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https://coupa.ng/bVNTJr

 

통영의 도시성장과 공간구조

COUPANG

www.coupang.com

 

- 택지조성계획 사무처리인가 신청서에 나타나고 있는 사무처리의 이유를 "통영면은 내선인의 수가 4,000명을 넘고 인구 20,000명의 도읍임에도 불구하고 시가택지가 매우 좁아서 통영의 발전에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라고 하고 있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천척정 택지조성사업이 결코 조선인을 위한 것이라고는 보기 어려우며 통영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주거편익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통영은 계획도시로 출발하였다. 조선시대 대부분의 도시들은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취락을 중심으로 읍성형태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선조 37년 통영으로의 통제영의 이설이 입지분석을 통하여 계획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본영을 옮기기 전에 세병관을 비롯한 관아를 먼저 건설하였다는 사실은 통영이 자연발생적 도시가 아니라 조선후기 몇 안 되는 계획도시 중의 하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 일제강점기동안 통영은 일본인들의 해상교통과 수산업 진출의 교두보가 되었다. 이에 따라 통영은 1917년 면제개편고시 당시 2,512개 면 중에서 산업 및 교통 중심지인 23개 지정면의 하나로 선정되었으며, 1931년에는 읍으로 승격되었다. 

 

 

 

 

- 통영은 지형상 큰 하천이 없고 풍수설에 입각하여 여봉산의 경사면에 도시취락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홍수에 의한 피해는 없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따라 하천변이나 분지에 입지한 도시들과는 달리 개천공사와 같은 공공사업에 의한 해수시설은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통영에 있는 연못들은 용수 공급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해자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 충무공에게 전라좌수사를 겸직하도록 하였으며 한산진영은 삼도수군통제영이 되었다. 그 후 정유재란으로 한산진영은 물론 전라좌수영마저 폐허가 되자 통제영은 전세에 따라 일정한 본거지 없이 옮겨 다니게 되었다. 전란 후에도 통제영은 선조 32년에는 전라좌수영인 여수에 있다가 선조 34년에는 경상우수영인 거제 오아포(지금의 거제시 동부면 가배리)로 본영을 옮겼으며 이듬해인 선조 35년에는 다시 고성 춘원포에 옮겼다가 선조 36년 제6대 통제사인 이경준이 통제영을 두룡포로 옮길 것을 정하고 세병관을 비롯하여 백화당, 정해청 등 일부 군영관아를 건설하였으며 이듬해인 선조 37년 본영을 현재의 통영으로 이전하였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