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책 속에서
- 서반아에서의 낮술은 음주가 아니다. 마치 애주가에게 맥주는 흐르는 빵인 것처럼, 이들에게 포도주는 음식을 먹기 위해 입을 벌리면 자연스레 들어갈 수밖에 없는 축축한 산소 같은 것이다. (...) 그러고 나니, 서반아인들이 왜 필수적으로 낮잠인 씨에스타를 취하는지 이해됐다. 씨에스타를 취하지 않고서는 몸이 취해 오후를 버텨낼 수 없는 탓이다.
- 여하튼,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그림자가 있는 듯하다. 그리고 사람과 부대끼며 어울린다는 것은 조금씩 그 그림자를 내어주며, 그 공간에 상대를 초대하고, 기꺼이 그 어둠 속에서 함꼐 빛이 오길 희망하는 것 같다.
- 프리다 칼로의 삶과 작품을 보고 나니, 내 투쟁은 투정이었다. 그가 남긴 숭고한 예술가 정신이 혜성처럼 가슴에 떨어져 나를 뜨겁게 데웠다. 사실, 한 며칠 일기 쓰기를 쉴까 싶었다. 하지만 프리다 칼로를 보니 도저히 그럴 수 없다.
- 그나저나, 청년 L교수는 54년 전인 1971년에 산탄데르에 처음 거처를 정했는데, 자신이 살아왔던 서울 오류동 풍경과 너무 다른 서반아 풍경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여, 그곳의 정경이 담긴 사진엽서를 집으로 부치며, 뒷면에 이렇게 썼다.
"어머니께서는 40년 동안 교회에 나가셔도 아직 천당을 못 보셨지만, 저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천국을 마주합니다."
그 풍경을 이리 술회한 것이다.
그러며 덧붙이는 말씀이 "그런데, 서반아는 그때랑 지금이랑 똑같아, 하나도 안 변했어. 그러다 내가 작년에 한국에 갔으니 얼마나 기절초풍했겠어. 천지개벽했더라고! 기분 묘했지. 사실 여긴 지루하거든.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똑같은 것만 봐. 그러니 한국이 얼마나 신나겠어. 한데, 이제는 한국에 적응 못 하겠어"라며 이야기꾼답게 말을 딱 끊어버렸다.
이유를 물어보니, 그는 유럽에서처럼 눈이 마주칠 때마다 환하게 웃으면서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넸는데 돌아오는 건 무시뿐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경계 어린 눈빛과 의심의 눈초리, 때로는 이성에게서 오해를 넘은 경멸 섞인 시선까지 받았다고 한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그 기분이 너무나 이상하고, 잘 때까지 안 잊혀서 도저히 살 수 없겠다"라고 했다.
결국 아파트 복도에서, 엘리베이터에서 흘려보낸 눈빛과 환대받지 못한 호의라는 아주 사소한 것들이 사람의 마음에는 그 나라의 GDP나 음식, 주거환경보다 더 오래 남는다는 사실이 각인되는 날이었다.
- 바르셀로나에 비해, 마드리드는 관광지로서의 성격이 약하다. 그렇기에, 내가 다니는 학원에도 '초급반'은 개설돼 있지만, 정작 학생이 없다. 한데, 바르셀로나 지점에 개설된 같은 학원의 '초급반'에는 학생들이 많다. 무슨 말이냐면, 마드리드에 온 학생 중 90퍼센트 이상이 이미 바르셀로나 여행을 했거나, 그곳에서 생활해 봤다는 것이다.
- ('가보긴 했지만 잘 알지는 못해'라고 답하자) "가봤다며! 그게 아는(conocer)거라니까!" 왜 서반아인들은 여행을 소재로 삼을 때, '가다' 대신 '알다'라는 동사를 쓸까. 그건 어쩌면, 이들의 여행 목적이 여행지를 방문하는 데 있지 않고, 그곳을 제대로 아는 데에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 가령, 스페인어에서 베를린을 '아냐'는 질문은 '가봤냐'는 뜻이다.
- '업' 장군은 재물을 관장하는 신을 뜻한다. '복' 장군은 당연히 복을 뜻한다. 둘은 사이가 나빴고, 업 장군은 속임수를 부린 탓에 파면당한다. 그러면 정직하게 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간단히 말해, 속이지 않는 일인데, 타인에 대한 정직은 기본이요, 궁극적으로는 자신에 대한 정직함까지 포함될 것이다. 즉, 세속적 기준에 내 몸과 정신을 맞춰 나 자신을 속이지 않는 일이다.
* 옥황상제를 보좌하는 두 장군이 있었는데, 중용된 업 장군이 속임수를 쓰다 파면당한다. 이후 복 장군이 다시 중책을 맡게 되는데 사람들의 소원을 하늘로 전달하는 것이다. 옥황상제는 인간들이 놀라지 않도록 복 장군의 모습을 돼지로 바꾸어 지상으로 보낸다. 이 사연을 알게 된 인간들은 고사를 지낼 때 돼지머리를 올려놓기 시작한다.
- 이탈리아 식사는 안띠 파스토(전전채) - 프리모(첫 번째, 즉 전채 요리: 파스타 혹은 리소토) - 세꼰도(두 번째, 즉 메인 요리: 생선 혹은 고기) - 돌체(후식: 커피, 그리고 그 후에는 '아마짜 카페', 즉 커피를 죽인다는 뜻의 식후주)로 구성된다.
* 아마짜 카페 Ammazzacaffè = coffee killer
- 밀라노의 나비이(Navigli)는 운하를 중심으로 양쪽에 바bar가 즐비한 젊음의 거리였다. (...) 또 다른 특이점은 저녁이 되면 술 한 잔에 여러 안주를 세트로 구성한 '아베리띠보'라는 메뉴를 모든 가게에서 인당 12~17유로에 파는 것이다. 주로 이탈리아의 전형적인 햄 세트를 주는데, 가게에 따라서는 밀라노의 명물인 치즈 리소토를 포함한 뷔페를 제공하기도 했다.
- 중년의 쓸쓸함은 돈 버는 기계가 된다는 생각에서도, 주름이 느는 모습에서도 생겨나는 게 아니다. 그것은 바로, 선생이 없다는 사실에서 생겨난다. 더 이상 나를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고, 가르치려 하는 사람도 없다. 스스로 시간과 돈을 들여 배우지 않으면, 과거에 쌓아놓은 얄팍한 정보와 경험에만 의존해 살아간다. 이는 앞으로 나아가는 삶이 아니라 과거의 경험과 훈련을 조금씩 갉아먹으며 사는 삶이다.
- 실은 알코올과 휘발성 강한 대화, 그리고 겸손한 단어로 자기애를 감춘 수사만 남치는 만남에 지친 것이다. 그런 자리에서 몸과 영혼을 축내며 시간을 몇 년씩이나 허비하다 보면 내 갈증에 공감할지도 모르겠다.
- 어제 프라도 미술관의 수작들을 면밀히 관찰하며, 명작들 사이에 있는 공통점을 발견했다. 바로 생생한 화풍을 바탕으로, 자극과 아름다움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사실이었다. (...) 그렇기에 그 강렬함과 평온함이 뒤섞인 명화는 보는 이를 충격에 한 번 빠트렸다가, 이후에는 점차 작품이 풍기는 이율배반적인 서정성에 빠지게 만든다. 즉, 파괴적인 강렬함과 평화로운 안온함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관람객은 작품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한데, 이 모든 것은 화가의 생동감 넘치는 터치 덕분에 가능하다.
이를 글쓰기에 적용해 보자. 글은 한 인간의 나태해진 영혼에 거센 충돌을 일으켜, 그 영혼이 기민하게 살아 움직이게끔 해야 한다. 프라도의 많은 명화들이 일견 충격을 선사해 관람객의 동면 중인 영혼을 뒤흔들어 깨우듯 말이다. 따라서 화가들이 유려한 붓 터치로 마음을 서정적이고 평화롭게 그려내듯, 작가는 혼을 쏟을 만큼 아름다운 문장을 쓰도록 경주해야 한다.
동시에, 그 속에는 독자의 시선을 잡아끄는 자극이 있어야 한다. 모든 문장이 아름답고 생생하기만 하면 쉽게 읽힌 후에, 쉬이 잊히기 때문이다. 수백 점이 넘는 명화들 사이에서 관람객의 발길을 멈추게 하는 작품에는 모종의 자극이 담겨 있다. 이런 이율배반적 혼합이 글쓰기에도 필요한 것이다. 그렇기에 감히 고백하자면, '이제까지 여러분은 제가 한국의 골방에서 50일간 유럽 여행을 상상하며 쓴 글을 읽었습니다'라는 식의 자극은 곤란하겠지만, 우아함을 잃지 않는 자극은 양념 정도로 필요하다.
- 세월이 흘러가면 모두가 변하는 건, 어리기 때문이라고. 베를린에서 다닐로를 만났을 때는 서른여덟 살이었는데, 미처 몰랐다. 그때의 내가 어렸다는 것을. 친구들도 어렸다는 것을. 그때엔 모두가 혼자였고, 모두가 내일을 전혀 알 수 없었고, 그렇기에 모두가 곁에 있던 서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포근한 사실을 그때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 다닐로와 파비오와 엘레나, 한국에 오겠다고 호언장담한 호세 씨, 그리고 무슨 영문인지 "민석 씨가 와줘서 우리에게 힘을 줬다"며 정성스레 쓴 카드에 여비까지 챙겨준 형수와 팔촌 형까지. "대체 제가 한 게 뭔데요?" 나는 받을 수 없다며 고사했다. 그러자 형수가 겸손하면서도 단단한 어투로 말했다.
"민석 씨. 영국에서 삼십 년 넘게 살았는데, 아직도 타국 생활 힘들어요. 그런데 민석 씨가 이렇게 찾아와서 일주일을 온기 있고 재미있게 만들어 준 게 고마워서요."
사실 이 글을 쓰는 지금 코끝이 약간 찡하고 눈시울마저 젖고 말았다.
어쩌면 나는 낯선 도시가 궁금해서가 아니라, 이런 존재들을 만나고 싶어 여행을 떠나는 건지도 모르겠다.
- 쑥스럽지만, 대체 왜인지 모르겠다. 삶의 한 때에 불과한 고작 두 달 남짓을 보내고 떠날 뿐인데, 상실감이 밀려온다. 집으로 간절히 돌아가고 싶었지만, 막상 떠날 때가 되니 이상한 미련 같은 게 몸에 달라붙어 버렸다. 이곳에 와서 매일 일기를 쓰고, 매일 학원에 가고, 매주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매일 도전과 같은 일상을 보내고, 송곳 같은 거북선 위에 엉덩이를 맡겼던 나날을 그리워할 것 같다. 그러지 않으리라 매번 다짐했지만, 결국은 늘 그래 왔으니까. 앞으로 내게 서반아 어떻게 기억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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