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감상
정말로 몇 년만에 꼭 다 읽어야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완독한 책이 나타났다. 절정에 이르러서, 물이 막다른 곳을 감아 빠져 넓은 곳으로 나가듯 말끔히 정리되는 결말부분의 필감도 정말 좋다. 책을 덮으니 책 속에 온전히 들어갔다가 나온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다.
저번 주에 읽었던 <정도전과 그의 시대>라는 책은 책이 강연을 모은 강연집 같은 느낌이라 soft했다. 그래서 비교적 무거운 내용의 <정도전을 위한 변명>을 더 재밌게 읽은 것 같다.
정도전과 그의 시대 또한 쉽게 풀어내는 내용속에 국제 정세라던지 디테일한 부분까지 잘 짚어냈다면, 이번 정도전을 위한 변명은 그야 말로 정도전에 대한 다각도적인 방면에서의 평가와 정도전의 관점에서 본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책이었다. 수려하거나 내용에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고 할 정도로 훌륭한 표현도 많아서 글을 쓸 때 참고하고 싶은 멋진 표현도 많다.
그 이전에는 다만 정치가이자 신진세력의 하나로 여겨졌던 그가 지금에 와서는 혁명가이자 정치가이자 사상가이며 새로운 시대를 연 역사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2014년 5월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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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속에서
정도전은 왜구의 노에와 첩과 첩자가 된 양반자제들을 향해 "그들이 한 짓은 개돼지만도 못한데도 스스로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이유는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양반 자제란 곧 선비요, 지식인이요, 사회지도층이다. 정도전은 선비란 의에 살고 선비의 삶은 당당한 죽음을 통해 완성된다고 보았다. 의가 없는 선비, 비겁한 지식인, 의무를 저버리는 지도층은 인간답게 사는 길을 포기했으니 금수와 다름없다는 것이다. 그의 신념이 이러했을진대 그가 선비로서 어떻게 최후를 마쳤을지 생각해볼 일이다.
한번 가기 어려움도 아니건마는
어째서 이다지 머뭇거리는지
<삼봉에 올라 경도의 옛 친구를 추억함>
사람이 달과 서로 어긋나니
살아서의 일도 잘 모르는데 어찌 죽어서의 일을 알겠느냐
정치란 무엇입니까? - 내가 먼저 하고 난 연후에 남을 시키는 것이다.
더 자세히 가르쳐주십시오. - 이를 지겹게 여겨 게을리 마라.
- 자로, 공자 -
<滄浪歌>- 창해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물이 더러우면 발을 씻는다.
"취한 것이 곧 절개가 되었다"
실천으로 자기 주장을 책임지는 자는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어찌하여 의로운 자는 곤궁하고, 불의한 자는 부귀한가라며 하늘을 향해 부르짖지 않았다.
정쟁의 먼지구덩이에 빠진 자신을 한탄하지도 않았다.
그는 이제 '곤궁한 정의'가 아니라 '승리하는 정의'에 관심을 둘 뿐이었다.
난세의 정의는 창 끝에서 나오고, 정쟁의 먼지구덩이에서 나온다는 것이 그의 현실 인식이었다.
나라 안의 모든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한다는 정도전의 발상은
조선 후기 실학파에 와서야 본격화되는 토지사상으로, 시대를 초월한 진보적 의의를 띠고 있다.
또한 모든 토지를 국가에 귀속한다는 발상 역시 오늘날의 토지공개념에 비견되는 진보적 토지사상이다.
모든 토지의 국가귀속을 주장한 정도전의 토지정책은,
토지 사유를 인정할 경우 토지가 부의 축적 수단이 되어 한쪽에서는
지주 한 사람이 천사람, 만사람이 먹을 양식을 독점하고........
정도전의 인생이 이상적인 것을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투쟁 과정이었다면,
이방원은 현실적인 것이 곧 이상적이라는 것이라는 논리로 평생을 일관했다.
이방원은 유교 시대에 아버지를 몰아내고 형제의 피를 손에 묻힌 채 정건을 잡았으니
민주주의 시대에 민중의 피를 손에 묻힌 경우만큼이나 씻을 수 없는 도덕적 과오를 저질렀다.
그러나 이방원은 일단 권력을 잡은 뒤에는 사리사욕을 추구하지 않고 나라의 기틀을 세우는 데 전력했다.
이방원의 생각은 단순 명료했다.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기 위해서는 권력이 안정되어야 하며,
왕조 국가에서 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신권에 대한 왕권의 우위를 확고하게 견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역사 진보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것은 정통성 있는 세력, 의로운 세력, 혁신 세력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니다.
정통성 없는불의한 세력이 정통성 있는 의로운 세력보다 역사 발전에 더 큰 기여를 한 경우도 수없이 많다.
정통성 콤플렉스를 극복하려고 분발해서건, 도덕적 세력과 경쟁하다가 더 나은 역사 발전의 진로를 발견해서건,
그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데 기여해왔다. 이방원은 그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그 넓은 천하에 도읍은 넷(서안, 북경, 남경(금릉), 낙양) 뿐이었다. - 풍수설 비판
바라건대 전하는 충분히 생각해서 우선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가지고 참작할 것이며,
점을 치더라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다음에 쳐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어떻게 행동하든 불길한 일이라고는 없을 것입니다.
공께서는 거莒 땅에서 고생하던 때의 일을 잊지 마옵시고
중부께서는 함거에 실려있을 때를 잊지 마소서라고 했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말에서 떨어졌을 때를 잊지마시고
신도 또한 목에 칼을 썼던 때를 잊지 않는다면 자손만대를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짧았던 그들의 전성시대가 주체할 수 없는 역사의 격랑에 휩쓸려 마감되고 말 것임을 그들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하늘은 아무도 특별히 사랑하지 않았다.
그날 밤 죽은 자들은 말이 없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이방원 앞에 줄을 서느라 정신이 없었다.
당당하게 죽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목숨을 구하여 인간으로서의 자존도 체통도 모두 내팽개친 사람도 있었다.
통트기 전에 대세는 기울었고 여드레 만에 이성계가 왕위에서 내려왔다.
파란만장했던 정도전의 삶에도 굵은 마침표가 찍혔다.
천려千慮를 다하여 평생토록 흐트러짐이 없었던
의인이 일실一失의 우를 피하지 못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은 하늘의 탓이 아니다.
천도天道는 무친無親이라 하늘은 아무도 특별히 사랑하지 않는다.
인의의 사람이야 하여 특별히 도와주는 바도 없고,
불의의 사람이라하여 앞길을 가로막지도 않는다. 이기고 지는 것은 인간의 책임일 뿐이다.
오히려 역사는 인의의 길을 가려는 자에게 더 냉혹한 경향이 있다.
쇠는 벼릴수록 더욱 단단해지기 떄문인가.
역사는 그 한때의 흐트러짐을 용납지 않고 정도전에게 준엄한 책임을 물었다.
역사의 추상같음이 이와 같았다.
당시 한양의 도시계획을 지휘했던 인물은 정도전이다.
오늘날 서울의 중심도로인 태평로와 종로의 골격이 이때 결정되었으니,
태평로에 해당하는 광화문 남쪽 육조거리는 길이가 600미터, 가로 폭이 60미터였으며
좌우로 6조와 의흥삼군부를 비롯한 중앙 관청들이 들어섰고,
동대문과 서대문을 연결하여 한양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30미터 대로인 운종가에는 상인들이 자리잡도록 했다.
또 종루에서 남대문까지의 가로폭 25미터 곡선대로로 남대문 거리가 설계되었으니,
육조거리, 운종가, 남대문 거리가 한양의 3대 도로망을 형성했다.
서울 중심가의 동네 이름으로는, 한성 5부의 방명표를 세워한성부를
동부 12방, 서부 11방, 남부 11방, 북부 10방, 중부 8방으로 구획하고
여기에 이상정치를 실현한 도시 공간으로서 적합한 이름들을 지었다.
즉, 인창 인지 인달 관인 의통 예성 명례 숭신 등 유교덕목과
그 실천 내용인 숭교 건덕 관덕 덕성 광화 등 교화와, 낙선 정선 창선 등 선행을 권하며,
태평 건평 안국 여경 서림 등 국가의 평안함을 빌고, 정심 명철 성신 호현 등
심신 수양을 권하는 수진제가치국평천하의 정치철학을 담았다.
재상 중심주의는 그처럼 사심 없이 공동체에 헌신하는 군자적 정치가를 전제한 것이다.
정도전의 재상 중심주의가 왕권을 능멸하고 부정부패를 일삼았던 조선 말의 세도정치와 다른 점이 여기에 있다.
그 때문에 정도전은 재상 중심주의를 주장하면서도 일관되게 공신들의 발호를 견제하고
사병 혁파를 주장하여 권력의 중앙 집중을 지향했다.
경제문감에 정도전이 정리해놓은 재상의 역할론은 오늘날의 국무총리론으로 옮겨놔도 손색이 없다.
먼저 자기를 버린다. 무릇 자기를 버릴 수 있어야 사가 없게 되고,
사가 없은 연후에라야 공에 이를 수 있으며, 공에 이른 연후에라야 능히 천하를 자기 마음으로 삼을 수 있다.
신하는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다.
군주는 신하의 사심을 시초에 제거한다. 때가 늦으면 오히려 해를 가져온다.
때가 아닐 때 나서서 도리를 굽히고 비위를 맞추지 않는다.
도량이 넓으면서도 세심해야 한다.
재상은 천하의 기강이다.
나를 바르게 함으로써 남을 바르게 한다. 내가 바르면 남을 바르게 할 수 있으며
내가 바르지 못하면 남으로부터 바름을 받기에도 겨를이 없을 것인즉,
어찌 임금을 바루고 나라를 안정시키겠는가.
물러나야 할 때는 과감히 물런라 줄 알아야 한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정도전의 재상 중심주의에 가장 부합했던 재상은 바로 정도전 자신이었다.
정도전의 재상 중심주의는 그 자신이 처한 현실을 이론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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