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1. 개국

 

적이야 무찔러 버리면 그만이지만 동료들로부터 고립되면 여간 곤란한 게 아님을 뼈아프게 경험한 것이다. 그렇게 전투와는 다른 정치적 처신법을 배워갔다.

 

 

2.  태조, 정종 실록

 

- 태조가 그렇다고 항상 배후 역할만 한 것은 물론 아니다. 자신의 고유영역이라고 생각한 일들은 철저히 자기 구상대로 밀고 나갔다. 공신 책봉, 세자 책봉이 그랬고 불교정책이 그랬다. 개국 초기 땅과 백성의 열 중 하나가 절에 소속되어 있어 많은 사회문제가 발생했다. 태조는 이를 잘못된 운용에서 비롯된 것이지 부처의 가르침이 잘못된 것이라 여기지는 않았다. 

 

 

- 천도에 대한 하륜의 주장을 정도전이 반박했다. 정도전의 주장은 반대론들 중에서도 가장 논리적인 데다 하륜의 주장과 전면적으로 부딪히고 있다. 논쟁의 승자는 정도전이었다.

 

"이곳은 중앙에 위치하고 조운이 통하는 건 좋으나 자리가 좁아 무거운 데서 가벼움을 맞이하는 왕의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옛 도움으론 경주, 전주, 평양, 개경이 있으나 경주와 전주, 평양은 한 곳에 치우쳐 있습니다.

 

사람에게 잘 다스림과 그렇지 못함이 있지만 땅에는 성하고 쇠하고가 없음을 중국 역사의 시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중국은 이제까지 수많은 나라가 일어서고 망하고를 거듭했으나 도읍은 관중, 금릉, 낙양, 연경뿐이었음이 이를 보여줍니다. 새 나라가 세워졌으나 나라의 터전이 아직 굳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백성의 힘을 길러야 할 때입니다.

 

지금 지기(땅의 기운)의 성쇠를 말하는 자들의 말은 다 옛사람들의 말을 전해 들은 것이며 신이 드리는 말씀도 옛사람이 겪은 것이옵니다. 술수를 하는 자의 말은 믿을 수 있고 선비의 말은 믿을 수 없겠나이까? 깊이 헤아리소서."

 

 

 

 

3. 태종 실록

 

자신의 처가인 민씨가에 이어 아들 세종의 심씨가마저 박살 내버린 태종, 그는 왜 이리 외척에게 가혹했을까? 아무래도 계모인 신덕왕후 강 씨에 대한 기억이 강렬했던 때문으로 보인다. 아버지 태조를 꼬드겨 개국에 공이 큰 전 부인의 장성한 아들들을 제치고 자신이 낳은 어린 아들을 세자 자리에 앉혔던 그녀다. 그녀에 대한 복수도 잊지 않아서 태종은 신덕왕후 강 씨를 태조의 첩으로 격하시켰다. 이에 그녀의 무덤도 능에서 묘로 강등되었다.

 

 

이렇게 태조를 도와 조선을 연 신진 사대부들의 구상은, 정도전의 개혁을 거쳐, 태종대에 와서 본격적으로 실현되기에 이르렀다. 사실 이때 마련된 정치제도 중 몇몇은 오늘날 보아도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언관들은 물론, 대신들까지 직언을 아끼지 않는다거나 모든 정책 결정 과정을 남김없이 기록하여 후세의 평가를 두려워하도록 했다. 

 

 

태종은 왜 양면적인 얼굴을 보여주는 걸까? 그것은 그가 철저히 현실주의자이기 때문이다. 이상도 명분도 철학도 그 무엇도 현실보다 우위에 설 순 없다고 판단했다. 왕이란 우월한 지위와 카리스마 뛰어난 언변과 연기력, 제기되는 사건의 현재는 물론 미래의 파장까지 읽어내는 탁월한 판단력을 무기로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방법을 택해 정국을 자기 의도 대로 끌고 나갔다. 

 

 

사실 태종은 부패 문제와 관련해서는 하륜뿐만 아니라 다른 공신들의 경우에도 관대히 대했다. 그러나 불충은 사소하다 할지라도 용서하지 않았다.

 

하륜은 용서받았지만 이숙번은 용서받을 수 없었던 결정적 차이, 그건 그의 젊음이었다. (하륜은 태종보다 스무 살 위다.)

 
- 다음은 어느 날 태종이 조영무에게 한 말이다. "달래서도 마음을 움직일 수 없고 위엄으로도 굴복 시킬 수 없는 이는 오직 경뿐이오."
죽는 날까지 그 흔한 뇌물 시비 한 번 없었을 정도로 자기 관리에도 철저했다. 무장 출신들을 깔보는 경향이 강한 사관들도 그의 졸기에는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겼다. "소박, 진실하고 바른말 잘하며 공정했다."
 

 

4. 세종, 문종 실록

 

황희, 맹사성의 투 톱 시절을 보면 보수적인 황희가 세종을 보완, 견제하고 단호한 황희를 신중한 맹사성이 보완, 견제하는 구도라고나 할까?

 

 

거침없고 분명하지만 즉흥적이거나 감정적이지는 않았다. 그의 의견은 늘 원칙과 현실사이의 적절한 지점에 있었다. 세종이 이르기를 "분분하던 논의도 그가 개입하면 정리되곤 하니 내 어찌 크게 쓰지 않을꼬?"

 

 

세종이 황희를 이르기를 수신제가엔 흠이 있지만 치국평천하를 하는 데엔 꼭 필요한 인물이라 하였다. 황희는 혁신적인 세종의 견제자이자 보완자 역할을 했다. 늘 새로운 법을 만들어내는 세종을 홀로 강력히 저지하여 포기시킨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이런 경우 대개 지도자는 멀리하기 쉬운데, 오히려 중용함으로써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한 세종, 참으로 엄청난 거인이지 않은가.

 

 

누구보다도 부지런하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하며 토론을 앞세우는 지도자, 끊임없이 생각하여 새로운 일을 만들어내고 뚝심 있게 밀어붙이는 임금. 절로 경외심이 일지 않겠는가? 그렇게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세종의 카리스마는 형성되었다.

 

 

- 묘호에 대해서는 정인지와 호조의 아들 허후의 문제제기가 있었다. "세종은 역대로 중흥을 했거나 창업을 한 임금의 묘호입니다. 대행대왕께서는 이 같지 않으니 문종으로 고쳐서 덕행을 기록하게 하소서."

 

문종이 말하기를 "세종이라 한다고 선왕의 덕행을 누가 알지 못하겠소? 더욱이 북방에서의 공이 있으니 세종이라 일컬음이 옳지 않겠소?"라고 하였다. 

 

 

 

5. 단종, 세조 실록

 

- 왕은 어렸으나 도망치려는 모습이나 치기 어린 모습은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다. 배우는 자로서의 겸허함을 잃지 않으면서 소년 임금 단종은 한 걸음씩 성장해 갔다. 그렇게 몇 년만 지나면 성년이 될 것이고, 그때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지 않겠는가? 그러나 세상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 유사한 방식으로 집권한 할아버지 태종과의 차이가 여기에 있다. 태종은 공신들을 우대하면서도 힘이 너무 커진다 싶으면 가차 없이 제거했고, 심지어 자신이 왕이 되는데 가장 공이 큰 처가를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보고 박살 내버렸다. 반면 세조는 일관되게 공신을 우대했다. 외척을 경계하기는커녕 공신 중의 공신인 한명회를 세자의 외척으로 끌어들이기까지 했다. 신하들과의 관계에선 태종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세조의 왕권이 강력해 보였지만 궐을 벗어나면 공신들의 세상이었다.

 

 

 

- 수령고소금지법은 세종 때 제정되어 많은 문제를 일으켰고 여러 번 개폐 논의가 있었음에도 유지되어 온 법인데 세조는 즉위하자마자 일언지하에 폐지한다. 몇 해 뒤에 다시 이의 시정을 요구하는 주장이 있었다. 관찰사에게 징계를 맡기고 징계가 제대로 되지 않을 시엔 관찰사에게 책임을 지우자는 말이었다. 그러나 세조는 "너는 하나만 아는구나 수령은 여럿이고 관찰사는 한 사람인데 감당할 수 있다고 보느냐? 여러 말 말라."라고 말하였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분대를 파견해 수령들의 비리를 감찰했다.

 

 

- 유자광은 자신이 좌천되었다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지금은 좌천에 그쳤으나 종국에는 자신을 제거하리란 판단을 했다. 상황 판단은 옳았으나 상대를 과소평가한 탓인지 성급한 움직임을 보인다. 임금과 원상들로부터 주시받고 있는 상황인데 서둘러 측근을 조직하기 시작한 것. 

* 원상(院相): 조선 시대 왕이 죽은 뒤 어린 왕의 즉위로 섭정이 이루어질 때, 임금을 보좌하여 정무를 맡아보던 임시 관직

 

 

 

- 신숙주는 기다렸다는 듯이 준비해 온 행동을 개시했다. 행동에 들어간다는 전갈을 받은 세조는 크게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라는 그 강함에 있는 것이다. 옛말에 이르기를 하루에 백리씩 넓혔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또 덧붙이기를 "신숙주를 쓰는 것은 이것에 그치는 게 아니다. 한 손가락만 쓰고 아홉 손가락이 아직 남았음이니 그 쓰임이 무궁할 것이야"

 

 

 

7. 연산군일기

 

세종의 준비 없이 갑작스레 보위에 올랐던 경험은 세자 교육에 대한 중시로 나타났다. 왕자 시절의 경험은 왕자들에게 능력발휘의 길을 열어주게 했고, 이는 그들의 정치세력화를 초래했다. 그 자신이 형제들과 권좌를 다투었던 태종은 자식들 간의 불화를 극력 경계했으나, 우애가 깊었던 세종은 자식들도 다 자신처럼 그러려니 했던 것이다. 그 결과 왕실은 다시 피로 얼룩지고 말았다. 세조는 아버지 세종의 정치를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한편으론 존경스럽게 생각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갑갑함을 느꼈다. 

 

성종기의 정치는 성종 자신의 경험보다 신하들의 경험이 일차적으로 투영된 정치다. 신하들은 유교정치의 부활을 목표로 어린 성종에게 주입식 군주수업을 시켰고 성종은 신하들의 의도대로 유교적 소양으로 무장한 도학군주로 성장했다. 이렇듯 전대의 경험이나 군주가 되기 전의 경험은 새 임금의 정치에 중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연산이 가라사대 정문형이 정승 일을 맡을 만한지 그 역량을 물었는데 이에 대해선 말하지 않고 대간의 반대만 근거로 삼아 말하니 내 말은 가볍고 대간의 비판은 두렵다는 것인지 물었다. 

 

회암사의 도첩이 없는 중들을 보고는 내 불교를 숭상하진 않지만 중도 사람인데 어찌 하루아침에 고칠 수 있겠느냐 법을 너무 각박하게 쓰면 소요가 이는 법이다. 일본에서 원숭이가 보내왔을 때의 답변은 선왕 때에 그들이 앵무새를 바쳤건만 값만 비싸고 나라에 아무런 이득이 없었다. 근래에 구리나 쇠처럼 필요한 물품도 값을 대기가 어려워 공사 무역을 중지시켰는데 하물며 무익한 짐승이겠느냐 돌려보내거라. 

 

연산은 폭압을 통하여 황제적 권력을 구축하였다. 그런데 중국의 경우를 보면 연산보다도 가혹한 정치를 하고도 후세에 명군으로 평가받는 이들이 있다. 그런 황제들의 공통점은 신하들에게 가혹했지만, 나라를 튼튼히 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켰다는 점이다. 그러나 연산에겐 그렇게 강화시킨 왕권을 가지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무엇을 하겠다는 설계가 없었다. 넘볼 수 없는 왕권을 구축하는 것 그 자체와 강력한 왕권을 마음껏 누리는 것만이 지상목표였다. 

 

 

 

8. 중종실록

 

그는 단지 성실했을 뿐이었다. 왕좌 유지라는 최우선 목표만 있었지 장단기 구상도, 일의 선후도 일관된 원칙도, 책임성도 없었다. 자신은 해어진 옷을 기워 입을 만큼 검소했지만, 자식들의 호화 사치에는 대간의 잦은 문제제기에도 간섭하지 않았다. 백성들의 어려운 생활과 병력의 감소를 걱정하면서도 공신들은 끝까지 손대지 못했으며 학교교육의 낙후함과 선비들의 공부하지 않는 풍조를 염려하면서도 사화를 직접 주도한 왕이었다. 

 

39년 간이란 기나긴 세월 동안 권좌를 지켰으면서도 제자리 뛰기만 하다 떠난 중종. 조광조라는 제대로 된 선택을 해놓고 개혁보다 왕좌유지에만 골몰했기에 총체적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조광조에게 몰아준 힘의 일부를 정광필에게 주었으면 어땠을까? 조광조와 그의 그룹을 개혁엔진으로 삼고 정광필로 적절히 제어하면서 운행했더라면 조광조 이후의 정치는 특정인에게 힘 몰아주기와 그 특정인의 권신화에 특징이 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권 세트 - 조선사 | 쿠팡

쿠팡에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권 세트 구매하고 더 많은 혜택을 받으세요! 지금 할인중인 다른 조선사 제품도 바로 쿠팡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www.coupang.com

 

 

9. 인종, 명종실록

 

왜 임꺽정은 도적이 되었는가? 당시 사관의 논평을 보면 사태를 정확하게 읽고 있다. 그렇지만 세상은 그 후로도 달라지지 않았다.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이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데 원인이 있다. 지금의 재상들은 타미오가 풍습을 이루어 끝이 없기 때문에 수령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권세가를 섬기느라 못하는 일이 없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 도적이 되지 않고는 살아갈 길이 없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나도 나도 스스로 죽음의 구덩이에 몸을 던져 요행과 겁탈을 일삼으니 이 어찌 백성의 본성이랴?

 

진실로 조정이 청명하여 재물만을 탐하지 말고 어진이를 수령으로 가려 뽑는다면 칼을 든 도적들이 송아지를 사서 고향 땅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군사를 거느려 추적하여 붙잡으려고만 한다면 붙잡는 대로 또 뒤따라 일어나 장차엔 다 붙잡지 못할 것이다."

 

 

이황과 조식은 여러모로 다른 사람

 

이황이 학문 자체를 좋아하여 깊이 파고드는 유형이라면 조식은 핵심을 체득하고 실천을 중시하는 유형

 

이황이 자신의 생각을 친절하게 상세히 설명하는 편이라면 조식은 간결하게 비유나 풍자로 표현하기를 좋아했다. 이황은 현실정치에 몸담으면서도 시사문제는 애써 피하려 했고 조식은 현실정치를 거부하면서도 세상사에 촉각을 곤두세운 채 분개하고 비판했다.

 

퇴계가 고요히 흐르는 물이라면 남명은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 그렇게 다른 두 사람이었다.

 

조식의 칼의 글귀 : 內明者敬 外斷者義

안으로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결단케 하는 것은 의이다.

 

(210320 추가) 당대의 대학자들답게 둘은 끝까지 서로에 대해 나름의 예를 지키며 표 나게 대립하지 않았지만 뒷날 제자들은 상대의 스승을 비판하며 격렬히 대립하게 된다. 주자학을 한 단계 끌어올린 것으로 평가받는 퇴계 철학은 이후 조선 철학의 방향을 결정지었을 뿐 아니라 일본 주자학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유성룡, 김성일, 조목, 기대승, 우성전, 송언신 등 그의 제자들은 퇴계학파를 형성하여 나중에 동인-남인의 중추를 이루게 된다. 

 

남명학파를 형성한 조식의 제자들로는 정인홍, 김우웅, 곽재우, 최영경 등이 있다. 실천을 중시하는 조식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그들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적극 활약했다. 동인-북인의 중추를 이룬 그들은 광해군과 함께 집권에 성공했으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실각하면서 괴멸되다시피 했다. 게다가 조식도 이렇다 할 이론적 저술을 남겨놓지 않아서 남명학파는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10. 선조실록

 

- 고니시와 가토 사이의 불화와 둘의 성향에 대한 정보는 조선 측에도 많이 전해져서 고니시에 대한 신뢰도가 상당히 높아져 있었다. 그러나 고니시가 누구인가? 전쟁에 임하면 전쟁의 논리에 충실하고, 협상에 임할 때도 전쟁의 논리를 적절히 사용할 줄 아는 냉철한 무장 아닌가? 개전과 함께 부산성, 동래산성을 함락한 뒤 무자비한 살육 잔치를 자행(기선제압)한 그다. 

 

 

 

- 호종한 이들은 어찌 됐든 함께 피란 다닌 이들! 그 때문에 자신보다 도덕적으로 특별히 나을 게 없다는 동류의식이 작용한 것이 아닐까? 어쨌든 뻔뻔한 왕고 조정 대신들로 인해 구국 영웅들은 죽은 뒤에도 걸맞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를수록 그들의 고귀한 정신과 활약상은 점점 더 빛을 발해 오늘을 사는 우리의 가슴까지 뜨겁게 달군다. 

 

 

 

11- 광해군일기

 

세자 시절의 아픈 경험으로부터 조금만 자유로웠다면 빛나는 외교에서 보이듯 도그마에 사로잡히지 않는 열린 이성과 현실감각, 그리고 유려한 솜씨로 내치도 성공을 거두었으리라, 그런 상황을 만든 부왕 선조의 책임이 크겠지만 누굴 탓하랴. 극복하지 못한 자신의 몫인 것을.

 

 

 

12. 인조실록

 

- 애초에 광해군은 여러 차례 이런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이들은 왜적들과는 다르다. 어찌 꼭 한 성을 함락한 뒤라야 몰려오겠는가? 의주들의 성을 비껴두고 곧바로 서울로 들어오면 어찌할 것인가? 중도에서 막을 계책을 마련하라."

 

그러나 비변사는 별다른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임진왜란 때에도 비변사는 적이 수군이 강하므로 육지에 끌어들여 싸우자는 대책을 내놓았다. 팔기군을 대하는 비변의 전략도 임진왜란 때와 마찬가지로 통념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기병이라 야전에 강하니 성에 들어가 방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광해군의 우려대로 성을 놔두고 진격해 오면 어찌할 것인가? 그에 대한 나름의 해답이 강화도와 남한산성이었던 것이다.

 

"저들은 먼 길을 왔으니 오래 버티지 못할 거야. 정묘년에도 저들이 왜 돌아갔겠어? 장기전이 될까 봐 두려웠던 거거든 어떻게든 되겠지."

 

정묘년에 적장 아민은 겨우 3만여의 군대만 이끌고 내려왔다. 그 때문에 그들은 고립의 위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중도의 성을 함락해 가며 내려왔다. 깊숙이 들어와 장기전을 할 만큼 무모하지도 않았다. 겁을 주고 유리하게 협상을 이끌어 내는 게 전략이었다. 그러나 병자호란 때는 달랐다. 군병 수만 해도 10만에 이르렀다. 그들은 진군 도상에 있는 성들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공격을 하더라도 일부 병력만 떼어내 담당케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때문에 진격 속도는 놀라웠다. 

 

- 인조는 생각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불길에 뛰어들다니 암만해도 믿어지지 않아. 실수로 화약이 터진 것이 아닐까? "듣자 하니 담배를 피우려 했다던데."

 

김상용의 두 아들이 상소해 당시 상황을 고했다. 김상용이 자결하기 전에 주변을 물리치고 불을 가져오라 하였으나 주인의 뜻을 알고 노복이 미적거리자 "남초를 피우려고 하느니라"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불을 가지고 오자 화약에 불을 붙인 것이다. 강화에 있던 윤방을 비롯해 많은 사람이 증언하고 나서야 마지못해 김상용의 조제弔祭를 허락했다. 

 

구차하게 살아남은 왕의 열등감이라고나 할까? (김상용은 김상헌의 형이다. 왕은 김상헌도 탐탁지 않게 여겼다.)

 

 

 

- 최명길이 말하길 "이혼을 허락하면 아니 되옵니다. 그러면 더는 속환을 하려 하지 않을 것이고 수많은 부녀자는 이역의 귀신이 되고 말 것이옵니다. 선조 때도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사오나 유성룡, 이원익 등 당대의 명경 석유들도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사옵니다."

 

그러니 이때는 이의를 제기하는 이가 속출했다. 아들 속환비로 1,500금을 써서 물의를 일으킨 이성구는 말했다. "예전에도 역적의 딸을 이혼시킨 전례가 있었나이다. 이들의 경우는 몸을 더럽혔으니 그보다 더 심한 경우이옵니다. 이혼을 허락하시옵소서."

* 초기 속환은 1인당 10냥 수준이었다. 포로들이 목숨 걸고 탈출해 와도 붙잡아 돌려보내야 했으니 돌아올 수 있는 길은 속환뿐이었다. 최명길은 힘없는 백성들이 속환되지 못할 것을 우려해 청 측에 100냥을 속환가 상한선으로 정하자고 제안했으나 실제로는 고위 관료들이 거액을 지불하는 바람에 잘 지켜지지 않았다. 

 

 

끝내 이혼을 허락하지는 않았지만, 사대부들은 모두 새장가를 들었고, 재결합하는 이는 없었다.

 

사관은 이혼에 반대한 최명길을 이렇게 논하고 있다. "비록 본심이 아니었다 해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절의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가? 아 백 년 풍속을 무너뜨리고 삼한을 들어 오랑캐로 만든 자는 명길이다. 통분함을 금할 수가 없도다."

 

살아남은 사대부들의 뻔뻔함이 이와 같았다. 

 

 

그냥 비방만 하기에는 그의 행적이 아무래도 예사롭지 않았는지 졸기에다 이런 총평을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위급한 때를 만나면 앞장서서 피하지 않았고 일에 임하면 칼로 쪼개듯 분명히 처리하여 미칠 사람이 없었으니 역시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이라 하겠다."

 

행동이 따르지 않은 채 목소리만 컸던 사대부들이 대다수였던 당시에 신념대로 살고 행했던 김상헌의 존재 또한 우뚝하다. 비록 그가 목숨 바쳐 지키고자 했던 대의가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의 책임질 줄 아는 절개와 또한 책임질 줄 아는 최명길의 현실주의가 함께 계승되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의 조선은 최명길을 폄하하고 김상헌의 대의만 떠받드는 데로 나아가고 말았으니 조선의 불행이라 하겠다.

 

 

- 최명길은 확실히 시대의 병폐에 대해 동시대의 인물들보다 더 깊이 염려했고, 치유책을 찾으려 애썼다. 비변사 중심의 관제와 겸직이 많은 체제 등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비국이 국정을 주관하자 찬성, 참찬 등 의정부의 직책들은 병을 요양하는 자리로 전락하고 말았고 겸직이 많다 보니 서로가 책임지려고 하질 않습니다. 조종의 옛 법을 회복해 정령이 한 곳에서 나와야 기강이 설 것이옵니다."

 

 

 

- 최명길과 김상헌은 소현세자가 귀국한 직후 풀려나 돌아왔다.

 

 

 

- 조선을 둘러싼 정세는 또다시 요동치기 시작했지만 조선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후금은 여전히 오랑캐였고, 마음은 언제나 명나라였다. 그러나 '생각'만으로는 힘이 되지는 못한다.

 

지난날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새로운 전략과 전술을 강구했어야 설욕까지는 못하더라도 같은 치욕을 되풀이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생각은 언제나 생각만으로 남았다.

 

세계사적 전환기의 조선에 꼭 필요한 정치적 자질과 경험을 갖추었던 소현 세자다.

 

"명분만 좇다가 나라까지 망해보았으면 교훈을 얻고 달라져야 하지 않는가? 오랑캐라 천시하던 이들을 보라. 인구도 우리보다 적은데 거대한 중국을 집어삼켰다. 이들은 필요하면 결심하고 결심하면 준비하여 실천하다. 그렇게 북경이 장악되었고 순식간에 천도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또 보라 우리가 멸시했던 이들이 얼마나 유연하고 세련되게 한족의 민심을 얻었는 지를. 그뿐이 아니다 이들은 서양의 문물에 대해서도 열려 있다. 새 역법을 채택한 것도 그렇고."

 

 

인조는 창덕궁 대조전 동침에서 55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영광은 없이 오욕으로 얼룩진 26년 5개월의 세월이었다. 반정을 주도했을 만큼 나름의 리더십도 있었고, 잘해보리란 다짐도 있었다. 무엇이 문제였던가? 그는 한마디로 준비된 군주가 못되었다. 우선 그는 격변하는 세계 속에서 조선을 어떻게 끌고 가리라는 전략적 구상이 없었다. 그가 내세운 것들도 현실 앞에서 쉬이 바뀌고 만다. 스스로 뚜렷한 비전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우왕좌왕했다.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해 온 백성을 붙잡아 되돌려 보내야 한다는 현실에 눈물을 보이곤 했지만 그뿐이었다. 무엇보다도 인조는 개혁 의지가 없었다. 백성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개혁은 윗물을 맑게 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삼전도의 굴욕을 겪고 난 인조는 그렇게 와신상담과는 거리가 먼 생활를 했다. 안이한 인식과 대처로 전쟁을 부르고 도망가서는 남을 탓했으며 전쟁이 끝난 뒤에는 자기 대신 인질이 되어 떠난 세자를 질투하고 미워했던 왕이다. 여러모로 선조를 닮았는데 사실 선조를 훌쩍 뛰어넘는 왕이다. 패륜을 명분으로 광해군을 몰아냈지만 세자를 죽게 하고 며느리를 죽였으며 어린 친손자를 둘이나 죽게 하는 등 패륜에서도 광해군에 밀리지 않았다. 그런 왕에게 신하들은 묘호를 인조라고 지어 올렸다.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이름, 어쩌면 그의 잔혹함을 조롱하기 위해 신하들이 택한 역설은 아닐까?

 

 

 

13. 효종실록

 

- 그들은 과거의 문제를 직시하고 해법을 모색하는 대신에 과거의 체제를 더욱 강화하는 길로 나아갔다. 힘이 약해 금수와도 같은 오랑캐들에게 무릎을 꿇었지만 정신만은 무너지지 않았다고 자위했다. 왕은 바로 이 유자들과 정치를 해야 했다. 또한 그들로부터 정통성도 인정받아야 했다. 그 때문에 왕은 유자들이 요구하는 성실한 군주의 모습을 갖추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 정시영이라는 자가 부정출발해서 기를 뽑아가지고 왔다. 환궁하고 나서 왕이 명했다. "내 듣건대 병법에 이르길 북을 치면 백만의 군사가 앞을 가로막고 있어도 물러갈 수 없고, 징을 치면 금은보화가 산처럼 쌓여 있어도 나아갈 수 없다고 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군령이 엄한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열무 때 영을 어긴 정시영을 효시해 군법의 엄함을 알리도록 하라!"

 

 

 

14. 숙종실록

 

선왕께서 항상 송시열에 속은 것을 통탄해하시다가 바로잡으시어 겨우 시비가 정해졌는데 스승을 변무 한다고 하니 스승이 있는 것만  알고 군주가 있는 것을 모르는 자들이다.

 

스승만 알고 군명이 있음을 알지 못한 소이니 임금을 섬기는 도리가 이와 같아서야 되겠는가?

 

사대부들의 불만을 감수하고서라도 추진하려면 자기희생을 통한 명분이 필요하다. 선조 이래 계속되어 온 궁가의 절수에 따른 폐단은 여전했고 신하들도 여러 번 개혁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관한 왕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리고 왕비를 폐출하는 데서 보인 왕의 결단력은 정작 필요한 곳에서는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15. 경종, 영조 

 

경종

 

왕은 사적인 감정을 누르고 대계를 택했다. 어쩌면 진정한 우애 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세제를 내쳐버리면 종사는 어찌한단 말인가? 미우나 고우나 지금 왕실엔 세제와 나뿐이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권 세트 - 조선사 | 쿠팡

쿠팡에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권 세트 구매하고 더 많은 혜택을 받으세요! 지금 할인중인 다른 조선사 제품도 바로 쿠팡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www.coupang.com

 

 

 

영조

 

지난 4년에 연연하지 말자. 죄가 큰 자에겐 벌을, 작은 자에겐 관용을, 그리고 억울한 이에겐 신원을 베풀리라.

 

오명항은 명을 어긴 자도 꾸짖어 책망할 뿐 책벌을 가하지 않았다. 조명현이 이를 지적하자 이렇게 답했더랬다.

"나라가 태평한지 100년에 평소 군기가 느슨해졌는데 갑자기 형벌을 가하면 되겠는가, 원망만 살 뿐이다"

 

들으라 다들 상대에게 당습에 젖었다 하지만 자신들만 충이고 군자라 하지만 조선의 당은 충, 역, 군자, 소인의 당이 아니라 노론, 소론, 남인, 북인의 당이다. 이후에도 다시 지난 일을 들추며 당론 하는 자는 역률로 다스리겠다.

 

균역법시행 - 백성에게 만일 혜택이 있게 된다면 그 공을 경들과 나눌 것이고, 원망이 있게 되면 나 혼자 듣겠노라.

 

사도세자 : 호랑이가 깊은 산속에서 울부짖으니 큰 바람이 분다. 

 

동궁은 무엇을 뉘우치는지 물었는데 후회한다고만 하면서 그 내용은 말하지 않았다. 이는 남의 이목을 가리는데 불과하다.

 

 

왕의 기대와는 비록 달랐지만 나름의 장점은 많고 큰 흠은 없던 세자는 왕의 지나친 질책으로 인해 결격 사유가 큰 세자로 바뀌고 말았다. 1차적인 책임은 물론 괴팍한 아비인 왕에게 있다 하겠지만 세자에게도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그는 미래가 보장된 세자. 서럽고 두렵더라도 최대한 책잡히기를 피하는 길로 갈 수는 없었을 까? 서연도 열심히 하고 아무리 얼굴 보기 싫어도 임금이자 어버이이므로 오지 말라 해도 악착같이 찾아가 인사하고 야단을 치면 야단을 맞고 매를 치면 매를 맞고 그렇게 축적하며 때를 기다리는 것이 2인자의 길 아닌가?

 

 

17. 순조실록

 

홍경래의 난은 수백 년 질서에 커다란 파열구를 낸 것이다. 그러나 홍경래의 격문을 보면 조선의 근간인 왕조체제와 신분제, 유교질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문제 삼고 있지 않다. 당연히 대안 또한 거론하고 있지 않다. 한마디로 조선 사회를 대체할 비전을 갖고 있지 못했음을 반증한다 하겠다.

 

순조 역시 전략적 구상이 없었다. 시대의 요청에 부응한 그만의 정치적 비전을 갖지 못했다.

 

 

18. 헌종 철종실록

 

사림은 여러 차례의 사화를 딛고 대체할 수 없는 조선의 유일 지도 세력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건국 초의 유자들처럼 그들은 당당했고, 활력이 넘쳤으며, 이상 정치를 꿈궜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을 어떻게 이끌어갈지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을 보여주지 못했다.

 

선조시기 전면적 집권을 한 사림은 이내 분열하여 당쟁에 돌입한다. 당쟁은 그 시작부터 건강하지 않았다. 현실에 대한 진단이나 방도를 둘러싼 논쟁이 아니라 스승, 지역, 친소관계에 따른 분열이요 대립이었다.

 

변화된 세상, 새로이 드러난 현안은 관심 영역이 아니었다. 건국초의 건강함을 잃고 중기적 문제점이 커져가는 현실에 주목한 이는 율곡 이이 정도였다. 그러나 그의 외침은 당쟁이 밀려 무력한 독백이 되고 말았다. 임진왜란은 사대부 지배체제의 문제점을 남김없이 드러내 보였다. 끊임없이 자기 특권을 확대해 온 사대부는 무능하고 무책임했다. 조선을 지킨 건 대부분 나라로부터 제대로 대접받아보지 못한 이들이었다. 난 후의 수습은 전면적인 혁신을 동반해야 했다. 새로운 세력이 사대부를 대체하거나 사대부 자신이 뼈아픈 자기반성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구축해야 했다. 그러나 새로운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고 왕은 자기 자리 지키기에 급급했다. 

 

 

- 양반이 신분화되었다. 양반은 본래 조정의 동반, 서반을 가리킨다. 벼슬을 떠나면 양반이 아니므로, 적어도 3대에 한 사람은 급제자가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신분으로 변모하게 된 것. 사대부의 사는 유학을 공부하는 선비를 말하며 군역 면제는 관리, 다시 말해 문무 양반에 한한 것인데, 관리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사에 확대 적용되기 시작했다. 

 

그렇지 않은 유력자들은 군역을 지는 대신 군포를 내곤 했다. 중기 이후 군역은 군포로 내는 것으로 바뀌어가고 있었고 양반은 군포 납부마저도 면제되기에 이른다. 양인개병제라는 건국 때의 원칙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비현실적인 할당이 많았던 공납은 자연스럽게 방납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유력자들의 치부 수단으로 전락하면서 엄청난 폐단을 낳고 있었다. 

 

 

 

19. 고종실록

 

비록 별 탈 없이 넘어갔지만 조만간 더 강력한 외부 세력의 접근이 있으리라는 것은 중국이나 일본의 경험으로 보아도 자명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비는 보이지 않는다. 개항에 대한 고려도, 척사에 대한 다짐도, 논쟁의 흔적도 없다. 임진왜란 직전처럼, 호란 직전처럼. 아무런 대책 없이 그저 요행히 넘어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반봉건은 신분제의 타파와 삼정의 문란에 대한 개혁 주장 등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서울 진격과 간신 제거를 내세우고, 탐관오리 척결을 내걸어 실제로 행하기도 했지만 왕조 자체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았던데서 보듯이 농민군의 반봉건성은 철저하지 않았다 하겠다.

 

해산과 함께 흩어진 농민군은 유랑 생활을 하다 고종 33년(1896년) 왕비 시해와 단발령 실시에 항거해 일어난 의병에 합류한다. 그러나 양반들의 차별로 동학 세력은 의병에서 이탈하였다. 반외세 역량의 어이없는 분산이었다.

 

 

대원군의 성공요인은 무엇일까? 첫째로 그의 리더십을 들지 않을 수 없다. 대원군은 양인 시절부터 나라의 폐단들에 대해

충분히 살피고 개혁할 방도를 준비해 왔다. 마침내 권력을 손에 쥐게 되자 준비해 온 구상에 따라 전격적으로 해치워 나갔다.

 

사실 비변사 폐지, 경복궁 중건, 호포제, 서원 철폐 등은 어느 한 가지도 기득권의 저항을 우려해 눈치 보기를 했다면 역풍에 밀려 실패했을 사안들이다. 대원군은 기득권층이 전열을 정비할 틈을 주지 않고 명분을 앞세워 전격적으로 해치워나갔다. 비편사 폐지, 만동묘 폐지, 경복궁 중건 명이 불과 5일 사이에 나온 것이고, 양요 와중에도 경복궁 공사를 독려했다. 

 

조선사회의 특징 중 하나가 수십 년간 논의만 거듭하다. 용두사미로 끝나는 것인데 이에 비춰보면 대원군의 개혁은 더욱 빛을 발한다.

 

 

그러나 누구도 이루지 못한 대성공이었음에도 더 큰 성공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대원군이 실각과 함께 퇴색하고 말았으니 무엇이 문제였을까. 열강의 세계침략과 전 지구적 자본주의화라는 시대적 상황에 부응한 개혁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의 개혁이 100년 전, 아니 몇십 년 전만 됐어도 민생을 추스르고 국력을 키울 토대가 되었겠지만 때는 바야흐로 19세기 후반. 미리 준비가 안 돼 있었더라도 일전을 겨뤄본 병인양요에서 방향을 돌려야 했다. 명백한 전력 차이, 기술차이가 확인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고전 끝에 얻은 작은 승리에 도취하고 말았다. 


곧장 척화의 기치를 내리고 개항의 깃발을 올릴 수야 없었다 해도 하다못해 청나라식 동도서기라도 수용해 발전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고 달팽이처럼 자기 집에 틀어박혀 살 수 있다고 오판했다. 그것이 대단한 성공을 허무한 실패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개화당의 꿈은 왜 실패로 끝났을까? 그들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삼고 나라를 하루빨리 개혁해 부강하게 만들리란

사명감에 불탔다. 그러나 그들은 메이지 유신을 잘못 보았다. 메이지 유신은 오랜 존왕운동의 연장으로 대중적 지지기반이 있었으며, 저항을 막아낼 자체의 무력이 있었다. 그러나 김옥균 등은 대중의 지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개화파가 권력을 잡기만 하면 모든 것이 되리라 판단) , 자체의 무력도 없이 일본에만 기댔다. 때문에 일본 측이 자신의 오판(청프 전쟁 때문에 조선에 크게 개입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을 깨닫고 판을 접는 순간 실패하고 만 것.

 

 

그런데 만약 성공했다면 과연 자신들의 구상대로 나라를 이끌고 갈 수 있었을까 그들은 일본이 이룬 성과에 대한 동경과 겉으로 드러난 그들의 호의에 사로잡혀 일본의 속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개화정책을 펴는 데 필요한 막대한 비용은 김옥균의 구상대로 일본 차관에 의존했을 터, 조선은 일본에게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예속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부분이 그들이 지녔던 높은 애국심(일신의 안일이 보장된 명문가의 자제들이 목숨을 걸고 의기투합한 점)과, 강령에서 긍정적인 요소(유교 중심, 중화 중심주의에서 탈피, 사민평등을 내세운 근대적 개혁)들이 보이는데도 후한 평가를 망설이게 한다.

 

 

 

- 리훙장(이홍장)의 출병 결정을 가져온 것은 일본 쪽 동향(일본군이 출병해 친일 정권을 세울지 모른다는 우려)이었다. 출병은 그렇다 치고 대원군 납치는 무엇 때문일까? 일본에 개항을 하고 일본의 영향력을 키운 주역은 오히려 왕비 쪽 아닌가? 그런데도 리훙장은 대원군의 제거를 택했다.

 

대원군은 개항과 그에 따른 개화 조치들을 전면 부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리훙장은 그런 대원군이 조약의 당사자인 일본의 강한 반발을 불러 예기치 못한 사태로 이어질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청나라가 아니라 일본이 대원군을 납치해 갈 우려도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20. 망국

 

- 잃어버린 10년

열강 간의 세력 균형이 유지된 갑신정변 이후의 10년(1884~1894)은 돌이켜보면 조선이 스스로 개혁하고 근대화의 길을 열어갈 소중한 기회였다. 내부 여건도 좋았다. 먼저 개화의식이 크게 성장했다. 경복궁에 처음 전깃불이 밝혀졌는 가 하면 개항지나 서울 곳곳에 양옥집이 늘어났다. 이렇듯 겉으로는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지만, 조선은 이 10년 동안 크게 달라지지 못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개혁 주체가 제대로 준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개화, 근대화에 대한 막연한 동의만 있었지, 확고한 신념도, 전략도 없었다.

 

왕과 왕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개화가 아니라 왕실의 유지였다. 개화에 대한 신념과 나름의 전망을 가졌던 세력이라면 급진 개화파를 들 수 있겠는데, 지나치게 일본에 주장에 기울어 있었고, 갑신정변의 실패와 함께 몰락하고 말았다. 온건개화파들은 강한 의지나 전략이 부족했다. 

 

 

-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거치며 막부 체제를 해체해 중앙집권적 천황 체제를 구축하고, 서양식 병제를 도입해 징병제를 실시했다. 사범학교를 세우고 국민 교육을 목표로 학제를 마련했다. 금본위제를 채택하고 근대 은행을 설립하고 유학생을 파견, 외국의 서적을 수입 및 번역했다. 근대적 세제 개편으로 재정을 튼튼히 했고, 무기와 함선을 구입하고 무기 공장과 조선소도 세웠다. 개화와 부국강병을 동시에 추구했다. 개화의 주체들을 길러내고 개화사상을 전국화했으며 군사력을 늘리고 경제의 기초를 닦았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짧은 시간에 거둔 놀라운 성과로 일찍이 어떤 나라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간 것이다. 후발 주자인 조선에게 일본의 성공 사례는 귀중한 이정표가 되어줄 터였다. 그들의 성공 요인과 과정에 나타난 병폐들을 연구해 조선이 가야 할 길을 찾아야 했다. 그런데 그럴 주체도, 그럴 지도력이 없었다. 조선의 개화는 단지 어설픈 흉내 내기에 지나지 않았다. 국가 주도 개혁의 밑천이 되어야 할 재정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기본 조세는 물론 각종 무명잡세로 백성은 늘 등골이 휘었지만. 중앙으로 올라오기까지 중간에 새는 양이 더 많았다.

 

결국 개화와 근대화는 내정 개혁을 동반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개혁의 주체여야 할 위는 어느 것도 제대로 손대지 못한 채 구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구체제의 균열을 내는 일은 결국 아래의 몫이었다. (동학의 등장)

 

 

- 전주성을 나온 농민군은 전봉준이 이끄는 부대와 김개남이 이끄는 부대로 나뉘어 여러 고을을 순회했다. 이르는 곳마다에서 농민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경복궁이 일본군에게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전라 감사 김학진은 전봉준에게 사람을 보냈다. 

 

한편, 보은집회 이후 호남의 전봉준 세력과 거리를 두어온 최시형(전봉준 세력이 교조신원 보다 정치적 목적 실현에 관심이 더 크다고 판단했다)은 이즈음 아래로부터의 격렬한 요구에 직면(척왜)해 있었다. 최시형은 결국 교인들을 총동원해 전봉준과 협력할 것을 결정하여 충청 지역의 동학교도까지 총궐기하기에 이른다. 

 

 

- 진압에 나선 일본군의 속대는 향후 방해자가 될 동학세력을 제거하는 데 있었다. 실제로 이때 일본군에게 내려진 본국의 훈련은 동학당을 혁파하고 그 화근을 소멸함으로써 동학당이 다시는 일어서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고종 32년인 1895년 1월 즈음에 이르러서는 대부분의 농민군이 진압 혹은 해체되었다. 20만 명이 넘는 농민군이 살해되었고, 이 가운데는 조선 양반이 조직한 민보군에게 죽은 농민군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 동학의 한계

적극적으로 이웃 고을과 연계하려 한 움직임도, 여러 고을을 통일적으로 묶어내려 한 시도도 없었다. 전국적인 봉기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개별적이고 고립적인 봉기들의 릴레이였을 뿐이다. 그리고 관아를 습격하고 아전, 토호들을 거침없이 죽이면서도 수령은 욕보이기만 했을 뿐, 약속이나 한 듯이 한 고을에서도 죽이지 않았다. 그토록 분노가 컸으면서도 문제의 근원은 보지 못한 채 전근대적 인식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수령은 임금이 임명한 사람이니 죽이지 못함)

 

이런 이유로 인해 지배 세력이 느낀 공포는 제한적이었겠지만, 조선왕조의 체제와 질서가 한계에 직면했음은 분명해졌다. 

 

 

- 민 씨 정권이 취했던 정책들은 또 어떤가? 개화라는 큰 방향을 잡기는 했으나 장기적 비전을 갖지 못한 채 우왕좌왕했다 내정 개혁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잦은 궐내 잔치와 굿판. 누구 못지않게 서양 세계의 실상을 많이 알았고, 그런 만큼 개화된 모습을 보일 법했지만, 굿이나 무당에 의지하는 전근대성을 끝내 버리지 못했다. 임오군란 당시 충주로 피신했을 때 찾아와 복귀 시점을 예언했던 무당을 총애해 진령군에 봉하기까지 했다. 금강산 대굿판을 열고 북관왕묘를 짓도록 만드는 등 영향력이 만만찮았던 진령군은 왕비가 죽고 난 뒤 지석영의 탄핵을 받아 사형에 처해졌다. 

 

* 금강산 대굿판을 연 것은 허약했던 세자(훗날의 순종)의 병을 고치기 위함이었고 북관왕묘를 조성한 것은 진령군이 스스로 관우의 딸이라 칭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북관왕묘가 완성된 후 고종과 명성황후는 이곳을 자주 찾아 점도 치고 굿을 하였다. 진령군이랑 봉호는 진실로 영험하다는 뜻으로 고종이 직접 지은 것이라 전한다. 

 

진령군은 명성황후의 비호 아래에서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권세를 휘둘렀다. 보다 못한 사간원에서 규탄 상소를 올렸으나 고종은 상소를 올린 안효제를 귀양 보냈다. 안효제는 귀양에서 풀려난 뒤 낙향하였다. 한일병합 이후에는 만주로 이주하여 한인촌 조성 등에 노력하다 1916년 병사한다. 

 

 

- 독립협회의 주요 성원들은 황제와 달리 러시아를 더욱 경계했다. 아마도 미국이나 일본 쪽 영향을 받은 이들이 많았던 때문이리라. 이런 인식의 차이에 더해 군중과 결합해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는 독립협회의 방식에 대해 황제는 크게 우려했다. 황제는 러시아 교관과 재정 고문을 해임하면서 서재필도 중추원 고문에서 해고했다. 독립협회에 대한 속내를 드러낸 조치였는데, 협회 회원들은 단지 외국인이라는 신분 때문으로 오해했다. 

 

 

- 대원군은 초기 10년 섭정 시절의 성공으로 평생을 백성의 존경 속에 살았고 그런 만큼 다양한 정치 세력의 러브콜을 받았다. 이에 대해 권력욕과 복수심에 사로잡힌 대원군은 누구와도 손잡는 무원칙한 행보로 일관했다. 아들이 아니라 그 자신이 왕이 되었더라면 좋았으리라. 그게 안되었고 기왕 아들을 앞세웠다면 순리에 따라 스스로 섭정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랬다면 아들, 며느리와 척지지 않았을 테고, 그 자신 또한 왕실의 큰 어른이자 재야의 큰 어른으로 무시 못할 정치적 역할을 이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라는 부질없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보기 드문 영걸들이 한 시대에 나와 세상을 위해 쓰이지 않고 서로 싸우는 데 소진하고 말았다. 

 

 

- 토론회에서 출발해 만민공동회로 이어지고, 관민공동회로까지 발전하며 새로운 정치운동으로 자리 잡고 민주주의의 싹을 보여준 독립협회는 그렇게 종언을 고했다.  황제는 황제권에 대한 집착으로 독립협회가 가진 에너지를 개혁의 자산으로 삼지 못한 채 무너뜨리기에만 급급했고, 결국 성공을 거두었다. 독립 협회 또한 급성장한 자신의 힘을 조절하고 관리할 수 있는 지도 역량을 갖추지 못해 소멸의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고종은 근대적 개혁 보다 황실의 위엄을 높이고 황제의 권위를 세우는 일이 우선이었던 것.

 

 

 

- 내장원 자본의 절반은 황실의 권위를 높이는 일에 쓰였다. 태조와 함께 고종의 4대조까지 황제로 추존했고 이런저런 이유로 황제에게 존호를 올리고 축하연을 열곤 했다. 근대적 개혁보다 황실의 위엄을 높이고 황제의 권위를 세우는 일이 우선이었던 것. 황제가 키운 군대는 쿠데타에 대비한 궁궐 수비와 지방의 반란에 대비하기 위한 정도의 군사력이다. 한마디로 국가 안보를 위한 군대가 아니라 정권 안보를 위한 군대였다. 

 

자력으로 스스로를 유지할 수 없겠기에 대한제국이 존립할 수 있는 길은 러시아의 군사적 보호를 받거나, 러일 간의 세력 균형이 계속 이어지거나, 열강이 모두 대한 제국을 중시해 어느 한 나라가 집어삼키는 걸 막는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대한제국 시기 주요 이권이 열강들에게 넘어갔는데, 열강에 의한 이권 침탈로 보통 설명되지만 중립화 국가론을 위한 방편이었다는 지적도 새겨들을만하다. (러시아나 일본에 집중된 것이 아니라 고루 나누어준 것 같은 인상)

 

그런데 러일 간의 세력 균형에 균형이 일기 시작했다. 러시아가 아관파천으로 조성된 유리한 입지에서 한 발 뺀 것은 만주에서의 환경 변화 때문이었다. 삼국간섭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랴오둥 반도를 되찾게 해 준 대가로 러시아는 청으로부터 많은 이권을 얻어냈다. (시베리아의 치타 - 하얼빈 -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동청철도 부설권을 비롯하여 뤼순항과 다롄항의 조차, 하얼빈과 다롄을 연결하는 남만주 철도 부설권을 따냈다.)

 

러시아는 다른 서양 열강 및 일본과 함께 청나라의 의화단 운동 진압에 참여했다. 그러나 진압 후에도 만주에서 군대를 철수하지 않았다. 일본과 영국이 항의했지만 만주를 보호령으로 만들려는 뜻을 숨기지 않았다. 조선의 용암포를 조차해 기지화하기도 했다. 

 

 

- 러일 전쟁

일본은 1년 예산의 일곱배를 쏟아부었고, 결국 재정이 바닥나 전쟁을 이어가기 곤란했다. 영국과 미국의 지원도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러시아에서는 1차 러시아혁명이 일어나면서 결국 미국의 중재로 포츠머스 조약이 맺어지고 전쟁은 끝났다. 

 

러일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경부선 철도가 전쟁 중 개통되었고 경의선 철도 건설도 빠르게 진행되었다. 철도와 역사에 필요한 땅 중에서 국유지는 무상으로, 사유지는 헐값으로 수용했고 실제 필요한 넓이보다 훨씬 넓게 확보했다. 연해의 어업권도 확보했고, 각지 주둔한 일본 헌병이 치안행정까지 맡았다. 이 시기 고려 왕릉에 대한 대대적인 도굴이 벌어졌다. 누구 하나 체포되지 않았다. 

 

 

 

- 을사조약 체결과정에 보인 황제의 태도는 이중적이다. 반대의사를 분명히 하는가 하면 현실론을 펴는 이완용의 주장에 동조하는 모습도 보인다. 돌이켜 보면 중요한 고비마다 강단 있는 태도를 보인적이 한 번도 없다 확실히 황제에게는 위기의 시대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단호함이 보이지 않는다.

 

아비와 외세 특히 일본과 손잡은 신하들로 하여 운신의 폭은 좁았어도 그런 제한된 조건 아래 쓰러져 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 노력도 많이 했다. 그러나 먼저 간 부인처럼 그 역시도 끝까지 전근대적 사고와 옛날 방식을 벗어던지지 못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는 끝까지 나라보다 황실을 우선했다.

 

나라 안의 여러 세력을 나라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위해 통합해 내려 애쓰기보다는 황실을 안녕을 위해 이용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우유 부단함과 심지어 비굴함으로 일관했던 그의 처신은 이해할 만도 하지만 그래도 한 번쯤은 황제에서 퇴위될 때 이상의 결헌함을 보여주어야 했다. 병합 때나 혹은 그 후라도.

 

 

* 2015년 1월 독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권 세트 - 조선사 | 쿠팡

쿠팡에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권 세트 구매하고 더 많은 혜택을 받으세요! 지금 할인중인 다른 조선사 제품도 바로 쿠팡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www.coupang.com

 

 

[책 리뷰] 삶의 실력, 장자 Full ver.(최진석, 위즈덤 하우스, 새말새몸짓, 장자, 노장 사상, 동양철

○ 저자 소개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이며 사단법인 ‘새말 새몸짓’ 이사장이다. 건명원 초대 원장을 지냈다. 서강대학교 철학과에서 학사와 석사, 베이징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당나

varsika.tistory.com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