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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나라 이웃나라 인도 근현대사편

Varsika 2023. 5. 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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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앨런 옥타비안 흄 과 인도국민회의

영국의 관리이자 정치인이느 흄은 마하트마 간디와 더불어 인도 독립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아시아 최초의 민족주의 정당인 인도국민회의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849년 스무 살의 나이에 세관원 신분으로 인도에 부임한 그는 식민지 인도의 현실을 목격하고는 인도 민족주의 운동을 일으킨다.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단합 추구)

 

인도국민회의는 1885년 12월 뭄바이에서 창립총회를 열었으며 흄은 사무총장을 맡아 1908년까지 봉사했다. 그러나 흄의 기대와는 달리 초기 국민회의 대표들은 인도의 자주와 독립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이에 실망한 흄은 1886년 <깨어라>라는 시를 발표했으나 별다른 변화가 없자 1894년 영국으로 돌아간다. 1894년이후 1908년까지는 사무총장의 위치에 있었으나 영국에 체류하였다. 초기 인도국민회의는 영국인도 구성원으로 포함하였으며 영국과 인도의 긴밀한 관계를 강화하는 등 영국에 우호적인 단체로 출발했다. 

 

이후 1905년, 벵골 분할부터 반영 민족주의가 활발히 전개되고 특히 1920년부터는 간디가 독립운동을 이끌면서 국민회의의 역할이 커진다. 국민회의는 인도 독립 이후에도 1977년까지 인도를 통치하는 유일한 정당이었따. 그러나 이후에는 인도인민당(BJP) 등의 도전을 받아 2019년 총선 기준 543석 중 52석을 확보하는데 그친다.

 

* 벵공 분할령(Act of Bengal partition, 1905) : 벵골은 힌두교를 포함한 이슬람교 등 모든 종교의 중심지이자 영국의 인도 통치 거점이었으며 동시에 인도 경제의 중심지였다. 특히 국민회의 활동의 본거지이기도 했는데 벵골지역의 민족주의가 거세지자 영국은 divide and rule의 일환으로 벵골을 분할시키고자 했다. 서벵골에는 힌두교도, 동벵골에는 무슬림이 많다는 것을 이용하고자 했으며 힌두교와 이슬람교를 반목하게 만드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다. 동벵골에서 주도권을 잡은 이슬람계는 1906년 전인도무슬리연맹(ML, All India Musile League)을 결성한다. 그들이 세운 3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다. 무슬림의 권익을 보호하며, 무슬림의 단결을 촉진하며, 영국에 충성한다. 

 

힌두계 국민회의는 이에 반발하여 영국 상품 배격 운동, 스와라지(Swaraj, 자치) 운동 등 비폭력 운동은 전개한다. 결국 영국은 1911년 벵골 분할령을 철회한다. 영국은 무슬림계의 반발을 줄이기위해 무굴제국의 수도였던 델리 근처인 뉴델리로 영국령 인도의 수도를 이전한다. 

 

- 세포이 항쟁이 발발한 뒤 1년 6개월이 지난 1858년 11월, 영국 정부는 동인도회사의 모든 권한을 인도 정부와 총독에게 넘겨 직접 통치하겠다고 선언한다. 

* 1857년 6월 칸푸르 학살(철수하던 영국군과 민간인을 분노한 세포이들이 학살한 사건, 칸푸르는 델리와 콜카타 사이에 있는 군사적 요충지로 영국은 학살 이후 잔혹한 보복을 한다. )

 

- 1866년 오리사 대기근

한 해에만 300만 명이 굶어죽었고 60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으나 영국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1870년대 말에는 남인도 대기근이 발생해 800만 명이 굶어죽었다. 영궁은 아일랜드 대기근(1845~1852)과 마찬가지로 인도에도 식량지원을 하지 않았다. 아일랜드 대기근 당시에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 압둘메지드 1세가 경제적 지원을 하자 빅토리아 여왕의 위신을 생각해 오히려 지원금 규모를 낮추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당시 줄어든 아일랜드의 인구는 아직도 회복되지 않았다. (아이리시 디아스포라)

 

- 1877년 인도합병

영국은 세포이 항쟁 이후 20년이 되던 1877년에 인도 제국을 선포하고 영국 왕이 인도 황제를 겸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인도를 영국의 아시아 식민지 경영의 본거지로 삼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은 인도아대륙의 2/3을 직접 통치했고 나머지 부분은 토후국, 번국으로 쪼개어 500여개의 크고 작은 국가로 만들어 간접통치했다. (Princely State)

 

- 힌두계와 이슬람계

이슬람계 : 세포이 항쟁 이전 이슬람 정권인 무굴제국이 존재했다. 무굴 제국이 존재함에 따라 다수의 힌두교도로부터 무슬림들이 보호받을 수 있었고, 현재는 영국의 세력 덕분에 무슬림들이 보호받을 수 있다. 따라서 인도 자체의 변화와 발전이 중요하나 이슬람의 권익 보호 역시 동반되어야 한다. 

 

힌두계 : 하나의 인도, 통합을 통한 변화와 발전 추구(반영국 민족주의 운동)

 

사이이드 아흐마드 칸(1817~1898)은 1888년 한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모든 영국인이 군대와 무기를 버리고 떠난다면 인도는 힌두교의 나라와 이슬람의 나라로 쪼개져 전쟁을 치르게 될 것이다. 그러면 영국이 아닌 또다른 강대국이 인도를 침략하여 영국보다도 더 잔혹하게 인도를 통치할 것이다. 따라서 인도의 평화와 발전을 위해 영국은 계속 인도에 남아 있어야 한다." (두 나라 이론)

 

- 제1차 세계대전과 인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은 인도의 협조를 얻기 위해 자치권을 약속한다. 이에 영국에 적대적인던 국민회의를 비롯한 여러 단체들이 영국을 돕는 방향으로 입장을 선회한다. 반대로 영국에 충성을 맹세한 무슬림연맹은 영국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는 무슬림 국가인 오스만 제국이 삼국 동맹(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편에서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인도는 130만 명의 군인과 노동자를 지원했다. 유럽전선에만 14만 명의 인도인이 투입되었고 중동에서는 70만 명의 인도인이 참전했다. 4만7천 명의 사망자와 6만 5천자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제1차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막을 내린다. 

 

그러나 영국은 인도에 약속을 지키지 않았따. 

 

- 인도방위법(Defence of India Act, 1915)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은 인도방위법이라는 비상조치법(State of Emergency)을 제정하여 시행했다. 전쟁이 끝나면 다시 기존의 통치체제로 돌아와야 했으나 인도인의 자치요구를 억누르기 위해 인도방위법을 무기한 연기할 수 있도록 오히려 새로운 법을 제정했다. (영국인 판사 시드니 롤럿의 이름을 딴 롤럿법 제정. 간디는 이를 천하의 악법Black Act라고 말함) 롤럿법은 영국 의호를 통과하였고 1919년 3월 18일 시행되었다. 

 

시크교도의 성지인 펀자브 지방의 암리차르에서 1919년 4월 13일 학살극이 일어난다. 당시 펀자브주의 주지사였던 마이클 오드와이어는 인도인의 시위와 항의를 무력으로 진압하고자 했고 명령을 받은 레지널드 다이어 장군은 암리차르의 잘리안왈라바그(공원)의 대규모 시위를 잔혹하게 진압했다. 150명의 영국군과 네팔 출신의 구르카 용병이 여기에 투입되었으며 시위대 중 379명이 그자리에서 숨지고 1,200명이 총상을 입었다. 어린 아이와 여성을 포함한 민간인도 희생되었다. 영국 보수당은 다이어 장군에게 Saver of Punjab라고 적힌 십자가를 헌증했다. 아시아인 최초로 191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타고르는 이에 격분하여 영국 왕실이 수여한 귀족 칭호와 작위를 반납해버린다.

 

- 우담 싱(1899 ~ 1940)

펀자브 지방의 시크교도였던 우담 싱은 암리차르 학살의 주범인 마이클 오드와이어 주지사를 암살한다. 학살이 일어난지 21년이 지난 1940년 3월 13일의 일이었다. 1940년대는 간디가 이끄는 독립 투쟁이 가장 격렬했던 시기였기에 그의 암살은 독립투지를 더욱 뜨겁게 했다. 그가 사형 당한 7월 30일은 펀자브주와 하리야나주의 공휴일이다. 학살 현장인 잘리안왈라 공원에는 우담 싱의 동상이 남아있다.

 

- 간디

'마하트마'는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으로 그가 남아공에서 인도로 돌아온 1915년 1월 9일, 타고르가 헌증한 명칭이다. 간디의 본명은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인데 지금은 마하트마라는 명칭이 더 유명해졌다. 인도인들은 그를 '바푸'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국부라는 뜻으로 1944년 국민회의 총재였던 수바스 찬드라 보스가 라디오 방송에서 처음 사용했다. 

 

마하트마 간디는 19살의 나이로 런던에 건너가 런던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해변호사가 되었다. 이후 뭄바이로 돌아와 변호사 생활을 했지만 녹록치 않았고 2년 뒤인 1893년 친척의 요청으로 남아공으로 떠나 그곳에서 21년간 머물렀다. 남아공에 도착한 이듬 해인 1894년 인도국민회의를 본떠 나탈 인도국민회의를 결성한다. 나탈은 남아공에서 인도인이 가장 많은 지역이었다. 이후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과 식민지 차별 정책을 몸소 느낀 간디는 남아공에서 반식민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간디는 식민 지배자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비폭력, 비협조 그리고 '사티아그라하'라는 투쟁철학을 만든다. 사티아그라하란 산스크리트어로 진리(사티아)를 찾으려는 노력(그라하)이라는 뜻이다. 즉 간디는 힌두교도답게 아힘사(비폭력, 불해)를 투쟁방식의 핵심으로 만든 것이다. 1906년 간디는 콜카타에서 열린 국민회의에 참석하여 사티아그라하를 정식으로 제안한다. 국민회의는 간디에게 열렬한 지지를 보낸다. 

 

간디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다음해인 1915년에 귀국한다. 그가 귀국할 당시 이미 환영인파가 구름같이 모여 확고부동한 지도자가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전쟁 중에 간디는 영국에 협조적이었다. 종전 후 자치권을 준다는 영국의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이 약속을 저버리고, 계엄령에 준하는 롤럿법을 선포하였으며, 암리차르 사건까지 발발하자 간디는 전면 투쟁에 나선다. 1925년 간디는 국민회의 의장에 선출되어 인도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간디는 1921년부터 죽을 때까지 인도의 전통 서민복장인 도티를 입었으며 스스로 물레를 돌려 도티를 만들었다. 간디의 독립운동 본거지는 가자라트주의 당시 수도인 아마다바드 교외 사바르마티였다. 간디는 그곳에 수도원, 농촌학교과 비슷한 개념인 아슈람을 만들어 1918년부터 1930년까지 기거했다.

 

1922년 차우리차우라에서 인도인들이 경찰서에 난입해 경찰관들을 몰살시킨 사건이 발생하자 간디는 충격을 받고 사티아그라하 운동을 중지할 것을 명했다. 차우리차우라 사건을 말미암아 비폭력 저항운동의 명분을 잃었다고 본 것이다. 이후 간디는 아슈람에 은둔하면서 여성과 불가촉 천민의 인권향상에 전력한다. (그들도 모두 하리잔 - 비슈누 신의 자식 - 이다) 사티아그라하가 중지된 이후 1930년까지는 인도독립운동이 새로운 방향을 찾는 기간이었다. 1929년 마흔 살의 자와할랄 네루가 국민회우 총재로 선출되면서 인도 독립운동은 보다 급진적이고 역동적으로 변한다. (적극적 파업, 투쟁적 저항)

 

이후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영향으로 영국 정부는 인도에 소금세를 도입하는데(1930년) 간디는 이에 불복해 소금 사티아그라하를 시작하여 단디 행진(사바르마티 아슈람에서 단디 해변까지 385km를 행진)을 전개한다. 이는 인도 독립운동의 중요한 전기가 되었고 간디의 투쟁 방식이 전세계적인 유명세를 얻는 계기가 된다. 4월 6일 간디는 단디 해변에 도착하였고 4월 14일 네루가, 5월 4일에 간디가 투옥된다. 이때 소금세 반대 운동에 동참한 인도인 60만 명이 전국에서 체포된다. 인도 총독 겸 부왕(viceroy)이 었던 어윈 경과 간디는 8차례 만나 협상을 진행하였으나 인도 자치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보수당으로 정권에 교체됨에 따라 아무런 성과없이 협상이 결렬된다. 1932년 1월 3일 간디는 다시 투옥되었고 반영국 투쟁은 더욱 거세게 번진다. 

 

간디의 비폭력 투쟁에 동의하지 못한 무슬림지도자 무함마드 알리 진나는 1920년 무슬림연맹을 이끌고 국민회의에서 탈퇴한다. 그는 1930년대까지 이슬람과 힌두교의 화해를 위해 노력했으나 끝내 이를 포기하고 인도의 독립에 더해 힌두로부터의 이슬람 독립을 추구하게 된다. 간디 역시 최후까지 두 종교의 화해를 위해 노력했으나 독립 이후 힌두교도들에게 지배를 당할지 모른다는 무슬림들의 입장을 받아들였고 이에 격분한 힌두교 민족주의자 나투람 비나야크 고드세에게 암살 당한다. (1948년 1월 30일) 간디는 노벨평화상 후보에 4번이나 올랐으나 끝내 상을 받지 못했다. 

 

- 자와할랄 네루

네루는 정치, 법률의 도시인 알라하바드(네팔과 인접한 인도 동부 지역)의 브라만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바람나 중에서도 가장 높은 판디트(학자)급었다. 판디트는 영어로 master와 동일한 뜻이다. 이에 젊은 날에는 판디트 네루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훗날에는 국민들이 붙여준 애칭 차차(아저씨, 삼촌) 네루로 불렸다. 

 

네루의 아버지인 모틸랄 네루 역시 정치인으로 국민회의 의장을 두 번 역임하였다. 네루는 1905년 16살의 나이로 런던에 건너갔으며 명문 학교를 졸업한 후 1912년 인도로 돌아와 변호사가 되었다. 1919년 암리차르 학살 소식을 듣고 독립투쟁에 뛰어들었으며 1921년 처음 교도소를 간 것을 시작으로 24년에 걸친 독립투쟁 기간 동안 9년을 교도소에소 보냈다.  네루는 투쟁의 목표가 자치권 획득이 아닌 푸르나 스와라지(완전한 독립)임을 분명히 내세웠다. 

 

국민회의 의장이된 그는 1929년 12월, 암리차르 근처 지금의 파키스탄 도시인 라호르에서 회의를 열고 인도 최초의 국기를 게양했다. (이 국기는 1931년 공식으로 인정된다.) 회의가 끝난 1930년 1월 26일, 국민회의는 라호르 결의안을 채택함으로써 푸르나 스와라지를 공식 선언한다. 1월 26일은 인도의 독립 기념일이 되었고, 실제로 인도가 독립한 1947년 8월 15일 이후에는 독립 선언일로 바뀌었다. 

 

네루는 교도소에 있던 1930년부터 1933년까지3 년간 외동딸인 인디라에게 편지로 세계사 이야기를 적어보냈고 이는 1934년 <세계사 편력>이라는 책으로 출간되었다. 로마 제국부터 1933년 히틀러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고 그 안에는 유관순의 독립운동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다.

 

 

- 무슬림과 파키스탄

무슬림 지도자였던 무함마드 알리 진나를 비롯한 무슬림들은 라호를 결의안을 반기지 않았다. 인도가 완전한 독립을 얻게 되면 무슬림들은 다시 힌두교도들의 노예가 될 것이라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1930년 12월 29일 열린 무슬림연맹 알라하바드 대회에서 무함마드 이크발은 공식적으로 두 개의 인도(무슬림 / 힌두교도)를 거론한다. 

 

파키스칸이라는 이름은 영국 켐브리지 대학생이던 인도인 초우드리 라흐마트 알리가 1933년 런던 원탁회의에서 제안한 것으로 페르시아어와 우르드어로 '순결한 땅', '순수한 땅'이라는 의미와 함꼐 펀자브(P), 아프가니스탄(A, 파키스탄 내에도 아프간족이 다수 거주), 카슈미르(K), 신드(S), 발루치스탄(TAN)에서 철자를 떠와 만들었다. (I는 원활한 발음을 위하여 추가)

 

무슬림 세력은 1940년 3월 23일, 라호르에서 채택한 라호르 결의안을 통해 파키스탄 독립을 선언한다. 이를 파키스탄 결의안, 혹은 파키스탄 독립선언이라고도 부른다. 파키스탄에서는 3월 23일을 독립 선언일로 기리고 있다. 독립 기념일은 8월 14일이다. 인도 독립 기념일과 하루 차이가 나는 이유는 당시 인도 총독 마운트배튼 경이 하루씩 양 국가의 독립기념일에 참석해야 했기 때문이다. 

 

- 무함마드 알리 진나

진나는 1876년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태어난다. 네루와 마찬가지로 부유한 환경 덕에 교사를 초빙해 개인교습을 받았고, 1892년 16살의 나이로 역구에 건너가 법학을 공부하였으며 1896년 귀국해 변호사로 활동하다 정치에 입문한다. 1906년 콜카타 국민회의에서의 연설(무슬림들의 벵골 분할령 지지)로 유명 정치인디 되었고, 국민회의의 비폭력 운동을 비판했다. 이와 별개로 1910년대부터 끊임없이 이슬람과 힌두교의 화해를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1929년 전인도무슬림연맹 총재에 단성되었고, 1947년 파키스탄이 독립할 때까지 모든 것을 바친 위대한 지도자였다. 1930년 인도 독립 선언 이후 힌두 세력과 완전히 결별하였다. 1918년 친구의 딸이자 24살 연하였던 라탄 바이 페티트(루티라고 불리기도 함)와 결혼하였으나 루티는 29살의 나이로 뭄바이 타지마할 호텔에서 사망한다. 루티의 묘지는 뭄바이에 있는데 진나는 루티의 묘를 찾은 후 다시는 죽을 때까지 인도 땅을 밟지 않았다. 카라치에 그의 묘가 있다. 

 

- 제2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영국령 인도 제국은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한다. 이는 인도인 및 국민회의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진행된 것으로 간디, 네루를 비롯한 국민회의는 격분하여 인도 참전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투쟁에 나섰다. 네루는 영국에 철저한 비협조를 주장하며 행정 마비를 유도했다. 1935년 제정, 1937년 시행된 인도 정부법(인도의 자치권 확대)에 따라 행정 장관을 비롯한 지방 장관들이 대부분 국민회의, 힌두계 인사였는데 네루의 주장에 따라 국민회의가 지방 권력을 포기했고 이에 지방 행정이 마비되고 만다. 그러나 이는 이슬람 세력이 권력에 다가갈 기회로작동한다. 

 

진나는 영국에 협조하여 독립 국가를 얻어낼 기회로 생각하였고, 1940년 3월 23일 라호르에서 총회를 열어 라홀 결의를 채택한다. 여기서 파키스탄 이름이 처음 공식적으로 등장하였다. 

 

일본이 버마를 점령하고 인도 국경에 이르자 영국은 간디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 협상에 나섰으나 독립에 대한 약속은 하지 않았다. 이에 1942년 8월 8일, 간디는 영국은 인도를 당장 떠나라(Quit India)고 선언하였고 행동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전면적인 투쟁을 선언한다. 영국은 무자비한 탄압으로 대응했고 인도 전역이 전쟁 상태에 돌입한다. 

 

영국은 10만 명 이상을 체포하고 국민회의를 불법 정당으로 지정하여 활동을 막았으며 시위대에는 기관총을 난사했다. 흥분한 군중은 우체국 550개, 기차역 250개, 경찰서 70개소 등을 파괴하며 저항했다. 강력한 탄압과 더불어 1943년 300만 명이 굶어 죽은 벵골 대기근이 발생하면서 인도인의 저항 운동은 잠잠해진다. 간디와 네루를 비롯한 독립 지도자들이 3년 이상 교도소에 갖혀있었고 알리 진나는 국민회의의 견제 없이 파키스탄 독립 작업을 활발히 펼치게 된다. 

 

- 수바스 찬드라 보스(1897~1945)

간디가 국내에서 독립투쟁을 전개했다면 해외에서는 네타지(존경받는 지도자)로 불리던 보스가 있었다. 보스는 간디에게 바푸(국부)라는 명칭을 처음 붙여준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간디늬 비폭력주의에 반대하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을 이용해 영국에 대항할 계획을 세운다.

 

1941년 1월, 보스는 감시를 피해 콜카타를 벗어나 아프가니스탄, 이란, 터키를 거쳐 육로로 독일에 잠입한다. 1941년 4월이었다. 보스는 히틀러가 소련을 정복하면 육로로 인도까지 남하하여 영국군을 몰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1942년 8월 시작된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이듬해 2월 2일 독일군의 항복으로 끝나고,전세가 역전되자 보스의 꿈은 사라진다. 그는 스탈린그라드 패전 6일 뒤엔 1943년 2월 8일, 잠수함을타고 독일을떠나 마다가스카르에 가서 일본군 잠수함으로 갈아타 5월 수마트라에 도착한다. 그는 도쿄에서 열린 대동아회의에 인도 대표로 참석하고 인도국민군을 창설한다. 보스는 동남아에서 영국령 인도군으로 참전하다 일본군에 포로로 잡힌 이들을 인도국민군으로 편입하여 영국과 싸우는 인도 독립군으로 탈바꿈시켰다. 1943년 10월 21일, 보스는 싱가폴에서 자유인도라는 인도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사실상 일본의 괴뢰정부에 가까웠다. 자유인도 정부는 일본군 점령지인 안다만과 니코바르 열도(버마 앞 군도)를 거점으로 했다. 1944년 3월, 일본군과 인도국민군은 인도 동쪽 국경을 넘어 영국군과 임팔 전투를 벌인다. 임팔과 인근듸 코히마는 연합국이 중국에 물자를 보급하는 루트였기에 전략적 가치가 높은 요충지였다. 그러나 일본군과 자유인도군은 임팔 전투에서 대패한다. 특히 일본군은 태평양 전쟁에서 가장 큰 패배를 이곳에서 겪는다. 일본군은 후퇴하기 시작한다. 인도국민군은 인도 민중의 호응ㅇ르 바라며 퇴각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지만 민중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인도국민군은 영국에 대항한 반역자이자 수바스 찬드라 보스는 반란 수괴가 되고 만다. 보스는 체포를 피해 일본으로 가다 타이완 근처에서 비행기가 추락하며 사망한다. 이후 인도로 돌아온 인도국민군은 반역죄로 재판에 서게되지만 인도 국민들의 환영과 네루의 변호에 따라 가벼운 처벌만 받고 풀려난다. 현재 보스와 인도국민군은 간디와 나란히 조국 독립에 목숨을 바친 애국자로 존경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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