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그들은 왜 칼 대신 책을 들었나 - 일본근대사 | 쿠팡

쿠팡에서 메이지유신을 설계한 최후의 사무라이들:그들은 왜 칼 대신 책을 들었나 구매하고 더 많은 혜택을 받으세요! 지금 할인중인 다른 일본근대사 제품도 바로 쿠팡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

www.coupang.com

 

 

○ 영상자료(링크)

 

1. 메이지 유신

- 19세기 후반에 일본에서 일어난 정치사회적 대변혁, 19세기말까지 비서구 세계 유일의 성공적인 근대화, 서양화

- 여말선초 성리학 혁명가들과 비견.

* 혁명은 기본적으로 역성혁명을 뜻하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혁명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일본은 불과 10년 전까지 계속됐던 중세적인 사회를 한 번에 넘어서서 우리 유럽이 걸린 5백 년을 뛰어넘어 19세기의 모든 발전 성과를 일시에 자기 것으로 하려 하고 있다. 이것은 거대한 문화혁명이다. 이것은 대도약, 아니 죽음의 도약이라고 불러야 한다." (독일인 의사 베르츠, 1876년부터 27년간 도쿄대학 의학부 교수로 재직)

 

2. 18세기말 러시아의 등장과 위기 의식

- 18세기 후반, 홋카이도, 사할린, 쿠릴에 러시아인 등장

- 1792년 해군 중위 Adam Laxman의 통상요구

- 막부, 1799년 홋카이도 직할. 탐험대 파견, 지도 제작, 측량.

 

 

3. 변혁의 주체 사무라이

- 일본 사무라이층은 전체 인구의 6-7%로, 중국(0.3%)이나 프랑스(0.5%) 등 타 국가에 비해 비중이 높았다. 또한 중국의 경우 대부분 무사들이 토지를 소유한 지주였으나 일본의 경우 봉록 생활자 사무라이가 많았으면 대부분이 도시에 거주했다는 특성이 있다. (병농분리)

* 성하정(죠카마치)에 대부분의 하급 무사들이 거주했다. 

 

- 경제 성장으로 상인 계급은 성장하나 하급 사무라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 사무라이들의 불만을 축적하게 했다. 

* 사무라이 - 조닌(상인) - 하쿠쇼(백성)의 엄격한 신분제가 있었고, 사무라이 내부에서도 철저한 차등 계급이 있었다. 

 

- 실용주의, 결과 중시, 이데올로기 경시, 현실적 승패가 가장 중요. 군사적 위기감에 예민(군사력을 위해서라면 대체로 받아들임 - 기독교 제외)

 

- 장기적 전쟁이 없는 사회에서 지식인, 서리, 무용지물화(과거제가 없어 신분 상승이 어려움)

* 물가상승률의 격차. 하급 사무라이들의 경제적 곤궁(<-> 부유한 상인)

* 18세기말 이후 유학 학습 붐

-> 번교, 향교, 사숙과 같은 학교의 급증. 독서하는 무사. 칼 찬 사대부가 천하대사에 관심을 갖게 됨. 

-> 문무일치, 문무겸비의 강조

 

 

 

4. 도쿠가와막부 체제

- 정책 결정은 제한된 역인役人들의 전관사항

- 공개적 회의, 여론의 정치적 역할 제한적

- 언관, 상서, 서원, 학교, 당파의 부재 -> 공론의 부재, 정치의 동결

- 조선의 붕당정치, 상서정치와 큰 차이

 

 

5. 19세기의 상황 변화

- 당시 조선은 청에 대해 일방적 의존, 정조의 급사와 세도정치 과점체제에 들어서면서 정치적 리더십이 사라짐. 남인이 칩거하며 당쟁, 당파, 상서, 공론 정치가 쇠퇴함. 경제적 쇠퇴와 부정부패 민란으로 이어짐

 

- 일본은 경제적 안정을 거쳐 자급자족적 체제가 유지됨. 절해고도(섬에 떨어져 있다), 대외위기의식의 형성, 막부정치에 전국정치로 움직이며 공론정치 필요성이 형성됨. 막부와 번의 재정 악화가 발생했지만 농민 세금을 높이는 대신 사무라이 가신단을 희생시킴(봉급 조정)

 

- 아편전쟁에 대해서도 일본은 위기의식을 느꼈지만, 조선은 안이하게 해석한다.

 

- 정치면에서 일본은 전국정치가 형성되고, 단기간 격렬한 정쟁을 통해 새롭고 강력한 리더십이 창출(메이지 정부)

그러나 조선은 세도정치에 이어 고종-대원군-명성왕후로 리더십이 장기분열된다. 위정척사파 또한 과도하고 장기적으로 영향력을 유지한다. (일본에서는 아편 전쟁 이후 위정척사파가 힘을 잃고 사라진다)

 

 

- 막부 보수파에 의해서 페리의 개항이 이루어진다. 이후 일본은 존왕양이파, 막부의 개혁파가 존왕양이/토막파로 흡수된다. 독립협회나 개화파는 조선에서 힘을 쓰지 못했다.

 

- 조선의 엘리트는 민심에 이반 했다. 자기 혁신과 양보에 실패했다. 외세에 의존하게 되고 친청, 친러, 친일 세력이 득세한다.  

 

 

- 1860년대가 되면 일본 내에서 양이론이나 쇄국론이 현저히 약화된다. 1863년에는 사쓰마 -영국 전투가 벌어지고, 1864년에는 4개국 연합 함대가 조슈번의 시모노세키를 포격하는 시모노세키 전쟁이 발발한다. 이후 사쓰마와 조슈도 적극 개국론으로 돌아선다. 늦어도 1860년 중반부터는 이론의 주요 정치세력이 거의 개국, 부국강병론에 동조한다. 

 

- 막부파와 반 막부파, 두 개의 근대화 노선의 경쟁이 이루어진다.

 

 

6. 유신 삼걸

 

 

* 징병제는 사무라이의 특권(무력)을 나누는 것이다. 특권을 내려놓는 것이다.

 

 

 

 

○ 책 속에서

 

- 메이지유신 과정에서 농민, 상인이라고 하는 주요 피지배세력은 사무라이층에 비해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 메이지유신은 지배층인 사무라이층 내부의 다툼과 그 파장으로 일어난 것이고, 그 속에서 급진개혁파가 주도권을 잡아 이뤄낸 변혁이었다. 이런 메이지유신의 성격은 일본사회에 보수성과 안정성을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보수성이라고 해서 변화를 거부한다는 뜻은 아니다. 커다란 변혁을 보수세력이 점진적인 방법을 통해 수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변혁이 진행되어도 사회질서가 총체적으로 붕괴되는 일 없이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특성 때문에 일본 대중은 정치참여에 관심이 덜하다. 정치란 어차피 특정 사람들이 하는 것이란 생각이 자연스레 형성된 것이다. 또 그만큼 가만히 있어도 지배층이 점진적 개혁을 진행해주어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 일본의 위기는 이 패턴이 작동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 측면이 크다. 

 

 

- 1851년 봄, 쇼인은 조슈번주가 참근교대를 위해 에도로 갈 때 유학생 명목으로 이를 따라갔다. (...) 미토에서는 존왕양이의 바이블 <신론>을 지은 아이자와 야스시를 만났다. 이 책은 아직 출판되지는 않았으나(1857년 출판), 필사에 필사를 거쳐 이미 전국적으로 독자를 확보하고 있었다. 

 

 

- 치밀한 감시체제와 의례체계로 유지된 막부와 번 사이의 관계는 매우 안정적이었다. 19세기 중반까지 천황과 장군의 갈등은 부분적으로 있었어도 장군과 대명의 갈등은 거의 없었다. 막부의 번 통제책은 역사에 남을 만큼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가신단 들이었다. 여기서 반막부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정치운동을 일으키는데, 주군을 제쳐두고 가신단의 리더십을 장악해 버리는 일이 속출했다. 막부도 번 당국도 이들을 통제하는 데 실패했다. 이것이 막부 멸망을 가져왔다. 

 

 

- 도쿠가와 시대에는 그전의 가마쿠라 시대나 무로마치 시대와는 달리 사무라이들로 하여금 농촌에서 거주하지 못하고 모두 영주의 도성인 성하정에 살게 했다. 이를 병농분리라 한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했다. 그러나 일부 무사들은 향촌에 그대로 남았는데 이들을 향사라고 했다. 이들은 향촌의 또 다른 유력자인 장옥층과 함께 훗날 도사근왕당의 주요 공급원이 된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향사와 장옥 가문 중 많은 수는 야마우치 씨가 도사에 점령군으로 들어오기 전 이곳의 영주였던 조소가베씨의 가신들이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나중에 상급, 중급 사무라이에 이들이 반발하게 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한다. 

* 장옥(쇼야, 庄屋): 에도 시대 서일본 지역에서 촌락의 행정 업무를 총괄하던 '촌역인(村役人촌락 관료)'.

* 도사 근왕당(일본어: 土佐勤王党 )은 다케치 즈이잔에 의해 도사번에서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걸고 결성된 집단. 

 

 

- 가쓰가 막부 내 권력투쟁에서 밀려나고 그에 따라 고베 해군학교가 문을 닫자, 료마는 지접 나가사키에 가메야마모임을 만들었다. 해군훈련과 무역상사를 겸한 조직이다. 위에 말한 사쓰마 명의의 무기무역을 담당한 조직이 바로 여기다. 이것을 확대 개편해 나중에 해원대를 결성했다. 바다에서 지원하는 부대다. 이 해원대는 신분과 상관없이 전국에서 인재를 모집했다. (...)

 

이쯤에서 신분제 얘기를 잠깐 하고 가자. 앞에서도 말한 대로 일본은 조선이나 중국보다 훨씬 신분제가 강한 사회였다. 우리도 조선시대 때 신분제가 있기는 했지만 사실 양반과 상민과의 경계가 법제적으로 명확히 구분되어 있지는 않았다. 매우 드물었지만 원칙적 상민도 과거에 붙으면 양반이 되지 못하란 법은 없었다. (...) 조선의 양반은 법제적인 기준이 없기 때문에 그 지역 사람들이 양반이라고 취급을 해주느냐, 안 해주느냐가 중요했다. 그러니 과거 합격과 중앙 관직 획득에 매달리게 되고 그 경쟁은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비해 일본의 신분은 법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이미 정해져 있었다. 신분에 따라 거주지역도 구분되었다. (...) 그리고 그 신분은 대대로 물려주는 것이다. 농민이 굳이 사무라이가 되려 하거나 상인이 애써 농민이 되려 하는 일은 잘 없었다. 각자가 자기 신분에서 자기 집안에 주어진 일에만 충실하면 되었다. (...) 도쿠가와 일본 사회는 가업이 기초가 되는 사회였다. (...)

 

이처럼 자기 할 일이 딱딱 정해져 있다. 심지어는 정치까지도 그렇다. 그러니 세습의원이 저토록 많은 것이다. 일본은 '야쿠'의 사회다.

 

다시 해원대 이야기다. 무역상사니 당연히 외국어가 필요했다. 그래서 영어, 네덜란드어 등을 교육했다. 대원들은 당시 나가사키에 진출해 있던 서양 상인들과 활발히 접촉했다. 대표적인 사람이 영국 상인 토머스 글로버다. (...) 해원대는 또 홋카이도 개척을 목표로 내걸었다. 막부는 이미 18세기말에 탐험대를 파견하여 그곳의 지리와 해심 등을 파악해 놓은 후 1854년 직할지로 선포했다. 사할린과 쿠릴열도를 타고 남하하는 러시아인들과의 사이에 긴장감은 여전했다. 그때만 해도 홋카이도는 불모지였다. 벼농사도 가능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이때 이를 차지하는 바람에 큰 이익을 봤다. 홋카이도는 면적이 약 8만 제곱 킬로미터로 남한의 약 80%나 된다. 다 알다시피 이 땅은 지금 아주 좋은 쌀이 재배되는 옥토로 변했고, 엄청난 관광수입을 올리고 있다.

 

 

- 원래 도사번은 사쓰마, 조슈처럼 외양번이기는 했으나 막부와의 관계는 사뭇 달랐다. 사쓰마나 조슈는 세키가하라 전투(1600년) 때 도요토미 편에 섰다가 우너래 갖고 있던 영지를 대폭 삭감당하며 도쿠가와 씨에 굴복했지만, 도사번의 야마우치 씨는 원래 혼슈에 조그만 영지밖에 없었던 것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시코쿠에 거대한 영지로 새로 주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도사번은 도쿠가와 씨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했고, 그런 관계는 막말기까지 지속되었다. 

 

 

- 가쓰 가이슈. 사카모토 료마의 스승, 해군의 기초를 놓은 사람. 막부의 가신이면서도 사쓰마, 조슈와의 협조노선을 끝까지 주장한 사람이었지. 막부와 웅번의 연합정권을 구성하는 '공화정치' 구상을 내비쳤다. 사이고는 가쓰를 만나보고는 경탄해 마지않았다. "실로 놀라운 인물로 두들겨 패줄 심산으로 만났지만 완전히 머리를 숙이고 말았다. 얼마만큼 지략이 있는지 모를 정도였다. 학문과 견식은 사쿠마 쇼잔이 발군이지만 실제 일을 다루는 솜씨에서는 가쓰 선생이 최고다. 정말 반해버렸다"라고 토로했다. 

* 사쿠마 쇼잔은 당시 최고의 양학자로 요시다 쇼인과 사카모토 료마에게도 영향을 주었던 인물이다. 

 

 

- 1867년, 이미 전국적 명성을 얻고 사쓰마의 권력도 장악한 사이고는 장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거세게 ㅔ몰아붙였다. 교토에서 4현후 회의를 개최한 것이다. 사쓰마의 시마즈 히사미쓰, 도사번의 야마우치 도요시게, 에치젠번의 마쓰다이라 요시나가. ,우와지마번의 다테 무네나리 등 막말 정국을 주도해 왔던 지도자들을 교토에 모아놓고 막부를 압박했다. 당시 서양 열강은 무력시위까지 하며 막부가 약속대로 교토와 가까운 효고를 개항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막부는 이를 받아들이려고 했다. 이에 4현후들은 조슈 사면을 먼저 하라고 압박했다. 삿초맹약에서 약속한 대로 사이고는 조슈번의 사면을 강경하게 밀어붙였다. 

* 이 직후 요시노부는 10월 대정봉환을 단행한다. 그러나 사이고는 이를 신뢰하지 않았고 예정대로 왕정복고 쿠데타를 진행한다. 1868년, 쇼군 요시노부는 내전 상황을 피하고자 타협안을 받아들이고 미토번으로 은거한다. 타협은 사이고와 가쓰 가이라의 회담에서 이루어졌다. 

 

 

- 위대한 사람이 죽으면 민중은 그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 사이고가 죽지 않고 오키나와를 통해서 중국으로 피신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1891년 일본을 방문한 러시아 황태자 니콜라이가 가고시마를 찾았을 때 사람들은 사이고가 동행하고 있다고 믿었을 정도였다.

 

 

- 1865년 제2차 조슈 토벌전 칙명 거부. 존왕사상이 널리 퍼졌지만 아직 천황 자체를 신성시하거나 절대화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지사'라고 불렸던 많은 활동가들은 천황을 '다마玉'라는 은어로 부르며 다마를 어떻게 조종하고 이용할 것인가 하는 정치공작적 관점에서 천황을 대하고 있었던 것도 쉽게 확인된다. 역사가들이 오쿠보를 비롯한 막말기 '지사'들을 '마키아벨리스트'라고 부르는 이유다. (...)

 

 

12월 9일(양력 1868년 1월 3일) 왕정복고 쿠데타가 발발했다. 오쿠보는 그 주역이었다. 사이고가 무력 동원의 수훈갑이라면 그는 정치공작 면에서 일등공신이었다. 아무리 이름이 알려져 있다지만 일개 하급 사무라이가 조정공작을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조정이라는 공간은 철저히 신분과 관위에 구애되는 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나 참석할 수 있는 회의가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오쿠보의 정치공작을 조정 내에서 호응해 준 사람이 이와쿠라 도모미였다. 훗날 이와쿠라 사절단의 그 이와쿠라다. 이 둘의 연대는 막말기뿐 아니라 유신 이후에도 굳건히 지속돼 안정된 정치 리더십을 구축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 이와쿠라 사절단은 1871년 11월 파견되었다. 1850년대 후반 서양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는 것이 그 목표였지만 이 문제는 1890년대에 이르러서야 해결된다. (1894년 영국과의 교섭으로 치외법권 폐지).

 

 

- 오쿠보 사절단의 다른 멤버들도 이 말에 크게 공감했을 것이다. 미국과 유럽 각국을 직접 보니 일본 국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아이들 장난 같았다. 사무라이 기득권이니 일본 전통 보존이니 하는 것들을 운운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 당장 필사의 각오로 일본 자체를 유럽처럼 만들지 않고서는 기득권도 전통도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이었다. 일본 전통과 일본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는 유일한 길은 역설적이게도 일본을 '유럽적인 하나의 제국'으로 만드는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란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이 아이러니에 대한 이해 차이가 그 후 세계 곳곳에서 역사의 갈림길을 만들었다. 전통과 민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배외주의적인 태도를 보인 곳에서는 그 이름으로 민족 구성원인 민중을 탄압하고 독재를 자행하며 심지어는 나라를 파멸로 이끈 경우도 있다. 북한과 1930년대 후반 군국주의 일본이 그 예다. 반면 전통과 민족을 중시하면서도 그것들을 구출하기 위해서라도 서양화를 추진해야 한다는 아이러니를 통찰하고 그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용감하게 개방적인 태도를 취한 곳에서 전통은 여전히 죽지 않았고 민족은 더 펄펄하게 살아남았다. 메이지 일본과 대한민국이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