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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제주 4·3 길(다크 투어리즘 / 북촌, 금악, 가시, 동광, 의귀마을)

Varsika 2021. 10. 19.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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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조천 북촌마을 4·3길 - 거리 7km, 2시간

 

1947년 8월 13일 삐라를 붙이던 주민들을 향해 경찰이 발포하여 3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을 시작으로 북촌마을은 4·3 최대 피해를 겪게 된다. 1948년 6월 16일 우도에서 출발하여 제주읍으로 향하던 한 척의 배가 풍랑으로 인해 북촌포구로 뱃머리를 돌렸다. 이 배에는 우도지서장과 순경을 포함한 일행 13명이 동승하고 있었다. 당시 지서장은 북촌포구에 들어서면서 고기 떼를 향해 총을 쏘았는데 이 총소리를 듣고 접근한 무장대에 의해 경찰 2명이 희생되었다. 

 

0. 북촌 너븐숭이 4·3 기념관 : 1949년 1월 17일 북촌초등학교 소쪽 고갯길에서 무장대의 기습으로 군인 2명이 피살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북촌마을에 들어온 토벌대가 마을 주민 300여 명을 대학살한 장소로 2009년 위령제단과 기념관, 위령탑이 설치되었다. 

 

1. 서우봉 일제진지동굴과 몬주기알 : 서우봉 해안에는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20여개의 진지동굴이 있다. 진지동굴은 등록문화재 제309호로 지정되었다.  몬주기알은 서우봉 정상에서 바닷가로 향한 해안절벽을 말한다. 절벽 아래에 천연동굴이 있어 4·3 당시 북촌주민들 뿐만 아니라 함덕주민들도 숨었던 장소다. 썰물일 때 해안가로 접근이 가능하다. 토벌대의 작전이 최고조에 달했던 1948년 12월 26일 경 4~5명의 여성들이 절벽 위에서 총살당했다. 

 

2. 북촌 환해장성

3. 가릿당(구짓머루당)

4. 북촌포구

5. 낸시빌레

6. 꿩동산

7. 포제단

8. 마당궤

9. 당팟 : 1949년 1월 17일 북촌학살 때 북촌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인 북촌 주민들은 군인들에 의해 이곳으로 끌려오자마자 곧바로 총살됐다. 북촌국민학교를 중심으로 동쪽의 당팟과 서쪽의 나븐숭이에 나뉘어 학살되었고, 당팟에서는 약 100여명이 희생되었다. 

10. 정지퐁낭 기념비

 

 

○ 제주 한림 금악마을 4·3길

 

4·3을 거치면서 300여 호의 가옥이 없어지고 주민들이 학살되거나 행방불명 되었다. 웃동네, 중가름, 오소록이동네, 별드르, 별진밭, 새가름, 동가름 등의 마을은 복구되지 못한 채 잃어버린 마을로 남게 되었다. 

 

- 웃동네 가는길 7km, 2시간

잃어버린 마을 비석이 세워진 곳으로 이곳은 4백여년 전에 설촌된 유서깊은 마을로 강씨, 김씨, 박씨, 등 38호 141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1948년 11월 21일경 소개령에 의해 마을은 전소되어 폐촌되었고 주민들은 마을을 떠나 협재리 등지로 흩어졌다. 이 와중에 무고한 주민8명이 희생되었다. 그 후 금악리 재건 명령에도 웃동네는 그대로 방치되었다. 

 

1. 중가름

2. 하르방당

3. 오소록이동네

4. 할망당

5. 웃동네

6. 생이못

7. 금오름과 진지동굴 : 제주도 서부지역 전체를 볼 수 있는 금오름은 지리적 요충지로 일제강점기 때 수많은 진지 동굴이 만들어졌다. 4·3 당시 주민들이 이곳에서 망을 보다가 경찰이 마을로 다가오면 붉은 깃발을, 떠나가면 하얀깃발을 흔들어 마을에 알리기도 했다. 진지동굴은 마을 재건 이후 2개를 나미고 메워버렸다. 영화 <지슬>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8. 포제단

9. 벵듸못

10. 벵듸가름

 

- 동가름 가는길 5km, 1시간 30분

동가름은 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뜻으로 4·3 당시 50여 가구가 살았으나 소개령으로 마을이 폐촌되었다. 

 

11. 새새미

12. 동가름

13. 새가름 각생이네

14. 만벵듸묘 역 : 이곳에 안장된 영령들은 1950년 8월 20일 예비검속이랑 명목으로 송악산 섯알오름 일본군 탄약터(현, 백조일손묘역)였던 곳에서 무참히 학살된 무고한 민간인들이다. 유족들은 마조차 꺼내지 못하고 살다 6년 만인 1956년 3월에야 시신을 수습하여 이곳에 안장하였다.

 

15. 처녀당(아미당) : 하르방당과 할망당 사이의 7남매 중 넷째 막내딸이 처녀의 몸으로 좌정하여 당신(堂神)이 되었다고 전해 내려오는 민속 신화 지역이다. 지금도 그 문화가 계승되고 있어 이곳을 방문할 때는 경건한 자세로 예를 갖추어야 한다. 4·3 당시 이 당에 숨어있다 경찰에 잡힌 무장대 간부가 당 건너편 밭에서 참수되었다. 시신은 밭에 버려지고 머리만이 관덕정 마당 깃대에 걸렸다.

 

16. 포크빌리지

17. 궤동산

 

 

○ 제주 표선 가시마을 4·3길 - 9km, 3시간

 

4·3 당시 약 360여 가호가 있었을 정도로 큰 마을이었으나 초토화 작전과 소개령으로 마을은 폐허가 되었다. 이때 도피했다가 붙잡히거나 도피자의 가족으로 선별된 사람들은 표선리 한모살과 버들못에서 집단 총살당했다. 가시리 사무소 앞에는 마을 재건에 도움을 준 분들의 동상과 공헌비가 세워져있다.

 

1. 가시리 본동 4·3성터

2. 고야동산

3. 한씨방묘 : 600년 전 가시마을을 설촌한 청주한씨 한천과 그 아들의 묘이다. 1392년 한천이 가시리에 정착하는데 공양왕때 예문관 대제학을 지낸 학자라는 것이 알려져 학문을 배우려는 이들이 찾으면서 가시마을이 형성됐다. 원형을 유지하고 있고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제주도 묘제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인정되어 기념물 제60-2호로 지정되었다. 

 

4. 구석물당

5. 면암 최익현 유적비 : 1897년 제주도로 유배를 왔던 면암 최익현이 한천의 후손들이 제주에 살고 있는 것을 보고 크게 감격하여 후손들에게 비문을 써주었는데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6. 마두릿 동산 : 4·3 당시 마을 주민들이 경계를 서던 곳이다. 고야동산에서 깃대를 내리는 방식으로 신호를 보내면 이곳에서 그 신호를 보고 다시 마을 주민에게 신호를 보냈다. 지금은 나무로 가려져 이곳에서 고야동산이 보이지 않는다. 당시 가시리 주민들은 군인을 '노란개'라고 부르고 경찰을 '검은개'라고 불렀는데 외부인에 대한 경계심을 짐작할 수 있따.

 

7. 종서물

8. 새가름 : 4·3 사건때 이곳의 마을이 전소되었다. 1949년 마을이 재건되면서 2가호가 돌아왔으나 또다시 마을을 떠나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다. 

 

9. 가시천

10. 갑선이 오름

11. 달랭이모루 : '흙붉은 동산'이라고도 한다. 이곳에서 1948년 11월 15일 가시리 주민 12명이 희생되었다. 

 

 

○ 제주 안덕 동광마을 4·3길

1670년대 임씨가 정착한 이래 국영여관인 이왕원이 있을 만큼 사통팔달한 곳이었다. 해방 후 미군정의 공출로 불만이 컸던 마을은 관리를 폭행하는 공출반대사건을 일으켜 이후 미군정이 주목하는 마을로 낙인찍히게 된다. 

 

- 무등이왓 가는길 6km, 2시간 30분

1. 임문숙일가 헛묘 : 1948년 11월 중순 이후 큰넓궤에 숨어있던 동광리 주민들이 토벌대에게 발각되자 뿔뿔이 흩어졌다. 대다수가 붙잡혀 재판도 없이 정방폭포 위에서 학살당했다. 시신이 겹겹이 쌓여 썩어 있거나 바다에 떠내려가 찾을 수가 없어서 희생자 9명을 헛묘 7기로 혼백만 모셔 원혼을 위로햇다. 2명은 합묘다.

 

2. 무등이왓마을 소개

 

3. 최초학살터 : 1948년 11월 15일 동광리에 들이닥틴 토벌대는 소개령을 제대로 전달받지 못한 주민들을 무등이왓에 집결시켰다. 주민 10여 명을 호명하여 팔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구타한 후 총살했다.

 

4. 광신사숙터

5. 옛 공고판터

6. 말방에터

 

7. 잠복학살터 : 1948년 12월 12일 토벌대는 이곳에 잠복해있다가 김두백과 일가족 10여 명을 한곳에 몰아넣어 짚더미나 멍석을 쌓은 후 그대로 불 질러 죽였다. 희생자들의 대다수는 여성, 노인, 아이였다.

 

8. 이왕원(국영여관) 터

9. 원물오름

 

- 큰넓궤 가능길 4km, 1시간 30분

1. 말방에

2. 동광분교

3. 삼밧구석마을 터

4. 임씨올레

5. 4·3 희생자 위령비

 

6. 삼밧구석 잃어버린 마을 표석 : 과거 주민들이 옷감과 밧줄을 만들기 위해 삼을 재배했다하여 마전동으로 불리웠다. 임씨 집성촌으로 46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초토화 작전으로 주민들은 모두 큰넓궤 등으로 흩어졌다. 붙잡힌 주민들은 이듬해 1월 정방폭포에서 모두 총살당했다. 

 

7. 큰넓궤

 

8. 도엣궤 : 큰넓궤와 더불어 4·3 당시 동광리 주민들이 집단으로 피난 생활을 했던 곳이다. 굴 내부는 30m 정도로 원래 큰넓궤와 이어져 있었다. 당시에 사용하던 생활용품의 파편들이 아직도 널려있다. 영화 지슬의 촬영장소이기도 하다. 

 

○ 제주 남원 의귀마을 4·3길

마을이 중산간에 위치해있고 다른 지역보다 군경토벌대의 강견진압이 일찍시작 된 곳이다. 

 

- 현의합장묘 가는 길 7km, 2시간

1. 장판거리

2. 의귀초등학교 동녘밭 : 4·3 사건이 한창이던 12월 26일부터 육군 제2연대 1대대 2중대가 학교에 주둔하였다. 1949년 1월 12일 새벽 무장대가 의귀초등학교를 습격하여 전투가 벌어졌고 군인 4명과 무장대 51명이 사망했다. 이 습격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군인들은 의귀초등학교에 수용 중이던 80여 명의 주민들을 동녘 밭에서 학살한다. 이 때 희생자들은 현의합장묘에 안장되어 있다. 

 

3. 현의합장묘 옛터 : 1983년 의로운 넋들이 함꼐 묻혔다는 의미로 현의합장묘라는 이름을 붙였다. 해마당 8월 24일에 이곳에서 위령제를 봉행한다. 

4. 제주 4·3 남원 희생자 위령비

5. 쉼터(의귀천)

6. 헌마공신 김만일묘

7. 현의합장묘

8. 송령이골 : 의귀초등학교 전투에서 사망한 무장대 시신이 묻힌 곳이다. 

 

- 민오름주둔소 가는 길 7km, 2시간

1. 물나는이멩이

2. 옷귀마테마타운

3. 반드기왓

 

4. 민오름주둔소(영궈모루주둔소) : 1952년 100전투경찰사령부 1개 소대가 주둔하여 남아있는 무장대를 진압하기 위해 작전을 펼쳤던 곳이다. 

 

5. 화전마을

6. 전망대

7. 영궤 : 의귀마을 주민들이 토벌대의 강경진압을 피해 은신했던 곳이다. 궤 입구가 넓어 토벌대에 발각되기 쉬웠기 때문에 뢔 머물지 못했다는 당시 주민의 증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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