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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나라 이웃나라 인도 / 인도와 인도아대륙

Varsika 2023. 5. 4. 0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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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도의 세가지 원칙

- 의회주의 : 나라의 모든 일을 의회에서 결정한다. 대통령도 의회에서 선출하며 수상(총리)는 집권당의 총재가 맡는다. 

- 세속주의(Secularism) : 정치와종교를 분리한다. (프랑스가 대혁명 이후 가장 먼저 정종분리를 도입함) 반면 파키스탄은 국호자체가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이다. 

- 사회민주주의 :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혼합된 사회민주주의는 사유재산을 인정하되 개인의 이익추구보다는 국가와 사회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자연스레 국가자본주의적 성격을 띤다. 사유재산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무산계급체제인 공산주의와 달라서 네루는 자본주의인 미국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인 소련과도 자연스레 거리를 두었다. 파키스탄은 경제 원조 등을 이유로 미국과 동맹을 맺었다. 

 

 

2. 네루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네루는 소련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참고하여 1951년 인도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한다. 소련은 이 정책을 1928년부터 1991년까지 약 13차례에 걸쳐 시행했고, 우리나라 역시 박정희 정권인 1962년 시행, IMF가 올때까지 총 7차례 시행한다. (이후에는 경제를 시장에 맡긴다는 원칙에 따라 폐기)

 

네루의 경제 개발 정책은 공업 발전에 기여한 바 있으나, 계속되는 가뭄 및 전쟁(파키스탄, 중국)으로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더욱이 경제 발전 속도보다 인구 증가 속도가 더 빨랐던 탓에 빈곤율을 개선하기는 어려웠다. 

 

 

3. 인디라 간디

네루는 1964년 5월 27일 세상을 떠났다. 네루에게는 인디라 간디라는 외동 딸이 있었는데 1959년 42살의 나이로 국민회의 의장을 역임하였으며, 훗날 네루에 뒤를 이어 인도 수상이 된다. (초대 총리 네루, 2대 총리 샤스트리, 3대 총리 인디라 긴디) 마하트마 간디와는 아무런 혈연 관계가 없으며, 그녀의 남편 페로제 간디의 성에 따라 인디라 간디가 되었다. (간디는 인도에서 비교적 흔한 성씨다.) 훗날 그의 큰 아들 라지브 역시 총리에 선출된다. 

 

인디라 간디는 권력욕이 강했고 본인이 속한 국민회의를 중앙집권화해 점차 독재화 경향을 띠어 반발을 받기도 하였으나 1971년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방글라데시 독립전쟁)에서 승리하여 인기가 폭등하였다. 그러나 이후 그녀의 독재는 더욱 강력해져 더 큰 반발을 불러왔고 1975년 결국 헌법을 정지하고 비상사태를 선언한다. 국민회의를 제외한 모든 정당을 활동을 금지했고 언론검열을 시행하였으며 10만 명 이상을 재판없이 구금했다. 비상사태는 19개월이나 지속되었다.

 

1977년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 간디는 총선거를 실시하였으나 결과는 정반대로 야당인 인민당의 압승이었고 간디는 낙선하여 정권은 인도 건국 30년 만에 처음으로 국민회의가 아닌 야당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야당 연합은 국정운영 경험이 없었고 연합 정당 내 갈등이 심하여 혼란을 벗어나지 못해 결국 대통령의 명령으로 1980년 의회를 해산하고 다시 총선거를 실시했다. 국민회의의 선전으로 인디라 간디는 다시 총리에 복귀한다. 

 

1974년 인도는 핵무기를 보유하게 된다. (작전명 미소짓는 부처) 파키스탄도 따라서 1979년 핵무기를 보유하게 된다. 

 

 

4. 펀자브 시크교도 문제

펀자브 지방은 인도 문명의 발상지로 아리안족의 최초 이주지이자 거주지이기도 하다. 브라만교 역시 자연스레 이곳에서 생겨나고 성장했다. 외부세계에서 인도로 접하는 통로인 카이바르 고개와 볼란 고개가 이곳에 있어 이슬람교가 인도에서 가장 먼저 정착한 곳이기도 하다. 

 

16세기 인도에서 박티(신을 향한 사랑의 실천) 운동이 일어나 이곳에서 시크교가 크게 일어난다. 시크교는 이슬람교와 힌두교의 장점을 융합하여 탄생한 신흥 종교로 펀자브 지방에서는 시크교도가 57%를 차지할 만큼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펀자브의 중심은 라호르인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1930년 1월 26일, 네루가 독립선언을 한 곳이기도 하거니와 1940년 3월 23일, 무함마드 알리 진나가 파키스탄 독립을 선언한 곳으로 인도 독립운동의 성지이기도 하다. 

 

펀자브는 정치, 종교와 함께 경제적 영향력도 막강한 곳인데 인도 인구의 2%에 불과한 펀자브 시크교도들이 인도 전체 경제의 10%를 차지하고 있으며, 개인 소득 기준으로는 인도 전체 평균의 2배에 달하는 경제력을 갖고 있다. 시크교도들 역시 파키스탄과 마찬가지로 시크교도의 나라 '칼리스탄'을 만들고자 소망했다. 

 

시크교도들의 칼리스탄 창건 운동은 1980년대에 정정을 이룬다. 지도자는 자르나일 싱 빈드란왈레(1947 ~ 1984)였다. 인도 저부는 빈드란왈레를 여러차례 구금하였음에도 독립운동은 꺾이지 않았고 결국 시크교의 성지인 황금 사원에 들어가 무장한 채로 인도 정부에 맞섰다. 인디라 간디는 1984년 6월 1일 시크교도 무력 진압 작전인 블루스타 작전을 개시한다. 총격전이 벌어졌고 저항이 거세자 인도 정부는 탱크까지 투입하여 민간인을 포함한 시크교도 5천 명 이상을 사살한다. 정부군 493명도 전사했다. 시크교의 성지인 황금사원에 무장 군인과 탱크까지 동원한 무자비한 진압 작전은 시크교도들에게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넉 달 뒤인 10월 31일, 인디라 긴디는 수상 관저에서 시크교도 경호원 2명으로부터 암살당한다. 힌두교도들은 이에 격분하여 시크교도들을 보복 공격해 무려 3천 여명의 시크교도인이 살해된다. 그러나 시크교도 학살에 책임을 지고 재판을 받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힌두교 패권주의) 인디라 긴디는 마하트마 간디, 자와할랄 네루를 화장한 야무나 강가의 라지 가트에서 화장되었다. 인디라 간디 사후 7년 뒤인 1991년, 그녀의 큰아들 라지브까지 암살되어 이곳에서 화장된다. 

 

5. 라지브 간디와 소냐 간디

라지브는 1984년 총리에 취임하였으나 임기말 터진 뇌무 스캔들로 인하여 1989년 선거에서 국민회의의 참패의 원인이 된다. 그는 정권을 되찾기 위해 인도 전역을 돌며 선거운동을 하던 중, 1991년 5월 21일 인도 남부 타밀나두에서 자살 폭탄 테러로 사망한다. 스리랑카 독립운동을 전계하던 타밀 호랑이가그 배후로 라지브의 친 스리랑카 정부 행보에 불만을 품고 저지른 일이었다. 

 

그의사후 부인인 소냐 간디는 정치와 거리를 두고 은둔생활을 하였으나 국민회의의 간청에 따라 1998년 정계에 입문하여 국민회의 총재에 당선된다. 2004년 국민회의가 BJP를 걲고 선거에서 승리하였으나 외국인 여성이라는 이유로 여론에 따라 시크교도인 만모한 싱에게 총리 자리를 양보한다.

 

6. 나라심하 라오

라지브가 암살당한 1991년 총선거에서 국민회의가 승리하엿고, 나라심하 라오가 총리에 취임한다. 그는 인도 경제 정책의 대개혁을 단행한다. 중국 덩샤오핑의 1979 개혁, 개방정책과 1985년 소련 고르바초프의 페르스트로이카(개혁),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을 보고 인도도 사회주의가 아닌 자본주의 체제 개혁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라오는 국가 기업을 과감히 민영화하고 무역 규제를 철폐하였으며 관료주의를 타파해 행정을 능률화하는 등 개혁 개방에 집중했다. 인도 경제는 급속히 성장하기 시작해 매년 5~8%씩 성장하였으며 그의 후임 총리인 만모한 싱, 나렌드라 모디도 정책을 계승해 인도 경제의 성장을 이끌어왔다. 라오는 인도 경제 개혁의 아버지라는 별명이 붙었다. 

 

라오는 인도 정치에서는 드물게 남부 안드라프라데시주 출신이고, 힌디어권 출신이 아닌 것으로는 2대 수상 샤스트리에 이어 두 번째였다. 그러나 1996년 임기 말기에 터진 뇌물 사건으로 물러났고,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벌금형 판결을 받는다. 또한 경제 개혁의 대가가 일부 부유층에게 집중된 것 등의 이유로 빈민층의외면을 받아 1996년 인도 총선거에서는 다시 인민BJP에 정권을 빼앗긴다.

 

7. BJP인도인민당

1980년대 이후 인도 정치에서는 힌두 민족주의 정당이 약진하기 시작한다. 라지브 간디 시대까지는 국민회의가 확고부동안 인도의 제1정당이었으나 인민당의 급격한 성장으로 현재는 인도의 제1정당 자리를 꿰찼다. 당원의 절대다수가 보수 서민층이며 당원수만 2019년 기준 1억 8천만명에 이른다. 2014년 이후 계속 집권하고 있으며 나헨드라 모디 총리가 바로 BJP 소속이다. BJP는 외국인 혐오, 인종차별, 카스트 옹호와 같은 언행으로 비판을 많이 받고 있다. 반이슬람 정서가 강한 인도에서 힌두 근본주의가 정치에 반영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인도 내 무슬림은 2억 명 수준으로, 인도네시아와 파키스탄에 이은 세계 3대 이슬람국가이며 과거에는 종교에 포용적이었던 국가임을 감안한다면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음.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의 독립 전에는 인구의 1/4이 무슬림이었으나 현재는 1/7 수준)

 

8.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

암베드카르 박사는 불가촉 천민 태생으로 인도 헌법 제정을 주관한 인도 헌법의 아버지이다. 불가촉 천민의 인권신장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지 않는 간디와 충돌하기도 했고, 간디가 불가촉 천민이라는 표현대신 하리잔(신의 자식)이라는 표현을 쓴 것도 비판했다. 온정주의에 불과할뿐 실질적인 법과 제도로 보호하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암베르카르 박사는 독립 전 1931년 제2차 런던 원탁회의에서 불가촉천민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한다고 주장했다가 이에 반대한 간디의 단식에 6일 만에 양보하기도 했다. (간디는 독립과 카스트제도를 함께 논의하는 것을 거부했다.)

 

암베르카르는 1956년 힌두교도 50만 명을 불교로 개종시켰다. 이슬람교는 평등을 주장하나 인도의 이슬람교도들은 카스트 제도를 인정하고 있었고, 유일신 알라가 인간을 압박하는 절대신앙의 교리가 있어 거부하였다. 기독교는 외국종교라는 인식이 강하여 인도인의 정서에 맞지 않았고, 실제로 기독교로 개종한 인도인들은 쌀을 위해 개종한 Rice Christian이라고 조롱을 당하기도 했다. 기독교에서 학교와 병원 등 신식 시설에 투자하기도 하였으나 이는 인도 전반이 아닌 상류층 일부에게만 돌아갔기 때문에 하급 카스트들에게는 가깝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암베르카르는 힌두교도들을 불교로 개종하는데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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