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소개(알라딘)
동양 문화권 내 기독교 토착화 및 인간의 죄와 악의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었던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의 장편소설. 한 남자에게 버려진 한 여자의 이야기를 통해, 개인과 개인이 삶이란 울타리 안에서 어떻게 관계 맺어지고, 서로의 인생에 어떤 흔적을 남기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화자인 '나'는 전후(戰後)의 일본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는 가난한 남학생이다. '나'는 비누공장에서 일하는 가난한 여공 미츠를 일회성 욕망을 소모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한다. 자신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바치고 싶어 했던 그녀를, 인생에 아무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는 이유로 호주머니의 쓰레기처럼 버리고 만다.
37세부터 결핵을 앓기 시작한 작가 엔도 슈사쿠가 3년여의 투병생활을 마치고 난 후 쓴 첫 작품으로, 1963년 1월부터 12월까지 「주부의 벗」 지에 연재되었다. 여러 차례 연극으로 상연되었고,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다.
○ 줄거리
등장인물: 요시오카 츠토무(나), 미츠
가난한 대학생인 요시오카는 우연히 미츠라는 여성을 알게 된다. 미츠는 대학도 졸업하지 못한 가난한 여공이었고 외모도 빼어나지 않았다. 요시오카는 그저 하룻밤 욕망을 해결할 속셈으로 미츠를 이용한다. 처음에는 현학스러운 말로 설득하다 여의치 않으니 자신의 병력(病歷)을 거론하며 미츠의 죄책감을 이용해 관계를 맺는다. 그 다음 그는 자신과의 미래를 그리고 있는 미츠와 연락을 끊고 사라진다. 미츠는 요시오카를 그리워한다.
요시오카는 직장인이 되었고, 사장의 조카와 연애하게 된다. 다만 그녀에게는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어서 자신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못한다. 자연스레 요시오카는 예전에 자신을 좋아하던 미츠가 떠오르게 되고, 수소문 끝에 미츠를 다시 만난다. 그러나 미츠는 한센병이 걸렸다는 소식을 전한다. 요시오카는 다시 알 수 없는 죄책감과 미안함, 두려움에 휩쌓여 미츠를 떠난다. 미츠는 한센병 환자 수용소로 입소하고 요시오카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상으로 돌아간다. 사장의 조카인 연인 마리코와 결혼을 준비한다. (후략)
○ 감상
미츠의 헌신적인 사랑의 모습이 때로는 고정적이고 전통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미츠로 인하여 전개되는 이야기는 그 캐릭터보다 훨씬 입체적이다. 미츠는 기본적으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줄 아는 사람인데, 더 적나라하게 말해 타인의 고통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이야기 뒷부분에서 수녀가 말한 타인의 고통과 연대하는 모습으로 자세하게 서술된다.
○ 책 속에서
-. "너 거북이 하냐?" 거북이 한다는 것은 당시 학생들 사이의 은어로, 거북이가 토끼를 뒤쫓듯 여자 꽁무니를 따라다닌다는 말이었다.
-. 막상 미츠를 만나자 나는 갑자기 한심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불합격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합격자 발표 용지에 자신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을 때 느끼는 환멸과 따분함이 뒤섞인 기분과 비슷했다.
-. "상대방에게 모든 것을 주지 않는 사랑은 에고이즘이라고 마르크스도 말하고 있어" 물론 그것은 엉터리였다. 마르크스가 들었으면 통곡했을 것이다.
-. 모테사세야: 손님을 중역으로 보이게 하는 운전수 아르바이트
-. 책임 같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이 인생에서 필요한 것은 너의 슬픔을 다른 사람의 슬픔과 결부시키는 거야. 그리고 나의 십자가는 그 때문에 존재하는 거야.
-. 다행히 한국전쟁의 특수 경기로 나도 나가시마도 쉽게 취직할 수 있었다. 물론 도쿄대 출신처럼 일류 은행이나 일류 기업에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우리는 아예 처음부터 그런 기대를 걸지 않았다.
-. 어쨌든 마리코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옛날에 단 한 번 관계했던 미츠와의 일은 점점 잊혀 갔고, 그녀는 내 안에서 하찮은 존재가 되어갔다. 이미 그것은 존재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몰랐다. 우리 인생에 있어 타인에게 끼친 행위는, 어느 것이건 태양 아래 얼음이 녹듯이 그렇게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그 상대에게서 멀어져 전혀 생각지 않게 되더라도, 우리의 행위는 마음속 깊이 흔적을 남긴다는 점을 몰랐던 것이다.
-. (역주) '스루'란 불어로 수녀란 뜻이다. 샤르트르 성바오로 등 프랑스에 본원이 있는 수도회에서는 이 용어를 쓰고 있다. 보통은 영어식의 시스터를 사용한다.
-. 고통스러운 것은 몸 때문이 아니에요. 2년 동안 여기서 지내면서 깨달은 건데요. 고통스러운 것은..... 이젠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을 견뎌내는 거예요.
하지만 미츠는 다에코가 자기 자신에게 타이르는 듯 중얼거린 말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녀는 이불 테두리를 손으로 붙잡으며, 병원을 에워싼 어둠의 깊이를 헤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 어둠에도 소리가 있다는 것을 그녀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것은 가지와 잎사귀에 묻은 빗방울을 떨구는 잡목 숲의 술렁거리는 소리나 산비둘기 울음소리는 아니었다. 어둠의 소리라는 것은 정적에 가깝긴 하지만 그것과는 전혀 다르며, 이런 밤에 고독에 처한 사람의 심장 고동소리만이 뚜렷하게 들린다는 그것이었다.
-. 바늘과 천을 무릎 위에 놓으며, 미츠는 그 환자들이 한없이 가엾게 느껴져, 그녀 자신이 같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잊은 채 야마가타 수녀에게 물었다. "그 사람들 좋은 사람들인데, 왜 고통을 당하죠? 이렇게 착한 사람들인데, 왜 이렇게 되었나요?" "나도 매일 밤 그 문제를 생각해요."
-. "퇴원이 결정되었다면, 계속 이런 곳에 있을 필요 없지." "하지만 이제부터 어떻게 할지 생각하고 있어요." "뭐든지 할 수 있을 거야. 세상이 힘들다고는 해도 여기보다는 낫지."
-. "저쪽 주소, 호주머니에 있지?" 소녀가 아무리 고개를 끄덕여도, 소녀의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듯 보자기 꾸러미를 풀었다, 묶었다, 하고 있었다. "알았지? 숙부님에게 엽서 보내." "알았어요." 소녀의 볼은 아직 사과처럼 발갛다. 중학교를 막 나와, 도쿄로 취직하러 가는 것임에 틀림없었다. 미츠는 자신이 처음으로 도쿄로 갔을 때를 떠올렸다. 기차를 탈 때 배웅 나온 큰어머니는 미츠의 짐 보따리를 몇 번이나 풀었다가 묶었다가 했다. 이 소녀의 어머니처럼 승차권을 잘 챙겨라, 주소를 잊지 말아라, 기차가 올 때까지 장황하게 이야기를 반복하곤 했었다.
'이 아이는 도쿄 어디서 일하게 될까?'
이 소녀가 앞으로 도쿄에서 지낼 생활을 미츠는 알고 있었다. 시골뜨기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면서 자신의 행동과 말에 대해 조심하며 보낼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인 휴일에는 신주쿠나 시부야에 나가서 이것저것을 보며 놀랄 것이고, 밤에는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우두커니 남동생과 여동생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오늘부터 자신도 그 도쿄에서 옛날과 같이 외톨이로 지내야 한다.
미츠는 가와사키의 작고 싸늘한 하숙집 방을 떠올렸다. 갓이 없는 전등이 흔들릴 때마다 방에 어두운 줄무늬 그림자가 비친다. 창 밑의 오수가 흐르는 길에 취객이 방뇨를 한다. 이 소녀라면 그런 때 고향의 가족과 어머니를 떠올릴 수 있겠지만, 집을 버리고 떠난 미츠로서는 따스하게 떠올릴 것도 없다. 천장을 올려다보며 얇은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리면서, 전등의 그림자가 흔들거리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뿐이다.
돌아가더라도 고독한 생활이 이어진다는 것을 미츠는 깨달았다. 버려진 고양이처럼 불씨도 별로 없는 화로에 곱은 손을 쬐면서 혼자서 지낸 작년 연말의 밤. 전철이 지나가는 소리에 신문지로 틈새를 틀어막은 유리창이 가볍게 흔들렸었다. 싫다. 이제 그런 생활은 싫다. (...) 몸뿐만 아니라 때로는 적막한 나날 가운데, 지친 자신의 머리를 기대게 해주는 어머니와 같은 상대가 필요했다. 둔하고 어리석은 자신의 푸념을 들어줄 상대. 이시하마 로의 영화를 볼 때 함께 웃을 수 있는 친구들. 그리고 그 친구들이 평생 자신의 곁에 있어주고, 떠나지 않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런 따스한 존재가 어디 없을까?
-. 미츠는 지는 햇살을 등에 받으며 숲 가장자리에 멈춰 섰다. 그렇게도 혐오스럽게 바라보았던 이 풍경이 지금 미츠에게는 마치 고향에 돌아온 듯한 정겨움을 불러일으켰다. 숲의 나무에 기대어 미츠는 그 정겨움을 마음속 깊이 음미하면서 쏟아져 내리는 석양빛 다발을 올려다보았다.
-. 우리 수녀들은 솔직히 말해서 이러한 미츠의 마음을 일시적인 충동이나 감상과 같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 수녀들이 쓰는 말에 애덕실천이라는 것이 있고, 수녀들은 그 애덕을 실천하며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애덕은 감상도 연민도 아닙니다. 우리는 비참한 사람과 불쌍한 분을 동정하지만, 동정은 본능과 감상에 불과하며, 고된 노력과 인내를 필요로 하는 사랑과는 다르다고 들어왔습니다. 때문에 미츠의 마음도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이 으레 병으로 고통스러워하는 환자에게 느끼는 일시적인 감정에 지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이라는 성서의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는 나도 알고 있습니다. '이즈의 산들, 해가 지고'라는 유행가를 좋아하고, 이시하마 로의 사진을 자신의 작은방 벽에 붙여놓은 평범한 여자, 그런 미츠이기에 하느님은 더욱 그녀를 사랑해 주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을 믿는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어린이처럼 되라고 명하셨습니다. 어린이처럼 되라는 것은 단순하고 순진하게 행복을 기뻐하는 것, 단순하고 순진하게 슬퍼하며 우는 것과 단순하고 순진하게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 가엾게도 아이는 5일쨰 되는 날 숨을 거두었습니다. 미츠가 그때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았는지는 여기에 쓰지는 않겠습니다. 단지 그녀는 화난 듯이 이렇게 내게 말했습니다. "전 하느님 따위는 있다고 생각지 않아요. 있긴 뭐가 있어요?" "왜 그래요? 소가 죽어서? 하느님이 미츠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아서?" "그게 아니에요. 그런 거 이젠 어찌 됐건 상관없어요. 단지 저로서는 하느님이 왜 소 같은 어린애마저 고통스럽게 하는지 모르겠는걸요. 어린애를 괴롭혀서는 안 되잖아요. 어린애를 괴롭히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아요."
-. 미츠가 하느님을 부정하는 것은, 이 고통의 의미라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미츠로서는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늘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요? 인간이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때, 주님 역시 그 고통을 함께 나누고 계신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 어떤 고통도 고독으로 인한 절망감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자신 혼자만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생각만큼 절망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설혹 사막에 홀로 있을지라도 혼자만이 고통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고통은 반드시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점을 어떻게 미츠에게 이해시킬 수 있겠습니까? 아니, 의식은 못하지만, 미츠는 그 고통의 연대를 자신의 삶을 통해서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 "안녕. 요시오카 씨." 이것이 미츠가 그때 한 말입니다. 그녀가 한 말은 그것뿐이었습니다.
-. 나는 자신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서 옥상 난간에 기대어 황혼의 거리를 바라보았다. 잿빛 구름 아래로 수많은 빌딩과 주택이 늘어서 있다. 빌딩과 주택 사이에 수많은 길이 나 있다. 버스가 달리고, 자동차가 물결을 이루고,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있다. 거기에는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생활과 인생이 있다. 그 수많은 인생 가운데 내가 미츠에게 한 그런 행동은 남자라면 누구든 한 번은 경험하는 것이다. 나만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왜 이렇게 허전할까? 지금의 내게는 작지만 견실한 행복이 있다. 나는 미츠에 대한 기억 때문이 그 행복을 버릴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왜 이렇게 허전할까? 만일 미츠가 내게 무언가를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 인생에서 단 한 번이라도 스쳐 지나간 것이 있다면 거기엔 지울 수 없는 흔적이 남는다는 사실일까? 이 허전함은 그 흔적 때문에 생기는 것일까?
그리고 만일 이 수녀가 믿고 있는 신이란 존재가 정말로 있다면, 신은 그러한 흔적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걸까? 그런데 이 허전함은 어디서 오는 걸까? (...) 황혼의 구름 아래로 무수한 빌딩과 주택이 자리하고 있다. 버스가 달리고, 자동차가 물결을 이루고, 사람들이 걸어 다닌다. 나처럼, 우리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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