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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나라 이웃나라 - 스페인(고대부터 레콩키스타까지)

Varsika 2023. 5. 5.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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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나다 - 알람브라 궁전.'붉은 성'이라는 뜻이다. 나스르 왕조(1238~1492) 때 지어졌다. 198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알람브라 궁전 내의 사자상 분수는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이슬람교 문화에서 아주 드문 사례다.

 

마드리드 마요르 광장 - 129m x 94m 규모의 거대 광장. 1561년 왕궁을 바야돌리드에서 미드리드로 옮긴 뒤, 펠리페 2세의 명에 따라 시장이었던 이곳을 광장으로 바꾼 것이다. 

 

돈 펠라요 - 711년 스페인을 침공한 이슬람군이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해나갈 떄, 722년 북부 아스투리아스 지방의 코바동가 동굴 전트에서 돈 펠라요가 처음 이슬람군을 대상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가 국토 회복 운동의 출발로 여겨진다.

 

크리스티안 위르겐센 톰센 : 덴마크 고고학자이자 코펜하겐 박물관 관장, 그는 인류 문명의 발달을 석기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시대 3단계로 구분했다. 

 

존 러벅 : 영국의 정치가이자 생물학자이며 고고학자. 그는 석기 시대를 다시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로 구분했다.

 

이베리아 : 고대 그리스인이 식민지를 만들었던 곳이 지금의 에브로 강이었는데 이곳이 이베로가 되었고 이베리아가 되었다는 어원이 있다. 이베리아 반도의 최초 주민은 북부 아프리카 계의 이베리아인이다. 

 

갈리시아 지방은 켈트인이 모여사는 곳으로 이곳의 언어인 갈리시아어는 스페인어와 전혀 다르며 켈트족의 후예가 모여 사느 ㄴ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쪽과 공통점이 많다. 켈트족은 육로를 통해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ㅗ왔따.

 

페니키아 인은 기원전 1100년 경 바다를 통해 이베리아 반도에 들어왔다. 이들은 카디스에 무역거점을 마련했고, 훗날 기원전 8세기에 그리스인들이 식민지를 이베리아에 건설하기도 한다. 

 

기원전 38년에 정식으로 로마제국의 영토가 된다. 

 

스페인을 스페인어로는 히스파니야, 플ㅇ스에서는 갈리아, 독일에서는 바바리아라고 부른다. 히스파니아라는 말은 로마시대부터 쓰였다. 

 

기독교는 기원후 64 ~ 66년경 사도 바울에 의해 스페인에 전파되었다. 스페인을 다녀간 성자 야고보느 ㄴ여수살렘에서 헤로데 아그리파 1세의 박해로 순교 했다. 그의 제자들이 시신을 수습해 스페인으로 햐하다 풍랑ㅇㄹ 만나 행방 불명되엇다. 8백년뒤, 이슬람교도와 그리스도교의 전쟁 중, 기독교 연합군이 갈리시아의 벌판을 비추는 별을 보았고, 그빛이 다다른 곳이 바로 성 야고보가 묻힌 자리였고, campus stellae 캄푸스스탈라에 라고 불렸고 이곳이 별이 비추는 들판. 이곳이 지금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이다. ㄱㅇㅖ수살렘, 로마와 함꼐 그리스도교 3대 순례자이자. 순례길은 칸미노 데 산티아고라 불린다. 

 

서고트족은 415년 이베리아 반도에 왕국을 세웠지만 왕족 간의 전쟁이 그치지 않아 결국 멸망하게 된다. 왕이 자식에게 물려주는 세습제를 채택하지 않고 선고로 귀족 중에 신임 왕을 선출햇는데 이것이 지독한 혼란을 야기했다. 결국 귀족들은 가톨릭 교회에 왕위계승을 일임했고, 이후 가톨릭은 모든 국사에 간섭하게 된다. ㅅ페인 역사 전체에서 교회 정치 참여와 간섭, 그리고 막강했던 가톨릭 교회와 성직자의 권력은 이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무머인은 그리스어로 마우로스 mauros 검다 어둡다라는 말로 처음에는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이베리아 반도가 이슬람 지배를 받게 된 뒤에는 이슬람교도 아랍인ㅇㄹ 의미하게 된다.

 

아길라의 요청을 받은 탕헤르의 영주 무사 빈누사이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타리크 이븐 지야드 장군을 파견한다. 그는 1만 2천 명의 군대를 이끌로 지브롤터 해협을 건넌다. 지브로렅 해협은 폭 14km에 불과한 곳으로 훗날 '타리크의 절벽'이라는 뜻의 게벨 알 타리크(Gebel al-Tariq)라고 불렸는데 이것이 지금의 지브롤터다. 현재는 영국의 영토다. 

 

이슬람군은 711년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 로드리고의 군대를 물리치고 도움을 요청하 ㄴ아길라군까지 무찔러 북서 산악 지대를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점령한다. 불과 7년만이었다. 이슬람군은 북서 산악지역을 남겨두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로 진격하였으나 프랑스 왕국의 카를 마르텔에 의해 732년 투르, 푸아티에 전투에서 격퇴되면서 퇴각한다. 이후 피레네 산맥은 자연스레 유럽과 이슬람의 경계가 된다.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를 모두 장악한 750년 경 옴미아드 왕조의 아브드 알라흐만이 다마스쿠스에서 도망처 이베리아 반도에 도착한다. 그는 이베리아 반도에 에미리트를 세워 다마스쿠스의 칼리프에 맞선다. 에미리트는 에미르(통치자, 사령관)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뜻으로 알라흐만이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에 대항하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한 칭호다. 반면 칼리프는 무함마드의 후계자이자 이슬람 세계의 최고 종교, 정치 지도자를 뜻한다. 칼리프가 다스리는 나라는 칼리파트라 부른다. 

 

아브드 알라흐만은 756년에 안안달루스 왕국을 세우고 스스로를 알라흐만 1세라고 칭했다. 안안달루스는 '반달족이 건너온 땅'이라는 의미로 오늘날의 안달루시아를 뜻한다. 알라흐만 1세는 코르도바를 수도로 정했는데 이곳은 고대 로마의 세네카를 배출한 유서 깊은 도시였다. 안안달루스 왕국이 발전을 거듭하자 10세기 경에는 안안달루스의 에미르가 스스로는 칼리프라 칭하기도 했다. 당시에 코르도바는 인구 50만 명의 세계 최대 도시 중 하나로 성장해잇었다. 콘스탄티노플과 함께 유럽의 최대 도시였다. 전성기에는 이슬람 사원이 700여 개, 병원이 50개, 대학이 일곱 개에 이르는 대도시로 성장한다. 또한 개방된 국제 도시로 세파르딤(이베리아 반도 내 유대인)들이 모여 살던 곳이기도 하다. 

 

* 칼리프는 이슬람 세계 최고의 정치+정교 지도자로 오직 한 사람만이 칼리프라 칭할 수 있다. 칼리프란 '후계자'라는 뜻이다. 칼리프가 아닌 이슬람 왕국의 군주는 술탄이라 불렸다. (가령 무굴제국의 황제) 칼리프가 통치하는 제국을 카리파트, 술탄이 지배하는 나라를 술타나트라고 한다. 지역 사령관, 총독, 토후와 같은 지역 지배자들은 에미르라 불렸고, 에미르가 통치하는 나라는 에미리트라고 했다. (가령 아랍 에미리트)

 

알라흐만 1세는 로마 신전이 있던 자리에 메스키타(이슬람 사원) 건설을 시작하였는데 200여년 뒤 완공된 이사 원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단일 이슬람 사원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건설 당시 1,293개의 기둥이 있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것은 856개이다. 건립 초기에는 수 만명이 한꺼번에 기도할 수 있었던 규모로 추정하고 있다. 

 

코르도바 왕국 = 알안달루스 왕국 = 후옴미아드 왕국

 

 

이베리아 반도의 유대인, 세파르딤

유대인들은 73년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나 여러나라를 떠돌다 120년경 이베리아 반도에 도착했다. 이들은 어디서나 그러했든 지식인 계층이 되었는데 이베리아 반도에 기독교를 국교로하는 서고트 왕국이 건립되면서 점차 차별 대우를 받기 시작한다. 612년에는 반유대인 칙령이 내려져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재산을 몰수 당한채 추방되기로 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교를 인정하고 신앙의 자유를 허용한 이슬람 군대가 이베리아 반도에 진주하자 이들은 이슬람에 적급 협조한다. 즉, 유대인 세력은 코르도바 왕국의 전성기를 이루는데 크게 기여했다. 이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의 고전을 이베리아 반도에 전파했고 특히 코르도바 왕국의 금융을 책임졌다. 

* 이슬람에서는 유대교가 섬기는 신이 같으나 방법이 다른 뿐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슬람의 방식이 올바른 섬김의 방식이라고 생각하였다. 

 

 

가톨릭의 반격

 

718년(혹은 722년) 이베리아 북부 아스투리아스 지방 코바동가에서 서고트 왕국의 가톨릭군은 처음으로 이슬람군을 격파한다. 가톨릭교도들은 성모 마리아의 보호로 승히할 수 잇었다고 믿었으며 전투가 벌어진 코바동가의 동굴은 지금도 성모 마리아가 수호 성인이다. 역사가들은 실제로 이 전투가 대단한 규모로 전개된 것은 아니라고 분석하지만, 어찌되었건 이것이 1492년까지의 800년에 걸친 레콩키스타의 시작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띠고 있다. 그러나 가톨릭의 세력은 제한적이라 300년 가까이 북서부 지방을 점령한데서 벗나지 못했다. 지금도 수천 개에 이르는 스페인 성채 대부분이 이베리아 반도의 북서부에 몰려 있다. (가톨릭 세력이 방어용으로 쌓은 성채들)

 

가톨릭 세력은 이슬람 세력이 분열되는 9세기 경부터 본격적인 레콩키스타를 전개했다. 이들은 스스로 아스투리아스인이라는 정체성이 강했는데, 이 떄문에 오늘날의 스페인 왕세자가 '아스투리아스 왕세자'라 불린다. 

 

내부의 정치 다툼이 심해진 코르도바 왕국은 백성들의 눈을 돌리기 위해 가톨릭 세력과 전쟁을 가속화 했는데, 아직 통합되지 않은 작은 가톨릭 왕국들을 공격했다. 히샴 2세의 재상이었던 알만수르(재임 977~1022)가 그 선두에 섰다. 아스투리아스, 레온, 나바라, 아라곤, 카탈루냐 왕국이 그 대상이었으며 포르투갈의 코임브라의 경우 완전히 초토화시켜 7년간 도시가 재건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가톨릭 성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대성당의 파괴하고 성당의 쇠문과 종을 코르도바까지 옮겼다. 당연히 가톨릭 교도 포로를 시켜 이송했다. 이후 그것을 녹여  이슬람 사원의 촛대와 천장을 만들었다. 

 

알만수르가 1002년 사망한 이후 가톨릭 세력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1031년 코르도바 왕국은 결국 멸망하고 작은 이슬람 왕국으로 쪼개지는 타이파(Taifa) 시대가 열린다. 타이파는 아랍어로 부족집단을 뜻한다. 

분열 전의 코르도바 왕국(좌)과 분열 후의 타이파 시대(우)

타이파 시대 세비야, 사라고사, 톨레도는 이슬람으로 개종한 가톨릭인인 물라디가 지배했다. 타이파 시대 각 국가들은 동맹이 이루어지지 않은 작은 왕국에 지나지 않아 가톨릭 세력의 남하를 막아낼 수 없었다. 1085년 이슬람 세력의 심장과 같은 톨레도가 점령되었고 이후 1212년 라스바나스데톨로사 전투에서 가톨릭 군이 승전하면서 레콩키스타 운동은 격렬해지기 시작한다. 한편 레콩키스타 전쟁이 격렬한 시기 지중해 동쪽에서는 십자군 전쟁(1096~1270)이 전개되고 있었는데 로마 교황은 스페인의 경우 이미 이교도와 전쟁을 치루고 있으니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고 배려(?)한 덕분에 레콩키스타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이슬람 왕국은 1238년 무함마드 1세가 그라나다에 세운 나스르 왕국이다. 나스르 왕국은 1492년까지 250년간 유지되었는데 지금도 그 찬란한 문화유산이 남아 있다. 마지막 지도자 무함마드 12세는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에게 항복하였고, 모로코로 망명을 떠났다. 그는 마지막 언덕에서 그라나다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는데 이 고객의 이름이 엘수스피로 델 모로, 즉 무어인의 탄식이다. (el susprio del moro)

 

도미니크 수도회

가톨릭 세력은 전쟁을 지속하면서도 문화와 교육에 투자하였는데 알폰소 10세에 이르러서는 각종 문헌을 번역토록하고 법전을 편찬케 하는 한편 스페인과 세계의 역사를 정리했다. 동시대에 도미니크 수도회가 설립되었는데 귀족 출신인 도밍고 데 구스만이 설립한 이 수도회는 '하느님의 개'를 자처해 엄격한 생활과 규율, 연구와 설교로 유명하다. 도미니크 수도사들(domicans)과 도미카네스(domini canes)의 발음이 비슷하여 횃불 문 개가 수도회의 상징이다. 이 수도회는 훗날 종교 재판의 재판관을 대부분 차지하기도 한다. 

 

 

 

포르투갈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이슬람 세력은 도우로강 이북은 산악지대로 쓸모 없는 땅이라 여겨 굳이 점령하지 않았다. 이 덕분에 가톨릭 세력은 도우로 강을 경계로 이슬람 세력과 대치했다. 도우로 강과 대서양이 만나는 어귀에 포르투스 칼레라는 말이 있었는데 portus는 항구(port), 칼레(cale)는 따뜻하다는 의미다. 훗날 포르투갈이라는 국호의 기원이 된다.

 

9세기 북바 갈리시아의 장수 비마라 페레스가 아랍 세력을 몰아내고 페레스 공국을 세웠다. 후에 레콩키스타를 선두에 섰던 카스티야의 왕 알폰소 4세는 사위 엔히크가 무공을 세우자 포르토 지방의 땅을 하사하여 1093년 포루투칼레 공국이 탄생한다. 이후 엔히크의 아들인 알폰수 1세때인 1143년 포르투갈은 독립을 이룩하고 스스로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한다. 포르투갈은 1249년 아랍세력을 완전히 몰아낸다. 1580년부터 1640년까지 60년간 스페인과 합병되었던 시기(후계자가 없음을 빌미로 합병됨)를 제외하면 1,000년가까이 반도에서 스페인과 국경을 맞댄 유일한 나라로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그러나 스페인이 강국으로 자리함에 따라 동쪽으로 진출하지 못하고 대서양으로 눈을 돌려 해양 대국으로 발돋움한다. 

 

카스티야 왕국과 동군 연합, 통일

카스티야 왕국은 내부로는 레콩키스타를 진행함과 동시에 1037년 무력으로 레온 왕국을 합병하였고 해외로도 눈을 돌려 지중해의 코르시카, 시칠리아, 발레리아스 섬을 차지했다. 실제로 시칠리아는 19세기까지 스페인이 지배한다. 

 

1469년,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인 바야돌리아에서는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이사벨 공주와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자가 결혼하였고, 이는 동군 연합의 방식으로 완전한 합병은 아니었다. 통치는 공동으로 하되, 왕위 상속은 별개로 이어지는 방식이었다. 종교재판소만 합동으로 운영하였다. 

 

1478년 종교 재판이 스페인에서 시작되었다. 스페인에서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이슬람교도(무데하르), 유대인(콘베르소)가 많았으나 가톨릭 왕들은 이들을 믿지 않았고 종교재판을 통해 사실상의 마녀사냥을 전개한다. 이로 인해 유능한 유대인과 아랍인들이 스페인을 떠났고,  전문 직업인 계층이 사라지면서 스페인은 순혈주의에 젖어 통일과 동시에 이미 쇠망의 길로 접어들 수 밖에 없었다. 

 

거기다 그라나다 왕국이 멸망한 직후인 1492년 3월 31일. 가톨릭 왕(이사벨과 페르난도를 지칭함) 알람브라 칙령을 발표해 넉달 뒤인 7월 31일까지 유대인들을 추방시켰다. (재산 몰수) 이미 레콩키스타 기간에 수 많은 학살이 자행되었으나 이교도의 뿌리를 뽑기위해 칙령까지 발표한 것이다. 그러나 전문 지식인 계층인 유대인이 사라지면서 스페인은 농업 국가로 전락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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