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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나라 이웃나라 인도 / 파키스탄

Varsika 2023. 5. 4. 0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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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키스탄 건국의 아버지 무함마드 알리 진나는 무슬림만을 위한 나라가 아니라 힌두교도의 탄압을 받지 않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고자 했다. 1947년 독립 직후 실제로 진나는 종교의 자유를 연설하였으나, 파키스탄은 이후 1956년 헌법에서 이슬람 국가임을 명시했다. 1956년 파키스탄 헌법은 1947년 독립 이후 제정한 최초의 헌법으로, 그 전에는 인도 독립법에 따라 통치했다. 

 

- 펀자브의 뜻흔 다섯개읙 ㅏㅇ이라는 뜻으로 인도 아대륙에서 가장 비옥하고 부유한 지역이다. 인더스강 역시 펀자브 지역에 흐르고 있으며 파키스탄의 수도인 이슬라마바드, 인도 독립 운동의 성지인 라호프가 모두 펀자브 지방에 있다. 파키스탄 인구의 40%가 펀자브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 앞서 말한바와 같이 펀자브주는 시크교도들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19세기 초 시크 왕국은 영국과 전쟁까지 벌였다가 1849년 합병된 역사가 있고, 이후에도 파키스탄 펀자브 지방의 시크교도가 다수 거주하였으나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 독립되는 과정에서 대부분 인도로 탈출햇다. 파키스탄령 펀자브 지방에는 분리 전 인구의 13%가 시크교도 였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진 것이 이 탓이다.

 

- 남동쪽 지방의 신드는 힌두와 같은 말이고, 인더스강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곳은 인더스강과 아라비아해가 만나는 하구 지역이고 파키스탄의 첫 수도였던 카라치가 있느 ㄴ곳이다. 712년 아라비아 해를 건넌 무슬림들이 이곳에도착햇지만 늪지대로 인하여 내륙으로 진입하지 못했고, 300년가까지 조그마한 무슬림 공동체를 구축하는데 그쳤다. 

 

- 2010년까지 북서부지역이라 불렸던 카이베르파크툰크와주는 아프가니스탄과의 접경지역으로 카이바르 고개가 위치한 곳이다. 군사적으로 중요하여 영국이 인도를 지배할 당시 가장 많은 군대를 배치했던 곳이기도 하다. (러시아의 남하 차단)

 

- 알리 진나가 독립 이후 1년 만에 폐암으로 사망하자 그의 뒤를 이어 리아콰트 알리 칸이 수상에 올랐다. 진나는 파키스탄츼 초대 총독, 알리 칸ㅇ느 초대 수상을 역임한다. 그러나 1951년 10월 16일, 알리칸은 연설 중 암살당한다. 범인을 현장에서 사살해 여전히 미제로 남아잇으며, 미국에 접근하려는 것을 막으려는 소련이 배후라는 설만 남아 있다. 

 

- 파키스탄은 이란과 인접해 있으나 시아파 국가인 이란 과는 사이가 좋지 않다. 시아파의 시아는 따른다는 뜻으로 정통성 잇는 알리 혈통을 따른 다른 말이고, 수니파의 수니는 이슬람 경정 '순나'를 따르는 자라는 말이다. 자연스레 시아파는 수니파에 비해 더욱 엄격하고 근본적이고 알리가 수니파에게 암살 당해 시아 - 수니의 관계는 이슬람 - 타 종교의 관계보다 더욱 적대적이다. 

 

- 또하 ㄴ이슬람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종교 지도자가 곧 군사 지도를 겸했던 역사가 있어 파시크탄도 자연스레 군부의 입김이 세지게 되었다. 1958년 10월 파키스탄에서 첫 쿠데타가 발생하였다. 2008년 군사정권이 막을 내릴 떄까지 군사정권이 지속되었다. 인도는 네루가의회민주즈이를 정착하기 우히ㅐ 노력하여 지금까지 다 ㄴ허번의 쿠데타도 일어나지 않은 반면 파키스탄에서는 총 6번의 쿠데타가 일어나 3번이성공햇다. 1958년부터 2008년까지 32년간의 군사정부, 18년간의 민간 정부가 있었으며 네루 가문이 인도의 시작 37년을 통치한것처럼 부토라는 한 가문이 오랜시간 파키스탄을 통치 했다. 

 

- 파ㅣㅋ스탄 초기의 역사는 사회주의 사상을 지닌 ㅅ지식인부토가문의 갤과 군부와 결탁하 ㄴ기득권층의 대결이 큰 틀을 이루고 있다. 

 

1. 첫 번째 쿠테타와 무함마드 아유브 칸(1907~1974)

 

아유브 칸은 파키스탄 역사상 최연소 장군이자 파키스탄 첫 최고 사령관이었다. 파키스탄이 혼란에 빠지던 1958년 10월 7일, 이스칸데르 미르자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였는데 10월 27일 계엄 사령관 아유브 칸이 쿠데타를 일으켜 의회를 해산시키고 스스로 대통령이 되어 독재를 시작했다. 무혈 쿠테타였으나 군부 독재의 시작을 알린 사건이었따. 

 

2년 뒤인 1960년 신임 투표를 실시하였는데 전체 유권자가 아닌 지역 대표 8만 명만 모여 실시한 선거였고 95.6%의 신뢰 득표로 더욱 강한 독재 정치를 시작했다. 1965년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였는데 야당은 알리 진나의 여동생 파티마 진나를 후보로 내세웠다. 선거 결과 아유브 칸이 승리하였는데 야당은 이를 부정선거라 판단하고 반발하였으나 아유브 칸은 독재를 계속했다. 인도를 견제하기위해 중구고가 동맹을 맺고, 소련과 대립하여 미국의 원조를 늘어났따. 아유브 칸 통치시기 파키스탄 국내 총생산ㅇ느 45% 증가하였으나 혜택이 특정 계측에만 돌아간 한계가 있다. 

 

네루 사망 후인 1965년 제2차 파키스탄 인도 전쟁을 일으켰지만 (지브롤터 작전) 아무것도 얻지 못한채 원래의 국경선으로 철수 했다. 이로 말미암아 전국적인 비난을 받게 되었고 그 선봉에 선것이 줄피카르 부토였다.

 

2. 줄피카르 부토(1928~1979)

인더스강 유역의 라르카나에서 태어난 부토는 캘리포니아 버클리대를 졸업하고 영국 옥스포드에서 법학 석사를 취득했다. 상류층 지식인이었으나 사회주의자였고, 1967년 파키스탄 인민당(PPP)를 창설했다. 파키스탄 인민당은 중도 좌파 성향의 사민주의 정당이다. 인민당은 아유브 칸이 1962년 창당한 파키스탄 무슬림연맹(PML)에 대항했다. 

 

부토 등장 이후 파키스탄 역사의 50년은 부토 가문과 군부의 정치 투쟁에 다름 아니다. 줄피카르 부토는 쿠데타로 정권을 빼앗긴 뒤 사형당했고, 큰 아들은 경찰의 총에 맞아서, 작은 아들은 의문사했ㅇ며 딸 베나지로 부토도 암살당했으며 막내딸 사남 부토만 살아남았다. 

 

1969년 아유브 칸은 퇴진 압력에 이기지 못해 부하 야히아 칸에게 정권을 넘겼다. 그는 아유브 칸 보다도 더 반민주적인 사람이었다. 1971년 제3차 파키스타 -인도 전쟁(방글라데스 독립 전쟁)에서 패배하자 퇴진하였고, 13년의 구나 정권이 막을 내리고 줄피카르 알리 부토가 정권을 잡았다. 

 

부토는 방긍라데시를 공식인정해 파키스탄 시대를 열었고, 자본주의 정책을 사회주의 정책으로 급선회하였다. 1973년에는 대통령중심제를 의원내각제로 바꾸었으며, 이후 수상이 되었다. 77년까지 수상을 역임했다. 1977년 3월 파키스탄 총 선거에서도 부토가 승리하였으나, 무하마드 지아울하크 장군이 7월 쿠데타를 일으켜 스스로 대통령에 취임하고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1978년 취임하였으며, 파키스탄의 두번째 군사정권이었다. 그는 자본가와 종교지도자의 지원을 받았다. 

 

그는 엄격한 사회주의를 단행하였ㅇ으며 이슬람 법인 샤리아 법정을 도입했다. 그리고 부토를 사형 시켰다. 부정선거와 정적 살해죄로 1979년 4월 4일에 교수형에 취했다. 국민들은 그에게 샤헤드(순교자)란 존칭을 붙여 애도 했다. 부토 가족의 영묘는 부토 고향 라르카나 근처에 ㅣㅆ다. 

 

 

독재자 지아울 하크는 1988년 8월 비행기 사로고 갑자기 사망하여, 10년에 걸친 군사 정권이 막을 내리고 헌법에 따라 총선을 실시했다. 부토의 딸 베나지르 부토가 귀국하여 당선,이슬람 세계 첫 여성 수상이 탄생했다. 35세였다. 그러나 부로가 20ㄱ0월 만에 대통령에 의해(대통령이 반대파) 수상에 쫓겨났다. 1990년 8월 6일이었다. 이후 지아울하크계 세력과 정치투쟁을 하다 1993년 다시 수상에 올랐으나 다시 1996년 해임되었다. 부토에 이어 나와즈 샤리프, 지아울하크오 ㅏ같은 파키스탄 무슬림 연맹 당워ㄴ출신이 수상이 되었다. 그는 정치에 뛰어든 이유를 부토로 인해 강제로 국유화된 기업과 재산을 되찾기 위해서 라고 말해ㅆ다. ㄱ는 붙 해임후 각각 한번씩, 그리고 2013년부터 2017년까이 총 3번, ㅇ약 10년가나 수상을 역임했다. 

 

1999년 10워월 육군 참모총장 페르베즈 무샤라프를 해임하자 (정치에 관여한다는 사유) 오히려 그가 쿠데타를 일으켜 파키스탄에 세번쨰 군사 정부가 들어섰다. 

 

페르베즈 무새라프는 국부 강곂아로 조속한 권력 이양을 약속하였으나 나와즈 샤리프를 외국으로 추방하고 대통령까지 쫓아낸다으ㅁ2001년 스스로 대통령이 되었다. 9.11이 터지자 무샤라프는 미국에 적극 협조하면서 권력을 공고히 했고 2004년 간섲ㅂ선거로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2007년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하여 퇴진시위가 있었으나 무샤라프는 그해 10월 다시 출마해 97%의 지지율로 당선되었다. 물론 간접 선거였다. 이에 국내외 시위가 더욱 거세졌고, 바나지르 부토가 귀국하여 항의 시위에 앞장 섰다 무샤라프는 2008년 1월 8일 조기 총선거를 실시한다고 무마하였고, 선거전이 치열하던 2007년 12월 27일 베나지르 부토가 암살되었따. 

 

정부는 그녀가 사고사라고 하였으나 후에 구녀가 총에 맞아 쭉는 비디오가 발표되었고, 파키스탄은 알카에다의 소행으로 단정했지만 알카에다는 이를 곧바루 부정했다. 혼란을 이유로 선거가 한달 미루어져 2008년 2월 실시 ㄱ되었고 연합 야당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세번쨰 군사정권이 막을 내렸다.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사람은 부토의 남편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였다. 

 

2018년에는 임란 칸이수상이 되었다. 그는 무슬림 연맹도, 인민당도 아닌 파키스탄 정의 운동이라는 제 3의 당의 창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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