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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속에서

 

  • 맛은 화학적 실체라기보다는 정서적 현상이다. 맛은 우리가 그것을 입안에서 누리고 있을 때만 유효한 현실이다.

  • 나는 이제 아버지보다 더 오래 살고 있다. 나는 젊은 날의 내 아버지가 때때로 내 가엾은 아들처럼 느껴진다.

  • 조국이란 것이 우리에게는 그리 매력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 으스러지게 부둥켜안아보고 싶고, 그 품에 안기고 싶은 조국이지만 우리에게 몸부림만 치게 하고 일경(日警)의 칼자루 밑에서 찍소리도 못하는 조국. (김훈의 아버지 김광주의 글)

  • 광야를 달리는 말이 마구간을 돌아볼 수 있겠느냐?

  • 그 술집에 모인 술꾼들은 모두 다 아버지의 친구였고 선배거나 후배였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언제나 좀 저래보나' 하면서 부러워했던 적도 있다. 그것이 아버지의 가엾은 '광야'였다.

  • 나는 계획한 일을 다 마무리하지 못하고 봄이 되자 짐을 싸서 달아나듯 울진을 떠났다. 도시로 돌아오니까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한줄의 수평선이 그어져 있다.

  • 물곰의 살은 모든 짐승의 고기가 갖는 육질의 짜임새가 없다. 물곰의 살은 근육도 아니고 국물도 아닌 그 완충의 자리에서 흐느적거린다. 그 살은 씹어 삼키는 살이 아니라 마시는 살이다.

  • 나에게 있어 여행은 세계의 내용과 표정을 관찰하는 노동이다.

  • 추크섬 이야기

  • 추크 섬의 국제공항에 가까운 바닷가에는 일본인들이 세운 전몰자 위령비가 태평양을 바라보고 있다. 전몰이라는 단어는 포괄적이고도 모호해서, 가해와 피해를 구분할 수 없었다

  • 하구에서 한반도와 러시아, 중국의 국경이 마주친다. 사람들이 그어놓은 금 위로 풀들이 우거지고 강물이 흘렀다. 여기가 조선 후기 이래로 두만강 너머로 쫓겨가고 숨어들고 빌어먹으러 가던,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들판이다. 강물에는 인간의 고난과 설움의 자취가 남아 있지 않고 강은 저 혼자 자유롭고 아름다워서, 시인 이용악은 두만강을 '천치天癡의 강'이라고 불렀다.

  • 내가 일을 싫어하는 까닭은 분명하고도 정당하다. 일은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키기 때문이다.

  • 시간 속에서는 덧없는 것들만이 영원하다. 모든 강고한 것들은 무너지지만, 저녁노을이나 아침이슬은 사라지지 않는다.

  • 임박한 죽음 앞에서 장한철은 삶의 쇄신을 각오하는데, 쇄신의 골자는 책을 버리고 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언어와 관념의 세계를 버리고 몸과 대지가 부딪치고 엉키는 직접성의 세계에 삶을 재건할 것을 기약한다.

  • 명령은 직무의 발동이고 실현은 직무의 완수다. 이것이 대통령과 9급의 차이일 것이다. 명령을 일곱 번 내렸다고 해서 대통령의 책임을 다한 것이 아니다.

  • 손목들은 사람 사는 육지를 손짓하다가 손목들끼리 끌어안고 울었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기진하였다.

  • 생명과 죽음은 추상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회복이 불가능하고 대체가 불가능한 일회적 존재의 영원한 소멸이다.

  • 호텔 주차장 입구에서 자동차 번호판을 가려주는 이 비닐커튼은 그 신도시의 평화를 지켜주는 보호막이다. (...) 비닐커튼은 물론 위선과 허위의 장치다. 세상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위선일 때가 많다.

  • 소방관의 죽음(여수 서형진 소방사)

  • 병역은 남자로 태어난 국민의 가장 신성하고 도덕적인 의무라고 말한들 이미 더럽혀지고 허물어진 신성 앞에서 그 말이 무슨 씨가 먹힐 것인가.

  • 자유당의 무법천지를 살아가던 어머니에게 법을 만든 날은 자식에게 새 옷을 입혀주고 싶을 만큼 좋은 날이었던 모양이다. 어머니에게 헌법은 과연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눈물겹다.

  • 내 고향 서울을 다시는 타향이라고 말하지 마라. 타향 위에 고향을 건설하지 못하는 한 당신들은 영원히 고아이며 실향민인 것이다.

  • 가을에는 바람의 소리가 구석구석 들린다. 귀가 밝아지기 때문이 아니라 바람이 맑아지기 때문이다.

  • 맑은 가을날, 소리를 낼 수 없는 이 세상의 사물들이 바람에 스치어 소리를 낸다. 그 난해한 소리를 해독하려는 허영심이 나에게는 있다.

  • 임꺽정의 무리는 이념적 일관성이나 완결성을 애초부터 결여하고 있었고 또 그러한 목표를 지향한 적도 없었지만, 그 대신 삶의 구체성과 사실성 위에 탄탄히 뿌리박은 자들이었다. 삶을 살아내는 자들은 삶을 설명하거나 추상화하지는 않는다.

  • 안성 들판 여기저기에 들어서 있는 돌미륵들은 모두 다 찾아보고 서울로 돌아왔다. 미륵은 언제나 마을에 있었다.

  • 나는 잠자다가 일어난 아내에게 그날의 박경리에 관해서 말해주었다. 아내는 울었다. 울면서 "아기가 추웠겠네요"라고 말했다. 춥고 또 추운 겨울이었다.

  • 간절해서 쓴 것들도 모두 시간에 쓸려서 바래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늘 말 밖에 있었다. 지극한 말은, 말의 굴레를 벗어난 곳에서 태어나는 것이리라.

 

 

 

[책 리뷰] ★ 허송세월(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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