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먼나라 이웃나라 - 스페인과 가톨릭(펠리페 2세)

Varsika 2023. 5. 9. 02:54
728x90
반응형

가톨릭은 스ㅔ인이 800년가까이 외적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전 세계로 뻗어 나가는 스페인의 정체성 그 자체였다. 스페인의 군주이자 신성로마제국 오스트리아 황제인 카를로스 1세는 평생 가톨릭을 지키고 전파하며 저항 세력과 싸우는데 일생을 바쳤다. 이런 스페인은 종교개혁과 개신교를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엇다.

 

종교 개혁에 대항해 가톨릭을 지키고자 반종교개혁이 일어났고 가톨릭의 체질을 강화하고자 하엿는데 1540년 설립된 예수회가 대표적이다. 

 

예수회를 세운 이냐시오 로욜라는 스페인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났따. 

1539년 서립된ㄴ 예수회는 1540년 교황 바오로 3세에게 정식 가톨릭 교단으로 인가 받았다. 해외 선교에 가장 전투적인 교단으로 가톨릭을 주국에 전한 마테오 리치, 일본에 전한 프란치스코 사비에르 모두 예수회 소속이다. 마테오 리치는 1583년 전파, 사비에르는 1549년 전파

 

이들은 가톨릭에 대한 어떤 도전과 반론도 허용하지 않았고 교회 수장 아래 엄격한 규율로 마치 군대와 같았다. 가톨릭을 지키기 위해 청ㅇ소년 종교교육을 중시해서 지금도 세계 곳곳에 에수회가 세운교육기관이 있다. (서강ㄷ)

* 에수회 선교사들의 포교화동을 그린 여화 미션

 

개개인의 개성은 제한하고 오로지 복종만 요구되는 엄격한 가톨릭 정신으로(진리에 복종하라) 여성들에게는 문이 닫힌 나ㅏㅁ성만의 종교 세계 였다. 이러한 예수회의 반종교개혁 운동과 가톨릭 강화 운동의 중심이 스페인이었다. 

 

-

 

펠리페 2세

 

펠리페 2세는 할아버지 미남왕 필리프(펠리페1세)에 이은 이름이다. 나약하고 병약하였으며 ㄴ우유부단했다. 그러나 가톨릭 신앙만은 강했다. 카를로스 1세와 포르투갈 공주 이사벨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첫 아내이자 사촌인 포르투갈 공주 마리아 마누엘라가 1545년 사망한 이후 3년 뒤 영국의 헨리 8세의 딸 마리아(메리)와 재혼했다. 

 

부왕으로부터 막대한 영토를 물려 받았으나, 전쟁으로 인한 엄청난 빚까지 물려받아 1557년 즉위 이듬해에 첫 파산 선고를 하기도 했다. 그는 사망하던 1598년까지 42년간 통치하면서 총 4번이나 파산 선고를 했다. 신대륙의 황금이 스페인으로 쏟아들어왔으나 모두 빚을 갚는데 전쟁 빚을 갚는데 소진되었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부왕 카를로스 1세는 40년 간의 통치기간 동안 스페인에 10년도 머물지 않았으나 펠리페2세는 오로지 궁전에 틀어 박혀 모든 정무를 서류로 처리했기에 서류왕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평새 ㅇ스페인에 체류했던 특징 떄문에 최초의 진정한 스페인 왕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펠리페 2세시기에는 왕권ㅇㄹ 절대화하 하여 국내 정치를 아정화해야 한다곳 ㅐㅇ각하여ㅑ 수도를 바야돌리드에서 마드리드로 옮겼다. 펠리페 2세느 남드리드 근교에 엘에스코리알 궁전 건축을 명한다. 21년간 공사하여 1584년 와ㄴ공되엇으며, 왕궁이자 수도원이며 거대한 도서관이며 역대 왕들의 유해가 안치된 왕립 묘지이기도 하다. 마드리드 북서쪽 45킬로미터 지점에 있다. 외부장식을 하지 않은 검소한 가톨릭 건물인데 이는 펠리페 2세의 명이었다. 바티칸을 제외하고는 세게 최대 규모의 가톨릭 건물로 198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스페인 제왕들은 역사적 평가를 바기 위해 임시 묘지에 50년간 유해가 안장되었다가 옮겨지도록 되어 있다.

 

펠리페 2세는 밀물처럼 밀려오는 르네상스 물결을 건부하고 인문주의를 거부하여 신 중심의 가톨릭 세계를 구축하조 하ㅐㅆ다. 

 

이는 거센 ㅏㅂㄴ발과 저항을 불렀고, 네덜란드 독립전쟁으로 이어진다 1568년 1648년, 북부는 끝까지 저항하여 베스트 팔렌 조약으로 1648년 독립하고, 남부는 스페인에 굴복하여 벨기에로 남았다. 

 

펠리페 2세는 카를로스 1세보다더 엄격한 순혈령을 적용하여 조상 중 개종한 ㄱㅇ력이 있으면 고등교육의 기회를 갖지 못하게 하고 성직과 관직을 박탈, 종교재판에 회부하여 죽이는 일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17세 이후 네덜란드와 영국에 역사의 무댈르 내주는 결과를 낳고 만다.

 

 

레판토 해전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이슬람 세력은 발칸반돌르 점령하고 오스트리아 수도 빈을 포위할 정도였다. 지중해가 위험해지자 베네치아는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교황은 가톨릭의 수호자 스페인에 도암을 요구했다. 이에 펠리페 2세는 이복 동생인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를 총사령관으로 스페인-베네치아-ㄱ황청 연합함대를 출동시켜 1571년 10월 7일, 그리스 레판토 곧에서 알리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함대와 격돌한다.  당시 그는 24살에 불과했고, 돈키호태 역시 24살의 나이로 병사로 참전한다. 이전투에서 왼팡릉 링ㄹ어 레판토의 외풀이로 불린다. 

 

다섯시간만에 가톨릭 함대의 승리로 끝났고 오스만 함대는 전멸한다. 이후로 이슬람 세력의 서쪽 진출은 영구히 끝났다. 이는 8세기 카를 마르텔의 투르, 푸아티에 전투와 더불어 이슬람 세력을 격파한 가장 중요한 계기 였으며, 가톨릭 세계가 지중해르 장악하게 되는 곙기 였다. 이

 

펠리페의 2세의 아내이자 영국의 여왕이었던 메리가 사망한 이후 1558년 메리 동생 엘리자베스 1세가 영국 왕위에 올랐고 여국과 경쟁이 시작해진다. 

 

엘리바젭스 1세가 가톨릭 교토인 스콜리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를 사형한 것을 계기로 영국 정벌을 결심하였으나 영군 네덜란드 함대에 의해 1588년 궤멸당하고, 대서양의 패권ㅇ르 빼았긴다. 

 

1607년에는 지부럴터 전투에서 네덜란드 군에 거의 함대를 잊고 전성기가 끝난다. 1598년 펠리페 2세는 ㅇ암으로 삼아한다. 

 

결국 펠리페 2ㅔ세의 가장 큰 맹점ㅇㄴ 순혈령이었는데 하나만을 인정하는 가톨릭 가치가 로마제국의 몰락을 가져온 것처럼 하나의 통일된 제국을 얻고자 했던 그의 노력도 실패로 돌아갔다. 배타적인 태도는 ㅈ국 안팎의 적대세력을 늘려 결국 멸망함과 말았는데 로마제국으로부터 역사적 교훈을 얻지 못했다고 하겠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