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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나라 이웃나라 -스페인(레콩키스타 이후~펠리페 1세까지)

Varsika 2023. 5. 9.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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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은 레콩키스타 완수 이후 정치적 세력을 넓히기 위해 정략결혼을 진행한다. 포르투갈, 영국 등과 결혼을 진행했고 한편 오스트리아 지방에서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떠오르고 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현재 스위스의 슈바벤 지방에 있는 하비히츠부르크에서 유래했다. 하비히트(habicht)는 매라는 뜻으로 하비히츠부르크는 '매의 성'이라는 뜻이다. 합스부르크 왕가 문장애 매가 들어가는 것오 이때문이다. 

 

합스부르크 가문 역시 프랑스를 제외한 거의 모든 왕실과 혼맥을 맺기 시작한다. (강대국 프랑스를 제외하려는 전략) 13세기 루돌프 1세에 이르러서는 중동부 유럽을 아우르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다. (도이치황제 겸 오스트리아 황제) 실질적으로 프랑스 동쪽을 지배한 최강자였다. 

 

 

후아나

1504년 카스티야 왕국의 여왕이던 이사벨 1세가 사망한다. 그녀는 아들 후안 왕자가 결혼한지 6개월 만에 후사 없이 죽었고, 이듬해에는 큰딸 이사벨이 아들을 낳다가 죽었으며, 이사벨이 낳았던 첫 손자 미겔도 2살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고, 1502년에는 막내딸 카타리나가 영국 왕실로 시집갔지만 신랑이 몇 달뒤 사망하는 비극을 모두 겪고는 53세의 나이로 눈을 감는다. 

 

그녀의 사후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가 임시로 카스티야 왕국을 다스리겠지만, 연합 왕국읳 ㅕㅇ태였기에 이사벨1세의 자식 중에서 왕위를 이를 사람을 찾아야 했다. 자연스레 합스부르크 왕가로 시집가 네덜란드에 살고 있던 후아나가 추대되었다.

 

후아나의 남편은 '미남왕'이라던 별명을 지니고 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태자 필리프(막시밀리안1세의 아들)였다. 막시밀리안1세는 1477년 부르고뉴 대공 샤를의 딸 마리와 결혼하면서 보르고뉴 공국의 영토였던 네덜란드 지방(지금의 벨기에 + 네덜란드)의 지배자였다. 마리가 부르고뉴의 상속녀였기 때문이다. 마리는 결혼과 함께 네덜란드 영토를 남편에게 선사했다. 막시밀리안1세는 당시 중심지였던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에서 마리를 맞았는데, 이를 위해 알프스 산맥이 잘보이느 ㄴ시내 한 가운데 지은 황금 지붕 건축물이 지금도 인스부르크의 관광명소이기도 하다. 

 

이어 막시밀리안 1센ㄴ 자신의 딸 마르가레테(오스트리아 공녀)와 가톨릭 왕들의 장남 후안을 결혼시켰다. 즉, 겹사돈을 맺은 것이다. 두 왕가는 1495년 네덜란드 앤트워프에서 이중 결혼을 조약을 맺어 확정했다. 필리프와 후아나가 1496년에 결혼했고, 1497년에 마르가레테와 후안이 결혼하였다. 그러나 스페인 왕위 후계자인 후안은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죽어버린다. 

 

"남들은 전쟁을 하더라도 너 행운의 오스트리아여, 결혼을 하라. 남에게 ㄴ마르스가 왕국을 주겠지만 너희에겐 비너스가 왕국을 줄 것이다"

 

1506년 후아나가 바야돌리드로 돌아왔다. 같은 해 세로 결혼한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와 사위 펠리페 1세(필리프) 사이엔 싸늘한 긴장감이 감돌았고, 여왕 후아나의 정신이 이상하다는 이유로 서로 여왕의 권력을 쟁탈하고자 하였으나 1506년 9월 펠리페 1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며 스페인 정치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후아나는 남편 펠리페 1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펠리페 1세를 묻는 것을 거부하고 시신이 담긴 관을 마차에 싣고 수도원을 돌아다녔다. 그래서 사람들은 미치광이 후아나라는 뜻으로 후아나 라로카 juana la loca라고 불렀다. 펠리페 1세는 바람둥이로 유명했기에 후아나는 수녀원에는 관을 두지 못했다.

 

훗날 후아나 1세는 여왕임에도 토르데시야스에 유폐되었다. 그녀의 아들 카를이 성인이 되어 1516년에 스페인의 왕이 될까지는 페르난도 2세가 스페인을 통치했다. 후아나는 1555년 48년간의 유폐생활 끝에 76세의 나이로 비극적인 삶을 마감한다. 불과 1년 뒤인 1556년 아들 카를도 세상을 떠났지만 생전에 어머니의 얼굴을 본 것은 두어 번에 지나지 않았다. 

 

후아나는 펠리페 1세와 사이에서 6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이들 모두 어머니가 예전에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자랐다. 

 

각 자녀들은 덴마쿠, 포르투갈, 스페인, 헝가리로 결혼하여 혼맥을 단단히 했다.

 

카를(카를로스)

1516년 스페인을 지배하던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가 세상을 떠나자, 후아나의 여섯 아들 가운데 장남인 카를이 스페인 왕위를 게씅한다. 그는 동시에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이기도 해서, 스페인 제국과 합수부르크 제국을 모두 물려 받게 되었다. 명목상으로는 후아나 1세와 스페인을 공동 통치하는 것이었지만, 후아나가 이미 실권을 잃은 상황이라 그는 스페인 전체를 다스릴 수 있었다. 그의 나이 불과 16세 였다.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로부터 - 오스트리아와 신성로마제국 영토 전부

외할아버지 페르난도 2세로부터 카스티야 - 아라곤 연합왕국과 나폴리, 시칠리아, 샤르데냐

할머니 마리 드 부르고뉴로부터 플랑드르(네덜란드+벨기에)와 프랑크 공국, 부르고뉴 공국

외할머니 이사벨 1세로부터 카스티야왕국와 아메리카 및 아프리카이 신대륙, 멕시코, 볼리비아, 페루, 필리핀(1521년)

 

* 카를은 벨기에 헨트에서 태어났다. 

 

카를은 스페인의 왕으로 즉위하면서 스페인 귀족 회의(코르테스)의 조건을 모두 수용하는 듯하였으나 오래지 않아 거짓이었음이 밝혀졌다. 카스티야어를 배우지 않았으며, 스페인으로 오면서 측근인 플랑드르 고위 관료들을 데려왔으며, 스페인 국익과 관계없는 이교도와의 전쟁을 벌여 모든 국가 재산을 탕진했고, 공동 왕이었던 후아나 1세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고 유폐된 어머니를 찾지도 않았다. (6살 때 헤어진 이후로 보지 못함)

 

후에 오스트리아 황제인 막시밀리안 1세가 사망한 뒤 오스트리아의 카를 5세로 즉위한 그는 (1519년) 퇴위한 1556년까지 40여년 동안 끊임없이 전쟁을 했다. 경쟁자인 프랑스 및 오스만 제국, 가톨릭에 저항하는 개신교 세력, 그리고 외국인 왕에 저항하는 세ㅣㅇㄴ 백성의 반란이 그것이었다. 

 

종교 개혁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으나 카를 6세는 사소한 불평 정도로 취급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에 자극을 받은 농민들이 1524년 도이치 지방에서 농민 전쟁을 일으키고(영주와 교회의 수탈에 반발, 1524 ~ 1526), 1531년에는 개신교 세력이 단합하여 슈말칼덴 동맹을 맺자 카를 5세가 직접 친정에 나선다. 이 신,구교 간의 전쟁은 1555년에야 마무리 되는데, 아우크스 부르크 화의로 인달락되자. 카를 5세는 이듬해 왕위를 양위하고 한헤로니모 데 유스테 수도원으로 은신해버린다.

 

전쟁이 게쏙되던 시기 프랑스는 오스만 제국과 동맹르 맺기도하고, 프랑스 - 교황 동맹을 맺어 카를 5세를 압박했다. 카를 5세는 이에 역ㄱ분하여 이탈리아에서 프랑스 군을 몰아내고 로마로 진군한다.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칭한 그가 3만 명의 병력으로 5천에 불과한 로마를 공격하 ㄴ것이다. 교황을 지키던 스위스 근위병도 189병에 불과했다. 바티칸은 15세기 부터 스위스 용병을 고용했는데 이들 중 147명이 장렬히 전사하고 살아남은 42명이 교황을 모시고 바티칸을 빠져나가는데 성공햇다. 이후 바티칸 근위대는 스위스 병사로만 구성하게 되었고 희생된 5월 6일을 기려 매날 ㄷ이년 신임 근위병은 충성을 서약한다.

 

카를 5세의 군대는 로마를 점령했고 올내 전쟁에, 봉급을 받지 못해 분노가폭발하였고 약탈을 자행햇다. 일르 로마 약탈 sacco di roma라고 한다. 

 

제국의 분할

 

카를 5세는 왕윌를 떠나며제국을 쪼갰다. 스페인과 해외 식민지 그리고 플랑드르 지방은 펠리페 2세에게, 그리고 신성로마 제국와 오스트리아 제국은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주었다. 당시 실질적으로도 페르디난트 1세게 오스트리아 지방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리고 은둥 생활 속에서 통풍으로 고생하다가 1558년 5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그는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스페인의 첫왕), 이자 오스트리아의 카를 5세라 불린다. 

스페인의 세계 최강의 제국의 반열에 올렸고, 스페인 역사의 최고 전성기로 가톨릭 왕들의 싣, 카를로스 1세 시대, 펠리페 2세 시대로 꼽는다. 

 

그러나 근친 사이의 결혼으로 기형이 많았던 지독한 주걱텅에 기형이라 이가 맞지 않아 음식을 제대로 ㅆ낍지 못해쏙, 입ㅇ르 닫기 힘들어 ㅂ러레가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수염을 길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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