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포스팅은 삼프로TV 3월 20일 방송을 참고하였습니다.
- 해당 영상의 명칭이 최초 업로드 후 아래와 같이 수정되었습니다.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땅을 노리는 진짜 이유
→ 러시아에 단호한 미국이 이스라엘에는 관대한 이유
→ 우크라이나 침공에 분노하는 서방, 팔레스타인 침공에는 침묵하는 이유
* 포스팅 내용은 방송에 따르되, 일부 설명은 이해를 돕기 위해 순서를 재편집하였습니다.
* 방송 내용 외에 추가한 내용은 별도 표시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리
팔레스타인은 아직도 국가로 공인되진 않았다. 오스만 투르크 시절부터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그 지역에 살았던 것은 사실이다.
이스라엘은 경상도 정도의 면적을 갖고 있다. 중앙에 강낭콩을 쪼갠 것 같은 영역을 웨스트 뱅크(요르단 강 서안)이고 반대편 지중해에 가자지구가 있다. 분쟁이 계속 일어나는 곳은 웨스트 뱅크와 예루살렘 지역이다. 예루살렘 북동쪽에는 갈릴리 호수가 있으며 요르단 강으로 이어지며 사해까지 이어진다. 강은 사해에서 끝나고 다른 바다로 나아가지 않는다. 본래 사해는 죽은 바다라고 하여 가능성이 없는 바다로 인식되었으나 이후 미네랄이 굉장히 풍부한 것으로 밝혀져 의약품과 화장품에 활용되어 새로운 캐시카우가 되고 있다.
갈릴리 호수부터 사해까지는 가파른 협곡이다. 예루살렘과 협곡의 꼭대기는 해발 400m 정도이며 사해는 반대로 해발 -400m이다. 예루살렘에서 사해까지는 20~30km 거리인데 가는 내내 내리막으로 내려가는 느낌이 들어간다. 갈릴리 호수 인근의 골란고원에서 바라보면 요르단 강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다. 과거 이곳은 시리아의 영토로 이스라엘은 수원지인 요르단 강에 문제가 생길까 늘 염려했다. 중동전쟁을 거치며 지금은 이스라엘이 실효지배를 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정체성
다비드 벤구리온이 나라를 세울 때 3가지의 정체성을 규정했다.
1. 유대민족의 나라
2. 민주주의 국가
3. 야훼께서 주신 이 땅을 보전해야 한다. (One - state, 분할되지 않는 단일 국가)
* 유대인의 전통적 자기 정체성 인식
- Habiru(사회적 하층 계급) / Ivri(건너온 이들)
- 불멸의 민족(선민사상) : 디아스포라와 알리아의 반복
유대인들은 절대 멸절되지 않는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중동 지역에서 수많은 제국이 흥망성쇠를 거듭했고 많은 민족이 사라졌으나 유대인들은 2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명맥을 유지해왔다. 여기에서 오는 자부심이 있다. 반면에 멸절되지는 않으나 신의 뜻을 거스르면 벌을 받는다는 믿음도 있다. 그 벌(고난)은 쫓겨나 떠돌아 사는 것(디아스포라)이다. 즉, 멸망되지 않더라도 예루살렘을 떠나 살면 그것을 고난으로 받아들인다. 그 원형은 출애굽기 전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시절이라고 생각한다.
유대 민족에게는 어떤 왕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다가 타지에서 종살이를 하고, 다시 흩어지는 것을 반복하다가 결국에는 예루살렘으로 다시 모이는 것이 더 중요한 요소이다.
유대인들에게 선민의 땅은 아브라함의 여정(Abraham's Journey)이 지나간 전체 영역이다. 근본주의 시오니스트들은 이 모든 영역을 약속된 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 땅에 정주하지 못했다. A.D. 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의 장군 티투스에 의해 초토화되고 이때로부터 유대인들은 2천 년의 디아스포라를 겪게 된다.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건국되기 전까지 디아스포라는 계속된다.
디아스포라와 탄압
북부 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 유럽(서유럽&동유럽)으로 크게 2곳에 나누어 살았으나 기독교 공동체인 유럽에서 유대인들은 많은 핍박을 받았다. 중세 암흑시대의 기독교인들이 보기에는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인 민족이자, 개종도 하지 않았기에 탐탁지 않은 존재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들은 이교도였기에 매점매석, 고리대금업(성서에서 고리대금업을 금지함) 등 기독교인들에 비해 자유로운 경제활동이 가능했다. 유럽 전역에 흩어져서 살았기에 정보교환도 광범위하고 빨랐다. 유대인들의 부의 축적이 커질수록 그들을 향한 반유대주의(Anti-Semtism)도 강해졌다. 유대인을 흡혈귀처럼 묘사하기도 했다. 특히 전란기나 사회가 흉흉할 때는 언제나 희생양이 되었다. A.D 4세기부터 20세까지 반유대주의는 계속되었다.
19세기~20세기를 거치면서 유럽이 전란기에 들어가자 유대인들은 더 큰 탄압을 받게 된다. 특히 러시아 차르로부터 지속적인 학살, 추방이 있었다. 지속된 학살 끝에 19세기 말부터 대이동이 시작된다. 히틀러의 홀로코스트 때에도 대이동이 있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1894년 드레퓌시 사건이었다. 프랑스가 자국의 유대인 장교를 간첩으로 몰아 기소 후 형사처벌을 한 사건이다. 반유대주의로 말미암은 잘못된 기소였다. 에밀 졸라는 "나를 기소하라"라며 이를 비판하기도 했다.
* 대표적인 유대인 탄압 연도 : 1883년, 1904년(폴란드 & 러시아), 1919년, 1924년(폴란드), 1933(G), 1984년(에티오피아 - 솔로몬 작전)
시어도어 헤르젤과 건국 준비
시어도어 헤르젤(Theodore Herzel, <유대국가론>이란 책을 저술하기도 함)이 시오니스트 운동을 주도했다. 1897년 유대인 콘퍼런스가 열렸고 지속된 탄압 끝에 유대인들은 더 이상 탄압당할 수 없다며 나라를 갖자는 시온주의가 봇물 터지듯이 일어나게 한다. 이스라엘 건국의 첫 단추는 로드 차일드 가문이 영국과 손을 잡고 전비를 대는 것이었다. 전 세계 시온주의자들을 모아 동원하여 읍소하고, 펀드 레이징을 하고 직접 협상을 진행했다. 건국 전반을 디자인한 것이다.
이후 영국은 이스라엘의 건국까지는 아니지만 유대인들만의 안전한 거주지를 보장하기로 한다. 당시 시오니스트들의 상당수는 유대교 신자들이 아니었다. 동유럽 지식인이 대다수였기에 무신론자, 막시스트 등 진보적 성향의 사람도 많았다. 이들은 민족주의자 성향이 더 강했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팔레스타인이나 예루살렘을 고집할 이유는 없었다. 단지 안정적인 거주지만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영국이 유대인 거주지로 처음 제안한 곳은 사이프러스(키프러스)였다. 그러나 내부에서 정착하기가 어렵다는 유대인들이 반대했다. 두 번째 제안으로는 우간다, 세 번째는 아르헨티나였다. 아르헨티나에는 유대인 정착민들도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유대인들도 찬성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제기되었다.
애당초 유대인들만의 국가 혹은 거주지를 건국하자는 주장이 나왔을 때 울트라 오소독스(초정통파) 학자들은 이를 반대했다. 그들의 의견은 아직 유대인들이 신의 벌을 충분히 받지 못하였으니, 약속된 땅으로 돌아갈 시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신의 뜻을 거스르고 인위적으로 약속된 땅을 만들어 정착한다면 유대인들에게는 더 큰 벌이 떨어질 것이란 말도 했다. 이것은 유대민족의 정체성을 흔드는 문제였다. 시어도어 헤르젤과 벤구리온 등이 이들을 끈질기게 설득하여 결국 이들 중 일부의 지지를 받아 낸다. 그러나 이들은 아르헨티나를 반대했고 시온산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것이 구약성서의 실현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이 영국에 받아들여졌다.
* 후에 이스라엘 건국 세력은 후에 시오니스트들에게 많은 특권을 주며 이스라엘로 데려왔고 지금도 당시 이스라엘 건국에 동참한 시오니스트들은 기득권 세력으로 평안한 삶을 누리고 있다. (이스라엘 건국의 역사, 전통, 이념, 스토리가 필요했던 것)
* 초정통파 유대인들은 현재 약 10% 정도의 인구비율을 보이고 있으며 이들을 지지하는 이들이 20~30% 정도 된다. 형식사 유대교인들이 30%이며 나머지 30% 정도는 완전한 세속자들이다. 실제로 텔아비브는 유럽에서 가장 동성애자가 많은 도시이기도 하다. 반면에 예루살렘은 가장 종교적인 도시다. 예루살렘의 종교인들은 텔아비브를 소돔과 고모라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스라엘 역시 이민 국가이기 때문에 외부의 시선처럼 단일화된 사회를 구성하진 못했다.
1917년에 영국의 외상이었던 밸푸어가 로스차일드경에게 편지를 보낸다. 영국이 유대인의 팔레스타인의 안전한 거주를 약속한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이 현대 중동에서 가장 중요한 문서 3가지 중 하나인 '밸푸어 선언'이다. 이스라엘의 건국을 최초로 승인한 문건이다. 이후 영국의 위임통치(1920년 ~ 1948년)와 유엔 분할 결의안을 통해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건국된다.
* ISRAEL의 국호는 본래 '야곱이 하느님과 싸워서 이겼다'라는 뜻인데 현대 근본주의자들은 이스라엘을 둘러싼 국가들의 이름이라며 해석하기도 한다. Iraq, Syria, Royal Arab kingdom of Jordan, Arabia(Saudi), Egypt, Lebanon. 요르단은 다소 인위적인 뉘앙스가 강하다.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을 건국할 때는 기존에 살던 곳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다시 가나안 땅에 새롭게 정착한 것이다. 따라서 새로이 그들을 흡인할 만한 스토리텔링이 없었다면 아마 이스라엘 건국과 성장은 어려웠을지 모른다. 지금도 이스라엘은 조상, 전통, 역사에 대한 것들 존중이 강하고 그것으로부터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무신론자 시오니스트들은 이러한 요소를 건국 과정에서 잘 이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루살렘에서 사해로 내려가는 길에 '마사다'라는 요새가 있다. 과거 유대인들이 로마에 결사 항전했던 격전지다. 이스라엘의 초급장교들은 반드시 마사다에서 숙영을 하게 된다.
시오니즘의 배경은 안티 세미티즘(반유대주의)으로부터 시작했고 1948년 5월 14일 건국이 되면서 결실을 맺게 된다. 그러나 5월 14일 전까지는 피해자였으나 이제 가해자가 된다. 5월 14일은 유대인들에게는 대희년이지만 쫓겨난 팔레스타인인에게는 대재앙의 날(The day of castrophe)로 불린다. 건국 당시에는 팔레스타인 인구가 훨씬 많았으나 이후 이스라엘로 유입된 유대인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랍의 인구 증가가 훨씬 빨라 이스라엘은 해외 유대인들을 이스라엘에 정착시키는 부서(알리아)가 따로 있고 장관까지 두고 있다.
예루살렘에 대한 유대인들의 그리움
세계 각지의 유대인 부자들은 (태어나서 한번도 예루살렘은 가본 적이 없더라도) 사후에 예루살렘이 묻히고 싶어 한다. 이 때문에 예루살렘에 매장하는 비용은 아주 비싸다. 예루살렘 올드시티를 두고 감람나무 산(the Mountain of Olives)에서 옛 성전터를 바라보는 사면에 무덤이 모여있다. 전승에 따르면 메시아가 온다면 올드시티 동쪽에 황금 문이 열리고 그때 죽었던 유대인들이 모두 부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전터를 바라보는 사면에 묻힌 사람들이 가장 먼저 부활한다는 이야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