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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상

 

200페이지가 조금 안 되는 분량이라 하루면 다 읽을 수 있다. 소설의 이야기도 흥미롭고, 적당한 길이의 남자 머리칼처럼 짧게 툭툭 치고 나아가는 문장들이 좋았다. 나는 여전히 소설을 잘 읽지 못하는데 이 소설은 이야기 자체의 흡입력과 문장의 간결함이 나를 끌어당겼다. 작가인 장강명은 기자 생활을 10년 가까이 한 경력이 있는데 기자 출신이라 간결한 문장을 잘 쓴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소설의 구성이었다. 여자, 남자, 아주머니의 시선과 과거, 현재가 뒤섞인 방식으로 전개된다. 챕터 하나에 3가지 이야기가 섞여 있고, 그래서 챕터의 제목도 3가지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전개에도 이야기가 뒤섞이진 않는다. 오히려 끝으로 갈수록 명료해진다. 이 덕분에 뒷부분에 가서는 읽는 속도가 더 빨라진다. 앞에서 단순히 제시되고 지나가듯 들리던 대사들이 뒷부분에선 현현해진다. 어떻게 이런 구성으로 글을 쓸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기어코 쓰고 말았을까? 이것이 이 소설에 대한 첫 번째 인상이었다.

 

그다지 두껍지 않은 분량에도 그 이야기들이 훌륭하게 종결된다. 문장이 간결한 것을 넘어 이야기의 구조도 탄탄하고 밀도가 높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 분량으로 이런 이야기를 담고 전달하는 것이 신기했다.

 

책을 추천한 지인이 말하길 책이 두껍다면 독자를 서서히 감동시킬 수 있지만, 반대로 어떤 책은 얇은 분량으로도 그 이상의 감동을 전해준다고 했다.  정확히 그런 느낌이었다. 모자라지도, 남지도 않을 정도로 정확히 명중한 느낌의 책이었다. 

 

이야기 속에서 남자가 출판사에 보낸 소설이 여자의 실수로 뒤섞이고 만다. 제본을 뜯어 놓았는데 그게 그만 쏟아져버린 것이다(한 챕터에 여러 가지 이야기가 섞여 서술되는 것이 바로 이것을 표현하는 것). 후에 그 일을 전해 들은 남자는 어차피 그 소설에는 순서가 없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건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인식하는 것도 인간만이 가진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그저 특성 중 하나라고 말했다.

 

남자의 몸에는 우주에서 온 '우주알'이 들어있어 자신은 시간의 순서에 구애받지 않고 미래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소설이 그 우주알처럼 내 안으로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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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거리

 

고등학교 때 학교 폭력을 당하던 남학생이 가해자를 칼로 찔러 죽인다. 그는 소년원, 이후에는 교도소로 이감되어 징역을 산다. 남자는 출감 후 그는 작가로 살아가게 되고, 학창시절 좋아하던 여학생을 다시 만나기로 결심한다.

 

이제는 성인이 된 그 여학생이 다니는 출판사에 자신의 소설을 보낸다. 공모전에 참여하는 형식이었다. 그 소설의 어떤 대사를 보고 여자는 본능적으로 소설의 작가가 학창 시절 그 소년임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 둘은 다시 만나 데이트를 한다. 그러나 그 남자의 주변에는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인물이 있다. 칼에 찔려 죽은 소년의 어머니다. 당연히 아들을 잃은 그녀는 제정신이 아니다. 

 

겉으로는 출감한 남자를 아들처럼 돌본다고 말하지만 실제 그 아주머니가 행하는 모습들은 너무나도 이기적이다. 자신이 거짓으로 직조한 세계의 정서적, 감정적 근거를 그 남자로부터 공급받기만을 원한다. 자신의 아들은 학교폭력 가해자가 아니라 불행한 사건으로 희생당한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생각에서 그치지 않고 그 생각을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인정하길 바란다.

 

10년이 지난 과거의 일에 거짓을 덧붙인 뒤 그녀는 이야기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출감한 남자를 따라다닌다. 직장에도, 거주지에도 나타나 주변 사람들에게 남자의 살인 경력(?)을 홍보한다. 남자에게 자기 아들의 무고함을 대신 말해달라고도 부탁한다. 지칠대로 지친 남자는 늘 그녀의 부탁을 들어준다. 정작 그 장면에는 자식의 억울함이나 슬픔이 없다. 오로지 남자가 피폐해지길 바라는 모습뿐이다. 그리고 남자를 마주치면 다시 말한다. "너를 자식처럼 생각하고 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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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속에서

 

  • 칼이 쥐는 법이 서툴러 제 양손에 상처를 잔뜩 냈다.


  • 인간이란건 결국 패턴이야.


  • 우주에는 시간이 없어 남자가 대답했다. 우주는 마치 볼펜과 같은 거야. 그냥 하나의 덩어리야. 볼펜은 길쭉하게 생겼기 때문에 사람들은 볼펜에 양끝이 있다고 말하지, 하지만 사실은 볼펜이 공기와 닿는 모든 면이 다 볼펜의 끝이야. (...) 우주도 비슷해. 시공간연속체와 만다는 지점이 있지. 거기서 우주는 시작하고 끝나. 그 안쪽에는 우주알이 있어, 그 바깥쪽에는 없고. (...) 시간과 공간이 그렇게 분리되는 개념이 아니야. 시공간연속체 밖에는 시간이 없어. (...) 굳이 정의하자면 먼저 보이는 게 앞이고 나중에 보이는 게 뒤라는 정도지. 반대편에서 보면 정확히 반대가 되는, 상대적인 개념이야. 오직 인간만이 시간을 한쪽 방향으로 체험하지.


  • 비유하자면 아주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 한번 읽은 책을 다시 읽는 것과 비슷해. 이미 내용은 다 알고, 그걸 바꿀 수도 없어. 하지만 그렇다해도 매번 읽을 때마다 중요한 대목에서 새로운 감정을 느낄 수 있잖아. (...) 사건 진행속도를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도 있지. 원하는 속도로 읽으면 되는 거니까. 중간에 멈출 수도 있고. (...) 시간이란 게 책처럼 통째로 펼쳐져 있으니까.


  • 큰 보람이 영국으로 갔다고해도 중간 보람이 큰 보람이 되고, 작은 보람이 중간 보람으로 승격하는 일은 없었다. 큰 보람의 빈자리는 큰 보람보다 존재감이 더 커졌다. 


  • 너는 미래가 결정된건지 궁금해했지. 이렇게 설명하면 어떨까. 모든 시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존재에겐 과거와 미래는 마치 건축물과 같아. 거대한 미술관을 상상해 봐. 그 안을 네가 걷는다고. 네가 걷는 방향에 따라서 눈앞으로 많은 그름이 지나가는 거야. 인간이란 그 미술관에서 가이드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는 단체 관람객 같아. 정해진 방향으로, 정해진 속도로, 움직이며 눈앞에 있는 그림에 집중해야 하지. 그 그림을 볼 수 있는 때도 그 순간 밖에 없으니까 (...)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미술관은 어마어마하게 거대하기 때문에 어떤 존재도 모든 전시관을 다 둘러볼 수는 없어. (...) 나는 미술관 안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지만 미술관의 구조는 변하지 않는다는 거야. (...) 이 미술관에서 <모나리자>를 보려면 이탈리아 그림들을 함께 봐야 해. (...) 너도 <모나리자> 같은 존재였어. 이 미술관에서 꼭 보아야 하는 그림. 우주알이 내 몸에 들어왔을 때, 나는 네가 있는 곳으로 갔어. 나는 복권이나 경마로 부자가 될 수도 있었어. 하지만 그랬다면 네 곁에 머물 수 없었지. 그런 인생은 <모나리자>에서 매표소나 카페테리아만큼 멀리 떨어져 있었거든. 고마워 너랑 지내는 동안 정말 행복했어. 우주알을 받아들인 보람이 있었어. 

 

  • 도시는 점점 빛으로된 암호가 되어갔다.


  • 자동차들이 눈에 불을 켰다. 그것들은 형체를 잃은 뒤 붉고 노란빛의 점선이 되었다. 그 점선은 뭉쳐서 다발이 되어가면서도 다른 다발과 엉키거나 꼬이지 않았다. 방향을 바꾸지도 않았다. 빛의 선에는 시작과 끝도 없었고, 잠시 뒤에는 방향도 없어졌다. 오직 패턴만이 있었다. 


  • 그러고 나서 남자는 화면을 보면서 잠시 머뭇거렸다. 여자에게 하는 말이 너무 짧아 무언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더 보탤 단어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 말들은 거짓이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너무 잔인한 진실도 안 되었다. (...) 같은 말들.  


  •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다시 겪으라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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