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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나라 이웃나라 - 스페인의 신대륙 정복

Varsika 2023. 5. 10. 0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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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키스타도레스(Los Conquistadores, 정복자들)

: 아메리카 대륙을 차지하고자 모험에 나선 정복자들로 이들은 대부분 하급 귀족 이달고(Hidalgo) 계급이었다. 이들은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는 확률이 희박하고 작은 지주에 그쳐야 했기 떄문에 자유와 성공을 위해 신대륙 정복의 길을 떠났다. 이달고란 '이호 데 알고'에서 비롯된 말로 본래 뜻은 '소유가 있는 집안의 자손'이란 뜻이었는데 정통 귀족은 아니어도 군인 출신으로 공을 세우거나, 훗날 돈으로 귀족 계급에 오른 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름 앞에 돈Don이나 도냐Dona라는 칭호를 붙일 수 있었다. 족보상 하급 귀족이었던 이달고 데 상그레(Sangre)와 공을 세우거나 돈으로 계급을 산 이달고 데 프리빌레지오(previlegio)로 나뉜다. 이들은 하급 귀족이지만 기사 계급인 카바예로스로 인정받았으며, 가문의 문장인 에스쿠도레스도 있었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이달고의 대표적인 모습을 그린 작품이자, 스페인어 표준어의 바탕이된 문학 작품이다. 

 

 

에르난도 코르테스

: 19세가 되던 1504년에 아메리카 히스파니올라섬으로 건너가 식민지 생활을 시작했다. 히스파니올라섬은 현재의 아이티와 도미니카를 칭한다. 그는 총독 디에고 벨라스케스 휘하에서 군복무를 하였다. 벨라스케스가 히스파니올라섬을 건너 쿠바를 정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나 이후 다른 지역으로 정복활동을 떠나지 않자 둘 간의 갈등이 싹트기 시작한다.

 

1519년 유카탄 반도(지금의 멕시코) 탐험 대장에 코르테스가 임명되었는데 총독 벨라스케스는 본국의 명령을 번복하고 코르테스의 탐험을 저지했다. 이에 코르테스틑 총독의 명을 어기고 508명의 병사와 16마리의 말, 배 11척을 갖고 출정한다. 코르테스는 체포령이 떨어진 것을 아고 베라크루스에 도착한 뒤 배를 모두 불태우고 내륙으로 전진한다. 

 

코르테스는 원주민 여성 말린체(도냐 마리나)를 만나 그녀의 도움으로 멕시코 정복에 나선다. 오늘날 멕시코에서 '말린체'란 배신자의 상징이다. 코스테스의 군대는 아즈텍 제국의 수도 테노티틀란(지금의 멕시코시티)로 진격했는데 당시 호수 위에 세워진 이 거대한 도시는 인구만 30만 명에 육박했다.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인 파리의 인구가 15만 명이었다. 

 

아즈텍 황제 몬테수마 2세는 코르테스의 군대를 전설 속 수호신(켓살코아틀 신)으로 여겨 환대 했으나 스페인 군에 의해 체포되었고 황궁 역시 간단히 점령되었다. 코르테스는 총독이 보낸 토벌대를 베라크루스에서 전멸시키고 다시 테노치티틀란으로 돌아왔으나 스페인군의 살육에 반발한 아즈텍인의 공격을 받았고 1520년 6월 30일 테노치틀란을 탈출하다 군대가 궤멸되는 피해를 입는다. 그러나 코르테스는 다시 전열을 정비해 아즈텍군 지휘자 사우아코틀을 사살했고 이후 아즈텍 군대가 패퇴한다. 1521년 8월 13일 마침네 테노치틀란이 함락되면서 아즈텍 정복은 완성된다. 

 

코르테스는 1522년 테노치틀란의 총독으로 임명되지만 1526년 월권 행위로 파면되어 본국에 소환된다. 그는 총독시기 아즈텍 사람들의 식인 행위에 충격을 받고 스페인에서 돼지를 도입해 대신 먹도록 했다. 1547년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코르테스의 남미 정벌 이후 지금까지 약 1,500만 명의 원주민이 목숨을 잃었다. 코르테스의 사망 후 유해가 멕시코로 옮겨와 묻혔는데 1823년 사라졌고 현재까지 행방을 알 수 없다.

 

 

프란시스코 피사로

코르테스와 먼 친척뻘이었던 그는 40대 중반에 코르테스의 아즈텍 정복 소식을 들었다. 이달고 신분이었지만 사생하였고 돼지치기로 성장했으며 문맹이었다. 27세였던 1502년에 아이티로 건너가 군인이 되어 1513년 발보아의 휘아로 최초로 태평양에 도착한 유럽인이 된 적이 있었다. (카브리해 산타마리아에서 출발해 파나마를 거쳐 산미겔, 투마코를 다녀옴)

 

1524년 피사로는 1차 탐사를 떠났으며 별 소득 없이 돌아왔고, 1526년에도 2차 탐사를 떠났다. 이 때 끝까지 자신을 따르는 13명(이스라델가요의 13인)의 탐사대의 대장이 되어 페루 해안에 상륙하는데 성공했고, 금과 라마 등을 얻어 스페인으로 돌아간다. 국왕 카를로스 1세는 피사로의 모험 정신에 큰 인상을 받고 그를 1529년 페루 총사령관에 임명, 600명의 군사를 지원한다.

 

1530년 피사로는 다시 잉카 제국 정복에 나섰고 1532년 피우라라는 도시를 건설한다. 이후 페루 요새 카하마르카에 도착하는데 이곳은 잉카제국의 쿠스코에서 약 1,000km 떨어진 곳이었다. 잉카의 황제였던 아타우알파는 수만 명의 전사를 이끌고 요새에 도착한다. 피사로는 음모를 꾸며 황제를 꾀었고, 이에 넘어가 약 8,000명의 호위대만 이끌고 무기 없이 성안으로 입성한 황제는 포로로 잡히게 된다. 호위대는 전멸당한다. (1532년 11월 16일, 카하마르카 전투) 아타후알파는 황금과 은을 대가로 건내주며 목숨을 건졌지만 이듬해인 1533년 결국 처형 당한다. 잉카제국은 지도자를 읽고 별다른 저항없이 항복했고 피사로가 1533년 11월 15일 쿠스코에 입성함으로써 멸망한다. 그의 성공에는 잉카제국으로부터 해방을 원하는 많은 부족의 도움이 결정적이었다. 피사로는 안데스 산맥에 위치한 쿠스코를 버리고 1535년 태평양 해안에 '시우다드 데 로스 레예스(왕들의 도시)'를 건설하니 이곳이 지금의 리마다. 

 

함꼐 충정했던 친구 알마그로와 전지품 분배 문제로 충돌하여 피사로는 1538년 알마그로를 처형했고 이후 그는리마의 궁전에서 알마그로의 추종자들에게 암살 당한다. 

 

 

스페인의 신대륙 통치

 

스페인 본국은 남미 식민지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엔코미엔다 제도를 통해 위임 통치형태로 식민지를 경영했다. 정복자에게 식민지에서의 전권을 주되 세금을 납부받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본국의 감시는 있으나마나 한 것이어서 정복자들은 원주민을 노예로 착취했다. 고통스러운 노역에 유럽인들이 전파한 천연두, 홍역, 매독과 같은 전염병으로 원주민의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었다.

 

양심있는 성직자들(몬테시노스 수사, 라스 카사스 신부)의 노력으로 원주민에게 폭력과 강제노동을 금하는 법이 마련되기도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본국의 법이었고 신대륙에서는 지켜지지않았다. 살라망카 학파의 프란시스코 데 비토리아 신부는 법률가로 원주민 문제에 접근했다. 특히 피사로가 잉카 제국의 황제 아타우알파를 처형했다는 소식이전해지자, 로마제국의 사례를 들어 따지고 들었다. "로마시대에도 시민권이 없는 외국인을 위해 만민법이 있어 외국인을 따로 다루었으나 피사로나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원주민 황제를 처형했다."

 

그는 1493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발표한 교서를 통해 스페인의 신대륙 지배에 대한 법적 근가에 강한 이의를 제기하고 이교도인 아메리카 원주민의 권리도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국제 질서가 한 국가의 질서보다 우선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으로 비토리아의 만민법 주장은 훗날 국제법 이론으로 발전하여 지금도 그는 국제법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원주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했다. 

 

스페인은 부왕령 제도를 실시해서 누에바 스페인 부왕령을 1535년 설치하고, 이어 페루부 왕령을 설치한다. 부왕령은 총 네곳(멕시코, 남미 북부 - 누에바 그라나다, 페루, 라플라타(칠레+아르헨티나)에 설치 되어 남미 국가들이 독립하는 1823년까지 남아 있었다. 라플라타는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끼고 흐르는 강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나 부왕령 역시 기존의 폐단을 극복하지는 못했고, 신대륙에서는 스페인계 대지주들이 대대손손 왕노릇을 하는 현상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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