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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읽은 것이 아니라 한 지문에서 발췌함
 
○ 라도삼 <비트의 문명 네트의 사회>
 
- 아날로그 상태에서 모든 대상은 하나의 집합적 결합체로 존재한다. 각각의 질료는 오로지 결합되어 있을 때만 그 의미를 가질 뿐, 분리되어서는 결코 존재하지 못한다. 책상은 나무와 못이 결합하여 책상의 형태를 갖추었을 때만 책상이 되며, 같은 나무라고 해서 책상과 의자가 같을 수는 없다. (...) 아날로그 상태에서 모든 대상은 다양한 질료들의 집합적 결합체로 존재하며, 각각의 질료는 그때 그때의 환경에 따라 자신의 형질로 밖을 드러내게 된다. 그러기에 아날로그 상태에서 대상은 하나의 정점(dot)을 지니지 않는다. 빛의 흐름과 신호의 강약에 따라 그것은 끊임없이 변화해간다. 아날로그 상태에서 대상은 모호하고 다중적일 수 밖에 없으며, 항상 변이하는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사회적은 약호체계에 따라 다중적의 기의를 포획하는 것일 뿐. 
 
(...) 이에 반해 디지털 세계에서는 물질은 비트의 형태로 존재한다. 아날로그의 아톰과는 달리 비트는 연속성이 아닌 불연속적 단면으로 구성된다. 모든 대상은 끊임없이 절단하여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하나의 점(dot)으로 전환되고, 각각의 점에는 0과 1의 이진법 부호가 입력된다. (...) 각각의 질료는 대상으로부터 분리된 채, 자기 스스로 재현하며,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모든 대상이 집합적 결합체로 존재하는 몰적 상태의 아날로그와는 달리, 디지털 세계에서 대상은 분자(molecule)적 상태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註) 디지털 관점에서 세상은 단순히 그것들의 집할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구성원들 개인이며 사회의 의미는 부정한다. 모든 것은 불연속의 상태이며 중요한 것은 각 대상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 진중권 <반대를 위한 문법적 착각> 한겨레21 1999년 7월 15일
 
- 철학은 문법적 착각의 문제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철학적 문제란 언어의 사용법을 착각하여 특정 영역에만 타당한 어법을 마구 다른 영역에 옮겨놓음으로써 발생하는 요술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철학에 남은 과제가 있다면, "언어라는 수단으로 우리 오성에 걸린 마술과 싸우는 것"이다. (...) 또 이건 어떨까? 나는 남자다. 누군가 옆에서 말한다. "나는 당신이 남자라는 데에 반대한다." 우습지 않은가? 그럼 이건? 나는 이성애자다. 누군가 옆에서 말한다. "나는 당신이 이성애자라는 사실에 반대한다." 이것도 우습다. (...) 이런 것들은 찬성이나 반대라는 말이 유의미하게 사용될 수 있는 맥락이 아니다. 그걸 논의대상으로 삼아 찬반을 표하는 그 행위 자체가 인권침해인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문법적 착각에서 비롯된 미신이며, 철학은 오성에 걸린 이 마법과의 투쟁이다.
 
 
○ 2004년 서강대 정시논술 문제 中
 
- 육체를 성적인 맥락에서 성적인 자극과 흥분 상태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다루는 것이 외설이라고 한다면, 예술이 그와 같은 표현 형식을 사용할 때는 분명히 예술도 외설이 아닐 수 없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고정관념으로 고착화된 '예술이 아니면 외설'이라는 식의 개념 정리는 그런 의미에서 잘못된 것이다. 육체는 성적으로 다루어질 자유를 가지며, 예술을 포함해서 사회의 모든 외설적 성 표현물을 모조리 금기시할 수는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범죄적 수준의 반사회성을 띠는 경우에 해당하는 성 표현물들로 국한된다. 이 점에서 외설과 형법에서 말하는 '음란'은 의미가 달라진다. 소설은 법이 보호하는 예술의 자유의 보호 영역에 속하고, 예술은 존재 그 자체로서 사회적 가치를 지닌다. 예술은 현실을 반성하고, 현실의 보이는 것 그대로를 회의하고 정체를 뒤집어 보는 실험의 성격을 갖고 있으므로, 예술적 실험은 본질적으로 기존 가치, 질서와의 충돌을 내포할 수 있다. 이것이 예술이 지니는 하나의 본질적 기능임을 받아들여야 하고, 예술은 사회에 대한 부정으로서의 사회적 가치를 지닌다. 
 
 
○ 에머리히 코레트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인간의 태도를 거리감 유지의 능력으로 특정지을 수 있다. 인간은 사물을 직접적으로 본능에 얽매여 경험하지 않기 떄문에 이 사물과의 거리와 간격을 유지할 수 있다. 이로써 인간은 스스로 자연적이고 본능적인 본질을 초월하는 존재로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까지도 거리와 간격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이로써 인가은 더 높은 위치와 더 넓은 시야를 획득하게 된다. 이때 비로소 사물 자체의 고유한 존재와 의미 안에서 사물에 대한 정확한 파악과 이해가 가능하게 된다. 오로지 인간만이 하나의 의미 형태를 파악할 수 있고, 의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 그러므로 인간의 세계는 결코 완성된 세계도 고정된 세계도 아니다. 인간의 세계는 끊임없이 확대되고 계속 형성되어야 할 열려 있는 세계이다.
 
(...)
 
인간 행동의 기본 구조로서 나타나는 것은 직접 주어진 바로서의 지양을 의미하는 중재된 직접성, 그리고 자발적 중재를 의미하는 중재된 직접성이다. 이 중재된 직접성은 그 근본에 있어서 우리가 자유라고 부르는 바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자유의 원초적인 본질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자유를 '기본 자유'라고 한다. (...) 인간의 자유는 절대적인 자유가 아니라, 상대적이고 조건지워진 자유다. 인간의 자유는 이미 인간의 유한한 본질에 의해 그리고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상황에 의해 제약받고 있다. 이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상황 안에서 인간은 각각 제한된 가능성들과 대결해야 하고 결단을 내려야 한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유는 인간의 자유로운 결단에 당위와 가치의 규범이 미리 주어져 있다는 의미에서 또한 제한된 자유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자유는 의미가 없는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선의 인정과 실현안에 발생하는 의미 있는 자기 발전이다. 자유는 선과 존재의 당위에 예속되어 있따. 바로여기에서 인간의 자유는 참된 의미를 갖게 된다. 
 
 
○ 환경을 바라보는 서양의 관점과 이어령의 중간항 문화
 
- 서양철학자 중에서 다름과 같은 주장을 한 학자가 있었다. "방황하고 있는 자연을 사냥해서 노예로 만들고 인간의 이익에 봉사하도록 해야 한다." 더나아가, "그녀(자연)는 구속되어야 하고, 과학자의 목적은 고문을 해서라도 자연의 비밀을 밝혀내는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 주먹과 손바닥으로 상징되는 이항대립 체계는 서구 문화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기본 체계이다. 천사와 악마, 영혼과 육신, 선과 악, 괴물을 죽여야 공주와 행복한 결혼을 한다는 이른바 세인트 조지 콤플렉스가 바로 서구 문화의 본질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서양에는 이항대립의 중간항인 가위가 결핍되어 있었던 것이다. 주먹과 보자기만 있는 대립항에서는 어떤 새로운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 가위의 힘, 말하자면 세 손가락은 닫혀 있고 두 손가락은 펴 있는 양쪽의 성질을 모두 갖춘 중간항을 발견하였따. 열려 있으면서도 닫혀 있는 가위의 존재, 그 때문에 이항대립의 주먹과 보자기의 세계에 새로운 생기가 생겨난다. 주먹은 가위를 이기고 보자기를 이기지 못하며 보자기는 주먹을 이기는, 그 어느 것도 정상에 이를 수 없으며 그 어느 것도 밑바닥에 깔리지 않는 서열 없는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어령, '중간항의 문화')
 
 
○ 신영복 <더불어 숲>
 
- (...) 나는 카트만두에서 만나는 이 모든 것이 한마디로 '문화의 원형'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오늘날의 문화가 치장하고 있는 복잡한 장식을 하나하나 제거해 갔을 때 최후로 남는 가장 원시적인 문화의 모습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삶과 그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 '문화의 자연(Natural of culture)'이라고 생각합니다. 문화 산업(culture industry)이라는 말이 있지만 문화란 그 본질에 있어서 공산품이 아니라 농작물입니다. 우리가 이룩해 내는 모든 문화의 본질은 대지에 심고 손으로 가꾸어 가는 것.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사람에게서 결실되는 것입니다. 문화가 농작물이라는 사실이 네팔에서처럼 분명하게 확인되는 곳도 드물다고 생각됩니다. (...) 우리가 문화의 원형을 만난다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근대 이후의 산업화의 과정은 한 마디로 찰신화와 물신화의 과정이었습니다. 인간 내부에있는 자연을 파괴하는 과정이었으며 동시에 외부의 자연을 허물고 그자리에 '과자로 된 산'을 쌓아온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앞으로 예쌍되는 영상문화와 가상문화에 이르면 문화란 과연 무엇이며 이러한 문화가 앞으로 우리의 삶과 사람에게 무엇이 될 것인가를 심각하게 묻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진정한 문화란 사람들의 바깥에 쌓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심성 속에 씨를 뿌리고 사람들의 관계속에서 성숙해 가는 것이라 믿습니다. (...)
 
 
○ 김유경 <국민국가의 집단기억과 역사교육·역사교과서> 中
 
- (..) 익히 알려진 바대로 20세기에 두 번의 세계대전으로 체현된 유럽 문명의 파국적 경험은, 당시 국민적, 민족적 정체성의 확립을 넘어서 타민족, 타국민, 타인종에 대한 자민족, 자국민 우월감을 조장하는 지경으로까지 진전된 근대 유럽의 역사인식 및 선전, 교육과 무관하지 않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활발해진 역사인식의 방향전환, 유럽적 정체성의 강조는 그들이 겪은 경험에 대한 반성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 역사파악의 자세가 달라지고 이에 따라 역사교육의 목표와 방법이 달라진 것도 물론이다.
 
과거 자체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존재한 인간의 과거 파악, 즉 역사학은 불가피하게 현재적 관심과 이해관계의 그물망 속에 놓이기도 하지만, 사료의 부족과 인간 능력의 한계로 과거의 작은 측면조차 남김없이 그려낼 수가 없는 불완전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파악의 진실성, 역사적 진리의 존재 가능성이 부정되는 것으 ㄴ아니다. 건전하 ㄴ상식을 가지고 있는 역사학도는 자기 작업의 결과가 나중에는 극복되고 수정될 것이라는 각오를 하고 있지만, 또한 수많은 동업자들의 노고가 모이고, 동업자 및 역사를 알고 싶어하는 대중들과의 의사소통과 토론을 통한 검증 속에서 역사적 진리에 접근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다. 요컨대 역사적 진실은 부지런하고 겸허한 사람들의 노력 속에서 축적되고 공유되는 '의사소통적 진실'이다. (...)
 
유럽인들이 2차대전 이후부터 개선해온 역사교육은 이런 점을 전제하여 학습자들의 '역사의식', '역사적 사고'를 함양하는 데 주된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하여 역사교육은 어린 학생들이 역사인식의 이러한 원리적 속성을 인식하고, 제한된 학습 상황에서 이를 실천하는 '방법지향적', '문제지향적' 구조를 따르고 있다. 사회 전체가 그러한 과거를 생성하는 데 긴밀히 연관되어 있던 과거의 오만한 역사학, 역사파악 자세를 반성함으로써, 역사를 학습하는 이들이 역사학의 특유한 작업 경로를 통해서 비판적 이성을 갖춘 '작은 역사가'로 형성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학, 역사 교육은 단순히 완제품으로서의 집단기억과 역사상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학습자가 학습과정을 종료하고 나서도 시간의 흐름과 상황의 변동에 따라 기억을 지속적으로 수정, 관리하는 역동적 과정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 레이첼 카슨 <침묵의 봄>
 
- 원시적 농업시대에 곤충은 농부들에게 별로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곤충으로 인한 문제가 심각해진 것은 농업이 본격화 되고 대규모 농지에 대한 작물 재배를 선호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농사를 짓게 되면 특정 곤충 개체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 단일 작ㅁ루 경작은 자연의 기본적 원칙이라기보다는 기술자들의 선호하는 방식이다. 자연은 자연계에 다양성을 선사했지만 인간은 이를 단순화하는 데 열성을 보이고 있다. 트정 영역 내의 생물에 대해 자연이 행사하는 내재적 견제와 균형 체계를 흐트러뜨리려 애쓰는 것이다. 자연의 견제로 인해 각각의 생물들은 자신들에게 적합한 넓이의 주거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일 작물을 경작할 경우에는 다른 작물 때문에 널리 퍼져나갈 수 없게 된 해충이 급증하게 된다. 
 
 
○ 무이, <글로벌 마케팅과 광고: 문화적 역설의 이해>
 
- 워털루 전투 후 웰링턴 공작과 나폴레옹이 만난 자리에서 웰링턴은 다음과 같이 나폴레옹을 비난했다. "당신은 권력을 위해 싸우지만, 우리는 명예를 위해 싸운다." 이 말에 나폴레옹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지. 인간은 항상 자신이 갖고 있지 못한 것을 얻기 위해 싸우는 법이지." 
 
모든 문화는 각 문화가 지향하는 가치와 동시에 그와 반대되는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가치 패러독스는 자유와 소속감, 전통과 혁신, 질서와 혼돈 등과 같은 가치체계 상의 상충되는 가치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는 우리 인생에서 바람직한 가치(the desirable)와 바라는 가치(the desired)의 상충을 의미하며, 인간이 해야만 하는 것과 그들이 하고 싶은 것의 딜레마를 반영하기도 한다. 우리는 살이 찌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따라서 먹는 것을 절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먹는 즐거움을 원한다. (...) 
 
개인의 자유는 미국 사회에서 매우 강력한 문화 요소이나, 집단에의 소속감 역시 마찬가지이다. 자유와 소속감이 모두 동시에 동일 문화의 지향가치라는 것은 역설적으로 보이나, '자기 방식대로 하기', '독립적으로 생활하기' 등이 중심인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역으로 사람들이 어딘가에 소속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개인들은 고독에 빠질 수밖에 없기 떄문이다. 반면, 일본에서는 소속감이 문화의 필수적인 부분이면서도, 사람들은 개인주의적으로 행동하려고 노력한다. (...) 광고는 때로 그 사회의 결핍된 가치를 드러낸다. '행복한 가족'과 '소속감'을 주제로 한 감성적인 광고는 미국에서 자주 등장하나, 일본에서는 이미 삶에 내재된 부분이므로 이를 주제로 한 광고는 많이 사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개인적 성공, 자립 등의 동기가 더욱 효과가 있을 것이다. 
 
- 한 문화에 속한 사람의 범세계적인 사고는 다른 문화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문화제국주의로 비칠 수 있다. 사람들이 사고하고 지각하는 방식은 자신의 문화체계를 따른다. 사람들이 판단하는 유사성이란 그들 자신의 문화체계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일본의 개인주의화 현상을 두고, 일본이 서구와 비슷하게 변하고 있다고 얘기하는 것은 '의사유사성(pseudo-similarity)'이다. 전세계의 젊은이들이 코카콜라를 마시고 청바지를 입는 것을 보며 그들이 다 똑같아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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