
코르페니쿠스(지동설 주장), 갈릴레이(실측을 통한 지동설 증명), 케플러(수학적 계산을 통한 지동설 증명)의 노력이 없었다면 인간은 기껏해야 여전히 르네상스 시대를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 과학은 이전 시대와는 전혀 다른 진리다. (데카르트의 시대)
* 과학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이해되지 않으면, 교조주의적 신념을 쌓는 데나 봉사할 수 있을 뿐입니다.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 본유관념, 이성, 실체, 물질, 정신, 송과선, 심신이원론, 자유의지 등)
* 데카르트는 뇌 중앙의 송과선(pineal gland)을 비물질적인 '영혼'과 물질적인 '육체'가 상호작용하는 근본적인 지점, 즉 "영혼의 주된 자리"로 지목했습니다
과학을 모르는 철학은 답답하고 숨 막힙니다. 철학은 원래 새 시대를 알리는 신호이자 깃발인데, 잘못하면 새 시대의 장벽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큽니다. 특히 철학을 생산해 본 적 없이 수입해서 쓰는 우리는 특히 더 경계해야 합니다. 가치보다 사실이 먼저입니다. (공부의 순서와 토대. 사실보다는 이념이나 가치나 신념에 쉽게 경도되면 안 된다. 그러면 이미 가진 틀만 강화될 뿐이다. 그러면 넓은 통찰이 나올 수 없다.)
(c.f) 구한말의 사례
무심, 무아, 무념 등은 다 가치론적 확신을 벗어난 내면의 상태입니다. 가치론적 확신을 벗어난 무아가 되어야 참된 나, 진아와 가까워집니다. 주관적 경향의 확신을 최대한 줄이고 객관적 사실에 대한 인식 지평을 넓혀 가야 합니다.
세계의 사실적 진실과 친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삶에 대한 주관적 확신을 가지는 일을 철학으로 오해하고, 특정한 정치적 확신에 오랫동안 자신을 바치는 일을 철학적 삶의 태도라고 오해하며 살게 됩니다.
인간으로 완성되려는 꿈을 가지자(1) 큰 함량과 포부 - 자잘해지지 않기 (2) 좋은 습관을 갖기 (3) 강한 지식욕을 갖기
* 자기 안에서 솟아나는 것으로 포부가 설정되고 삶의 경로가 열리면 사람은 지치지 않는다. 우주 대자연도 그 사람을 지치게 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지치는 이유는 그것이 자기 쾌락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자기를 궁금해하는 것이 바로 자기를 배려하는 것이다. 일을 할 때마다 스스로 질문을 하고 대답을 해야 한다. 내가 원하는 것인가, 내가 필요한 것인가, 이 일을 통해서 나는 어디로 가려하는가. 이것을 통해서 삶의 경로, 자쾌를 알 수 있다. 자기를 궁금해하지 않으면 그저 우주 속에서 소모되어 버린다. 맹목적으로 살다가 50대, 60대에 이르러 '어떻게 살아야 되지' 고민하는 것은 비극적인 일이다.
* 함량을 키워야 성취가 크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시선의 높이만큼만 인생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걸을 수 있는 가장 먼 거리까지 당신이 걷겠다고 정해라.
○ 인간으로 완성되겠다는 큰 포부를 가져라
- 자동차 경적을 울려대는 것은 무례한 상대방이 자신의 전체를 뒤흔들 정도로 느껴지기 때문에 자신이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고, 자신의 존업이 훼손당한 기분까지 드는 것이다. 자기가 더 커져야 합니다. 자기 마음이 크면 클수록 작은 일들은 가볍게 다루고 아등바등하지 않게 됩니다. 뜻이 커버리면 작은 일들에 쉽게 좌우되지 않고 크게 상관하지 않습니다.
인간으로 완성되려는 꿈보다 큰 꿈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행동도 인간으로 완성되는 길에 도움이 되면 하고, 도움이 안 되면 안 합니다. 인간이 자잘해지면 안 됩니다. 자잘한 삶까지 살아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습니다.
자잘한 승리가 벌어지는 환경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자잘한 승리를 도모하거나, 그것에 취하면 사람이 자잘해진다. 대승해야 한다. 자잘한 완성(小成)은 국부적이고 단편적인 성과를 뜻한다. 이것에 도취하면 전면적이고 초월적이며 보편적인 '도'에 접촉할 수 없다. 도가 자잘한 완성에 가려서 드러나지 못하는 것이다.
도가 자잘한 완성에 가려지듯이, 원초성과 원래성을 품은 말은 피상적으로 꾸며대는 겉치레의 말에 의해 가려져 드러나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진위나 시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자잘한 승리에 갇힌 자는 곧 향원이다.
도가에서는 보통 해를 해로 보고 달을 달로 보는 것을 知라고 한다. 그리고 해와 달을 한 벌이나 하나의 사건으로 보는 것을 明이라고 한다. 지는 구분해서 보는 앎이고, 명은 대립면으로 구분되는 다른 두 쪽으로 보지 않는다. 구분하려면 기준이 있어야하고 기준이 있다면 정해진 마음이 있어야 한다. 정해진 마음을 부정하는 활동을 '오상아'라고 한다. 아무런 편견 없이 원래성과 원초성을 품는다는 뜻이자, 도를 인식하는 수준을 뜻하는 말이다. 명은 어느 한쪽에 갇힌 앎이 아니라 그 양쪽을 모두 품는 인식이다.
말로 따지자면 드러내는 표현만 아는 것과 드러난 것과 은폐성을 모두 이해하는 것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으면 삶이 있듯이 옳음을 따른 것이 바로 그름을 따른 것이 되고, 그름을 따른 것이 바로 옳음을 따른 것이 된다. 세상 속에서 시와 비는 경우에 따라 수시로 위치가 바뀐다. 성인은 시비 판단의 기준에 따르지 않고, 사물의 자연성에 비추어 우주 대자연의 원리를 따른다.
= '도의 지도리道樞'
도는 들을 수 없다. 들리면 도가 아니다. 도는 볼 수 없다. 보이면 도가 아니다. 감각적 대상이 된다는 것은 유한한 구체성을 가진다는 말이다. 구분이 분명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장자의 시각에서 보편적 질로서서의 도는 구분이 없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지와 명을 설명하며 명의 태도를 강조하지만, 무엇이 지이고 무엇이 명인지 철처한 비교 분석을 하지 않는다.
○ 지속성을 결정하는 것은 습관이다.
좋은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좋은 습관을 갖지 않고 인간으로 완성되는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규율이라고도 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루틴이라고 하지요. 글 쓰는 것이 꿈인 사람은 전쟁이 나도 원고지 몇 장은 꼭 쓰고 자야 한다는 루틴을 가져야죠. 스스로 정하고 평생 지켜야 합니다. 큰 포부는 습관으로'만' 이루어집니다.
○ 지식의 양을 늘려라.
강한 지식욕. 노자는 '주나라 왕립 도서관 관장'이었다. 지식 없이는 성숙할 수 없다. 지식이 없으면 성숙한 척할 수만 있고, 자기가 한번 가진 확신을 평생 끌고 가려고 합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만든 가장 위대하고 찬란한 업적이 지식입니다. 그것을 부단히 섭취해야 합니다. 골프 줄이고, '소맥' 줄이고 잡념과 잡담 줄이면 다 가능합니다.
- 덕불고 필유린
자기 자신의 크기를 수천 리나 되는 크기로 키우는지 아닌지가 관건이고, 거기까지만 자신이 할 일입니다. 자신이 할 일을 완성하면, 그것이 아무 의미 없이 사라지는 경우란 없습니다. 자신을 키우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헛수고가 될 걱정을 먼저 하는 사람에게는 자쾌의 정신이 없을 것입니다.
"흙을 먼저 쌓아서 산을 이루면, 바람은 거기에 생겨난다. 물을 대서 연못을 이루면, 물고기는 거기에 생겨난다. 탁월함을 꾸준히 추구하고 덕을 이루면, 명철한 통찰력이 저절로 오고, 성스러운 마음이 거기에 갖춰진다." (순자, 권학편)
다른 것 먼저 기대하지 않고 묵묵히 흙을 쌓아 이루기만 하면 바람과 비는 거기서 저절로 생긴다. 눈은 높은데 거기에 맞는 내공의 두께를 쌓는 일에 게으른 사람은 신도 구제할 수 없다.
내공을 두텁게 쌓는 일을 해내는지 아닌지에 다라서 존재의 격이 달라진다. 누구는 글을 쓰면 수천 년 역사에 남고, 누구는 글을 쓰면 동네 사람 몇 명이 돌려보고 끝난다. 장자는 참새와 대붕 사이에 차이를 분명히 두고, 우리에게 대붕의 마음을 가지라고 권한다. 삶이 침울하다고 느껴지면, 침울한 다음에 두께를 쌓아야 한다. 그 방법밖에 없다. 침울해졌다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봤다는 것이다. 한계를 봤으면 두꺼워질 희망이 있다.
제도를 바꾸려하지 말고, 제도가 바뀌기 전에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시간의 관념에 갇히지 말기
- 나는 너무 늦어버렸어 하는 생각을 한 번이라도 했다면 그것은 여름벌레가 가을을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시간관념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에 갇히면 안 됩니다. 지금부터 당장 하느냐 안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자기가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은 마음이 바쁘지 않습니다. '이 나이에'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할 생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간절하면 됩니다. '자쾌'하면 간절함이 저절로 따라옵니다. 자쾌하지 않으면 핑계 대다 인생을 다 보내버리죠. 포부를 크게 가져야 합니다.
함량
- 세상이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의 싸움이면 간단합니다. 그런데 스스로 선하다고 하는 사람들끼리의 싸움이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지요. 선한 사람에게 선하듯, 불선한 사람에게도 선하면 자신의 덕이 선해집니다. 자신의 함량이 커집니다. 함량이 커지면 현실을 더 잘 운용할 수 있게 됩니다. 각성이나 절제는 특정한 관점을 발현한 것이 아니라 내면의 덕이 표현된 것입니다.
가치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면, 언제나 선한 사람과 선하지 않은 사람으로 쉽게 나눕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덕을 신실하게 만드는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덕이 신실해지지 않으면 궁금증이 들지 않아서 세계와 사실을 궁금해할 줄 모르게 되어 결국은 정해진 가치에 빠지게 됩니다. 얇고 딱딱한 도덕주의자로 전락해 버립니다. 선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사람을 쉽게 믿으면 안 되는 이유는 그 선이 그 사람만의 선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도덕주의자가 도덕으로 세상을 괴롭히고, 정의를 자처하면서 오히려 세상을 부정의의 혼돈에 빠뜨리며, 선한 삶을 강조하다가 악으로 귀결되어 버리는 일들을 많이 보지 않습니까? 우리는 '선한 영향력'이라는 말을 쉽게 쓰는데, 조심해야 합니다.
- 어떤 창의적인 결과물도 그것이 옳다는 이유로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옳고 그름은 창의적 결과물이 출현하고 난 후의 평가일 뿐입니다.
* 창의적 결과물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려는 욕망의 크기나 절실함이 좌우하는 영향이 더 크다. 그것은 마음의 크기나 함량의 크기에 가깝지 정의감이나 옳고 그름을 따지는 능력에 가깝지 않다. 참된 삶을 지향한다고 해서 창의적인 결과물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 우리가 성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배울 때, 잘못하면 성인들이 도달한 최종 결과만 취하려 하지, 제일 밑바닥에서부터 그 결과에 이르는 동안 성인이 겪었던 고단함은 겪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 고단함과 수고를 빼고서는 어떤 결과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근본에서부터 축적된 수련의 과정과 탁월함에 이르려는 병적인 집착과 위대해지려는 거대한 포부가 차근차근 집요하게 쌓여서 화광동진에 이릅니다.
* 和光同塵: 빛을 부드럽게 하여 속세의 티끌과 함께한다는 뜻으로 자기의 뛰어난 덕과 재능을 감추고 세속을 따르고 어울리는 것을 말한다.
반연, 자화, 사이, 무방
- 마룻대와 들보는 성벽을 쳐부술 수는 있지만, 작은 구멍을 막을 수는 없소. 역할이 다름을 말하는 것이오. 기기화류는 하루에 천 리를 달릴 수 있는 말들이지만, 쥐를 잡는 데에는 너구리나 살쾡이만 못하오. 재주가 다름을 말하는 것입니다. 행위는 귀하다거나 천하다거나 하는 것에 때가 있고, 일정하게 정해진 기준이 없음을 알 수 있소.
* 사기포서(使驥捕鼠): "천리마에게 쥐를 잡게 하다"
* 봉지심蓬之心: 쑥대 대롱만 한 작은 마음. 큰 박을 보고 바가지로 쓰기 어렵다고 바로 깨버리는 혜자를 보고 장자가 이른 말. 기존에 정해진 관념에 갇혀 그 박을 배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전환하지 못한 것. 창의적으로 사고하지 못함을 이르는 것. 자기가 가진 개념을 변화된 상황에마저 꿰맞추려고 한 사람은 여기서 저기로 건너가지 못한 사람이다. 기존의 개념에 '갇힌' 사람이다.
- 도를 근거로 보면 무엇이 귀하고 무엇이 천하겠소? 이를 일러 반연反衍이라 하오. 당신의 뜻에 구속되지 마시오. 그러면 도에 어긋나게 되오. 만물의 삶이라는 것이 말이 질주하는 것처럼 움직여서 변하지 않는 것이 없고, 때에 따라 달라지지 않은 것이 없소.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느냐고요? 모름지기 자화하는 것이라오. (하백의 질문 - 할 수 있는 것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의 분별 - 자체가 성립하지 않음을 말하는 북해약의 답변)
* 반연反衍: 반대쪽으로 계속 이어져 있다. 고정된 귀천이나 크기, 시비(是非)의 구분이 없으며, 만물은 고정된 상태로 머물지 않고 서로 뒤바뀌고 변화하며 흐른다는 의미입니다.
* 자화自化: '스스로 화한다'는 뜻으로, 외부의 강제적인 힘이나 인위적인 조작 없이 만물이 본성을 따라 스스로 변화하고 생성되는 과정을 말합니다.
* 사이謝施: 여기서 사 謝 는 '바뀌다'라는 의미이다. (신진대사新陳代謝에서의 용법과 같음) 시施는 '이'로 읽으면 '기울다'라는 뜻이다. 따라서 세계의 진실이 기울어져 있다(변화운동이 잘 일어난다)는 것을 뜻한다. 원이 아니고 타원이다. 모든 것은 다 기울어져서 계속 대사 한다. 계속 교체된다.
* 무방無方: 모서리(분명하게 정해진 형태와 방향)가 없다. 우주는 특정한 방향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즉, 하백의 질문에 대한 북해약의 답변은 '세상, 우주는 반대쪽으로 계속 이어져 있다. 계속 교대된다. 특정한 방향이 없다. 따라서 똑 부르게 어느 쪽이 좋은지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사랑을 시작하면 이별을 향해 간다. 태어나면 죽음을 향해 간다. 그 과정에서 생과 사 가운데 하나를 분명히 정할 수 있는가. 사랑과 이별 가운데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명히 나눌 수 있는가. 없다는 것이 북해약의 답이다. 어떤 사람은 머리가 빨라서 성공하지만 어떤 사람은 머리가 빨라서 실패한다. 모든 것은 자화 한다. 자화 하는 것을 인간이 정하고 판단하여 가치를 매길 수 없다.
우주가 자화 하니, 우주의 일부인 인간도 자화하는 것이 좋다. 자쾌와 자화를 연결해서 이해하면 더 쉬울 것이다.
자화와 자쾌
- 고유한 나로 자화할 것인가, 타화 할 것인가. 자쾌는 정해진 가치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아니다. 타인과 경쟁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자기 자신과 경쟁한다.
<데미안> - "나는 내 속에서 스스로 솟아나는 것, 바로 그것을 살아보려 했다.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우리는 보통 우리 속에서 스스로 솟아나는 것을 살기보다는 이미 좋다고 정해진 것을 수행하는 것으로 삶을 채우는 경우가 많다.
* 우리는 걷기 좋은 길을 만들어 놓고, 그것의 고유한 이름을 달아주려 하지 않고 '한국의 산티아고'라고 부른다. 산티아고에 의존해야만 그 길의 존재 가치가 비로소 빛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자기 자신보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을 더 중시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이러면 나의 존재 가치가 나 아닌 다른 것에 견주고서야 비로소 확인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대관령은 대관령일 때 위대해진다. 대관령이 한국의 산티아고일 때는 절대 위대해질 수 없다. 그때는 '아류'일뿐이다.
* 내가 하고도 그것이 외부 것에 의해 확인이 되어야만 비로소 존재 가치를 가지 수 있다는 오류. 그것은 '자쾌'의 경지를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그렇다.
(c.f) 진리를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진리는 반드시 경험되어야 한다. (고엔카)
* 자화의 행위가 우주적인 행위이고, 가장 완벽한 행위이며, 생산성이 가장 높은 행위이다. 자화를 받아들여 변화의 상태에 자신을 두었을 때, 자신이 진정으로 드러나서 때에 맞는 적절한 행위를 할 수 있다.
노자 <도덕경> 제2장 - "모든 사람이 선하다고 하는 것을 선한 것으로 알고 살면 선하지 않은 것이고, 모든 사람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알고 추종하면 오히려 추한 꼴이다" 노자는 장자가 쓰던 '자화'라는 용어는 쓰지 않았지만, 결국 같은 말이다.
자쾌는 평론가로 사는 일이 아니라 행동가로 사는 것이다. 사람은 대부분 자신을 보는 눈과 타인을 보는 눈이 다르다. 모든 것을 분석하고 비판하고 평가하면서도 자신은 제삼자로 완벽하게 이탈한다. 자쾌는 3인칭으로 살며 타인을 훈수하는 것이 아니라 1인칭으로 살라는 말에 가깝다. 1인칭으로 살아야 삶의 생산성이 높아진다.
* 자녀 교육에서의 자화
부모의 역할은 자식에게 자화의 토대를 제공하는 것에 그쳐야 한다. 자식 스스로 클 수 있는 내면을 만드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자화의 토대를 제공하는 것은 무엇일까. 먼저 안전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다음 충분히 사랑하는 것이다. 그다음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자녀나 학생에게 무엇인가를 주입하려고 하면 많이 알고는 있는데 자신이 무엇을 하려는 사람인지, 어떻게 살려고 하는 사람인지를 잊어버리게 된다. 수동적으로 주입된 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믿고 그것을 사용하는 데에만 빠지다가 자아상실의 지경에 이르게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알고 싶어하는 욕망'을 지키는 것이 핵심이다.
도가 계열에서는 가능한 국가의 관리를 느슨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관리를 촘촘하게 강화하는 것은 특정 이념이나 가치를 절대선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사실에 근거하는 통치보다 도덕에 집중하는 통치를 하게 되는 우를 범한다. 그러면 숨쉬기 어려워진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대체로 그렇다. 도가의 시각으로 볼 때는 유가 역시 그렇다. 중국에서 모택동의 사회주의는 공자적이었고 등소평의 사회주의는 노자적이었다.
자화는 자쾌와 가깝다. 자화 하면 더 독립적이고, 더 독립적이면 더 자유롭다. 더 자유로우면 더 창의롭다. 창의로우면 자쾌한다.
- 마을은 지배 구조나 가옥들의 배치에도 질서나 규칙이 있다. 대개 성 안을 가리킨다. 성 안의 질서가 있는 곳을 理라고 하며, 인문적 질서가 없는 자연 상태의 들판을 野라고 하며 무질서와 질서가 교차되어 있는 그 사이의 공간을 郊라고 한다. 구슬이나 돌에 새겨진 무늬, 질서를 理라고 한다.
이는 (인간의 주관성과 별개로) 객관적으로, 즉 자연적으로 새겨진 무늬라는 뜻이다. 돌에 새겨진 무늬는 인간의 주관성에 의해 흔들리거나 좌우되지 않는다. 도를 알게 되면 달어리達於理, 즉 사회와 자연의 질서, 규칙, 원리를 알게 된다. 이는 편견, 가치관, 이념, 신념을 벗어나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자연과 사회의 질서, 원리를 통달한다는 뜻이다.
달어리하여 원리에 통달하면 명어권明於權, 즉 임기응변에 능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권權은 '저울추'를 뜻한다. 저울 추가 흔들리다가 중심을 잡는 것처럼, 형세를 잘 살펴 가장 적절한 행위를 하는 것을 뜻한다. '저울질을 잘 한다'는 것은 임기응변에 능하다는 것이다. 잔머리라는 의미도 있지만, 지적 성장이 충분하여 이루어지는 행위는 거의 다 임기응변이다.
이치를 모르면 적절한 임기응변을 못하는 우를 범하게 되고, 장자는 이를 '해를 당하는' 것으로 봅니다. 해를 입지 않는 것은 다른 말로는 이익이 생긴다는 것이다. 박을 배로 만들 생각을 하지 못하고 깨버리면 이것은 바로 이익을 상실하는 것이다. 득도하면 이치에 통달하고, 임기응변에 밝아지고, 거기서 이익이 생긴다. 창의성도 임기응변의 한 형태다.
[최진석의 노장적 생각]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더 세다
동양의 옛 선현들은 높은 단계의 삶을 지향할 때, 다 ‘도’(道)를 추구했다. ‘도’는 보이고 만져지는 것들을 잠시 포기하며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은 세계로 쉼 없이 상승하고 또 상승하다가 어느 극점에서 마주칠 수 있다. 그래서 ‘도’는 이름도 없고(無名), 형태가 없다(無形).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보이기도 하고 만져지기도 하는 만사만물 가운데 ‘도’의 지배를 빗나가는 것은 없다.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은 단계의 최 극점에 있는 “‘도’에 접촉하면, 세계의 맥락과 흐름에 통달할 수밖에 없다. 세계의 맥락과 흐름에 통달하면, 이리저리 저울질을 제대로 해서 정확한 판단과 시의적절한 정책을 펼 수 있다. 그러면 누구도 그 사람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知道者必達於理,達於理者必明於權,明於權者不以物害己. 『장자 · 추수』)
* 능병기달권(能秉機達權)에서의 쓰임과 같다. 권도(權道)는 상황에 따른 유연성, 임기응변을 뜻한다.
能 (능할 능): 능력이 있다, 할 수 있다.
秉 (잡을 병): (자루나 기틀을) 손에 잡다, 유지하다, 맡다.
機 (기틀 기): 기계의 핵심 부품, 기회機會(중요한 것들이 모이는 시기), 중요한 시점, 기밀機密.
達 (통달할 달): 도달하다, 이루다, 막힘없이 통하다.
權 (저울추 권/권세 권): 권력이라는 뜻도 있으나,
* 여기서는 '상황에 따른 유연성(임기응변)' 혹은 **'권도(權道)'**를 의미합니다.
- 능병기(能秉機): 세상의 변화나 사건의 핵심(機)을 정확히 파악하고 자기 손안에 쥐는 통찰력
- 달권(達權): 정해진 규정이나 과거의 방식(經, 경도)에만 집착하지 않고, 현재 상황에서 가장 최선의 결과를 내기 위해 수단을 변통할 줄 아는 실행력을 말합니다.
인지적 유연성 (Cognitive Flexibility)
능병기달권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인지적 유연성의 정수입니다. 이는 고정 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상황의 변화에 따라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수정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장자가 말한 '정해진 마음(成心)'을 버리고 세상을 '보이는 대로' 보는 태도가 바로 이 유연성의 기반이 됩니다.
동적 역량 (Dynamic Capabilities)
급변하는 시장 환경에서 기업이 자원을 재구성하고 프로세스를 변경하여 경쟁 우위를 확보하는 능력을 동적 역량이라고 합니다. '능병기'가 시장의 트렌드를 읽는 것이라면, '달권'은 그에 맞춰 비즈니스 모델을 과감히 수정(Pivot)하는 경영 전략과 맥락을 같이 합니다.
역사학: 권도 (權道)
동양 정치사상사에는 '경(經, 변하지 않는 원칙)'과 **'권(權, 상황에 따른 변통)'**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역사 속의 위대한 통치자들은 대의명분(경)을 지키면서도,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는 '권도'를 발휘하여 실리를 챙겼습니다. 예를 들어, 태종 이방원이나 조조와 같은 인물들이 비판 속에서도 '능병기달권'의 화신으로 평가받는 이유입니다.
결국 능병기달권은 **"원칙을 알되, 그 원칙이 현실의 발목을 잡지 않게 하는 고도의 지적 수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놀이는 문화의 한 요소가 아니라 문화 그 자체가 놀이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
- 요한 하위징아 <호모 루덴스>
놀 때, 우리는 그 대상과 가장 일치된다. '소요유'는 장자 사상의 핵심이다. 대상과 나 사이에 어긋남이 없이 꽉 맞는 상태를 옛사람들은 천인합일, 물아일체라고 표현했다.
자유의 경지에 이른 자
자유의 경지에 도달한 인격을 장자는 지인, 신인, 성인으로 제시한다.
지인은 자신己이 없다. 기는 감각 경험 세계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자신을 표현한다. 아직 학습 과정을 거치지 않아서 보편적 이념이나 가치에 스며들기 이전의 자신을 표시한다. 경험 세계에 있는 자아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인은 공이 없다. 신인은 공적에 연연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가장 높은 수준의 인격은 자신이 공의 세워도 그것을 자신의 것이라 내세우지 않는다. 노자가 말한 공성이불거(功成而弗居), 공을 세우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성공한 사람들에게 가장 큰 적은 성공의 기억이다. 성인들은 그저 '그냥 할 뿐!'이다.
성인은 이름이 없다. 명예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저 천지자연의 운행 원칙과 우주 대자연의 변화를 잘 따를 뿐이다. 대학에 들어온 이후 큰 변화가 없는 학생들은 그저 대학에 들어오는 것이 목적이었을 뿐이다. 그들은 대학생이라는 이름이 다였고 그 이름에 갇힌 것이다.
* 고시 합격생이 '고시 합격'이라는 공에만 갇혀 있으면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일도 해낼 수 없다.
사유의 불철저성
장자는 도와 기에 대해 각각이 무엇인지 해명하거나 정의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 관계에 대해서도 해명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일상적인 생각과 철학적인 사유가 분명히 구별되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을 일상과 분리되지 않고 깊이 연결된 철학이라고 상찬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것을 사유의 불철저성으로 받아들입니다. 그 결과 과학적 사유를 발전시키지 못했고 기술적 문명에서 과학적 문명으로 도약하는 과정이 뒤처져 결국 아편전쟁으로 상징되는 치욕을 당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데까지 생각이 이르게 되었습니다.
- 서양과의 차이(공자와 플라톤)
참된 앎에 대하여 플라톤과 공자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공자는 정의를 내리는 것보다 태도나 활용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다) 반면 플라톤은 어떤 범주를 정의가 내려지는 정도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탐구해 들어간다. 공자는 지적으로 철저하게 탐구하는 대신 그 범주를 사용하고 부리는 것에 주목합니다.
공자 사상의 기본 범주는 인仁이지만 <논어> 어디에도 인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문장은 찾을 수 없습니다. 이를 개방적인 태도, 의미를 미리 정하지 않고 형성해가는 태도라고 좋게 볼 수도 있지만 저는 철학적 사유라는 점에서 철저하지 못하다고 받아들입니다.
서양철학의 중심 줄기라는 플라톤은 지식과 앎에 관해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한다. <테아이테토스>를 읽어보면 플라톤이 지식(앎)을 정의하는 데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아붓는지 알 수 있다. 그렇게 하여 그는 지식을 JTB, 즉, 정당화된 참된 믿음 Justifed Ture Belief으로 정의한다.
현실 세계는 유한하고 가변적이며 구체적이다. 이데아의 세계는 불변하고 보편적이며 사유의 세계다. 플라톤에게는 영원한 이데아이 세계라야 참된 세계다. 현상 세계는 참된 세계의 그림자일 뿐, 참되다고 할 수 없다. 가변적인 현상 세계를 아는 것은 그냥 억견臆見doxa(근거가 빈약한 감성적, 경험적 지식)라고 하지, 인식 episteme이라고 하지 않는다. 플라톤에게 인식은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앎을 말한다. 현실 세계를 벗어나 참 세계로서의 이데아를 인식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래야 인간은 영혼을 승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도가
도가의 수양은 결국 세계를 보고 싶은 대로 보거나 봐야 하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대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주관적인 사심이 개입된 상태는 그 사심이 시키는 대로 볼 수밖에 없으므로 봐야 하는 대로 보거나 보고 싶은 대로 볼 수 밖에 없다. 대개 마음은 주관적인 가치의 결탁으로 되어 있다. 사심이라고 하는 주관적으로 결탁된 가치 덩어리는 사람을 정해진 마음에 갇히게 한다. 도가 훼손된 상태는 바로 정해진 마음에 갇히는 지경이다. 오상아는 바로 가치로 결탁하여 정해진 마음에 갇힌 자신을 장례 지내야 한다는 것이다.
"미끄러지는 빛은 성인이 도모하는 바이다. 특정한 쓰임새를 따르지 않고, 평상의 일에 깃든다."
이명以明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말이다. 시작이라고 해도 그 시작 이전의 단계가 있을 것이고, 그 이전의 이전인 단계가 있을 것이다. 무한히 소급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있음과 없음은 경계가 사라지고, 서로 한쪽을 향해 미끄러져 스묘드는 인식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존재하는 것에 비-존재성으로 이탈하려는 의지를 부여한다. 개념으로 묶이지 않는 생명력과 탄성을 갖게 된다. 삶을 삶으로만 의식해서 삶이 충실해지는 것보다
'삶의 멸망'인 죽음을 삶 속으로 끌고 들어옴으로써 삶에 탄력을 부여해야 삶이 더 충실해지는 이치와 같다. 죽음을 의식하지 않는 삶은 콘크리트처럼 굳은 관념 덩어리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 사랑을 표현할 때도 자신이 생각한 사랑의 관념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표현에 사랑이 아닌 부분이 있는지 돌아보고 의심하면 더 사랑을 잘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장자의 견해다.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의심해보는 절차가 없다면 익숙한 관념의 표출 이상이 되지 못할 것이다. 아펭 나왔던 이명과 함께 생각해보면 좋다.
장자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만큼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 자기한테 설명할 수 있는지 꼭 살펴봐야 한다. 자기를 바라보는 능력도 덩달아 올라갔는가? 사람들은 장자에 대해서 조금씩 알게 되면서 그것을 자기가 할 줄 아는 사람이 된 것처럼 착각한다. 또 이렇게 착각하면서도 그것을 큰일이라고 느끼지 않는 것은 영혼이 게을러지고 망가졌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것이 물어지지 않은 채로 하는 어떤 공부도 다 소비적인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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