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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나라 이웃나라 스페인 - 저물어 가는 제국(네덜란드 독립~스페인 왕위계승 전쟁)

Varsika 2023. 5. 10. 0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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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1세는 스페인 왕이 된 뒤에도 네덜란드인을 측근에두고 네덜란드어로 정치를 했다. 네덜란드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네덜란드인들은 카를 로스 1세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었다. 비록 높은 세금이 부담되었지만 같은 네덜란드인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들 펠리페 2세는 스페인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네덜란드인을 경멸했다. 가톨릭을 믿지 않고 장사에만 몰두하는 개신교도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여러 차례 펠리페2세에게 개신교 허용과 세금부담의 경감을 요청했지만 필리페 2세는 오히려 탄압으로 대응했다.

 

당시 네덜란드는 가톨릭의 탄압을 피해 도망쳐온 신교도들, 자유주의자들로 가득차 있었다. 스페인의 종교탄압이 심해지자 네덜란드 개신교도들은 1566년 교회를 습격하여 성상을 파괴하는 폭동을 일으켰고, 펠리페 2세는 알바 대공으로 불리는 페르난도 알바레스를 파견했다. 그는 개신교도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방식으로 폭동을 진압했다.

 

네덜란드인들은 이에 조직적인 독립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네덜란드 독립전쟁, 80년 전쟁, 1568~1648) 스페인 입장에서는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의 전쟁이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네덜란드 전쟁 중이던 1571년, 펠리페 2세는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투르크군을 궤멸시킴으로서 가톨릭의 수호자라는 위엄을 지켰지만, 결국 전쟁 비용을 감당하지 못해 1575년 파산 선언을 한다. 펠리페 2세는 이에 앞선 1560년과 1575년, 1596년 등 총 4번의 파산 선언을 하였고 이는 곧 스페인 제국의 몰락을 예고하는 것과 같았다. 

 

가톨릭의 왕들이라고 불린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2세가 뿌리내린 가톨릭 순혈주의는 카를로스 1세 때 더욱 강화되어 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콘베르소)과 개종한 이슬람교도(모리스코)까지 모두 스페인에서 쫓아 버리게 된다. 가톨릭 지역에 살던 이슬람 교도(무데하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러한 순혈주의는 펠리페 2세에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의료계와 금융업에 종사하던 유대인들이 빠져나가고, 농업에 주로 종사하던 무데하르, 모리스코가 스페인을 빠져나가자 의료, 상업, 농업이 모두 타격을 받았고 스페인 경제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유대인들의 능력을 익히 알고 있던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스페인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을 빠르게 흡수했고 이는 오스만 제국의 경제 성장으로 이어졌다. 

 

 

스페인의 세도정치(펠리페2세부터 펠리페4세까지)

 

펠리페 2세가 세상을 떠나자 아들 펠리페 3세가 1598년 왕위를 잇는다. 그는 자신의 총신(총애받는 신하) 레마르 공작 프란시스코 고메스 데 산도발에게 모든 정사를 맡겼고, 그는 권력을 독점하고 부정축재를 일삼았다. 산도발의 집권시기 스페인은 모리스코 약 30만 명을 추가로 추방하여 경제가 더욱 악화되었고, 네덜란드와는 1609년부터 12년간 휴전하는 협정을 맺었다. 

 

펠리페3세에 이어 1621년 펠리페4세가 즉위한다. 그 역시 총신인 올리바데스 백작, 가스파르 데 구스만에게 모든 권한을 주었다. 펠리페3세가 즉위한 1621년은 네덜란드와의 12년 휴전이 끝나던 해로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동시에 구스만은 스페인 내부 개혁에 착수했는데 귀족과 성직자들의 방해에 부딪혀 성과를 내지 못했다. 네덜란드와의 전쟁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마무리되면서 결국 네덜란드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다. 

 

펠리페2세부터 펠리페4세까지 스페인 왕은 포르투갈 왕을 겸하고 있었다. 이는 1580년 포르투갈 왕실의 후사가 끊겨 가장 가까운 핏줄인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왕위를 이어받은 것에서 기인한다. (펠리페2세의 어머니는 포르투갈 공주였던 이사벨) 펠리페2세가 포르투갈왕을 겸함에 따라 남미 전체가 스페인의 영토가 되었고, 신하들은 해양대국으로 거듭나기 위해 리스본으로 천도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펠리페 2세는 단호히 거부하였다. 이후 스페인의 국운이 쇠약해지자 포르투갈은 독립을 요구했고 펠리페4세 때인 1640년 결국 독립해 60년 간의 포르투갈 지배도 끝이 난다.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

 

펠리페 4세는 40세에 아들 카를로스2세를 얻었다. 그는 근친혼으로 인하여 태어날 떄부터 곱사등에 턱을 다물지 못하여 음식을 씹지 못할 정도였다. 카를로스2세는 4살이 되던해에 왕위에 즉위하였는데 사람들은 그를 백치왕, 또는 미치광이왕이라고 불렀다. 카를로스 2세는 두 명의 왕비를 두었으나 자식을 얻지 못했다.

 

스페인 왕위 계승을 두고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서로 눈독을 들였는데, 프랑스는 좌우로 포위된 합스부르크 왕가의 연합을 깨기 위해, 오스트리아는 떠오르는 프랑스를 억누르기 위해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계승 후보로는 바이에른의 호세 페르난도, 오스트리아의 카를로스, 프랑스의 펠리페(필립)이었다.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 대부분의 국가는 호세 페르난도를 지지했다. 특정 국가의 힘이 강성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카를로스 2세는 1698년 유언장을 작성하며 세력의 견제를 이루기 위해 바이에른 공작 호세 페르난도(당시 6세)를 지명했다. 유럽 대부분의 국가가 이 결정을 수용했는데 이듬해 호세 페르난도가 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카를로스 2세는 1700년 10월, 루이 14세의 손자 펠리페(필립)을 계승자로 지정하고 한달 뒤 세상을 떠났다. 이미 유럽의 최강자로 떠오른 프랑스의 눈치를 본 결과라 하겠다. 그가 스페인 왕으로 즉위하니 펠리페 5세다.

 

1701년, 신성로마제국은 영국, 네덜란드, 포르투갈과 동맹을 맺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카를 대공(카를로스)를 왕으로 추대했다. 펠리페 5세는 프랑스식 중압직권체제를 도입해 스페인 내부의 여러 왕국의 자율권을 뺏았기 때문에 카탈루냐 왕국, 아라곤 왕국 등이 반기를 들고 신성로마제국 편에 섰다. 1702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시작되고 1713년까지 전쟁이 계속되었다. 북아메리카 식민지에서도 프랑스와 영국 간 전투가 벌어졌다.

 

카를로스 대공은 1710년 마드리드에 입성하게 된다. 스페인이 다시 합스부르크 왕가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견제한 영국은 네덜란드와 평화협상을 진행하여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을 체결한다. 네덜란드 역시 스페인이 강성해진다면 다시 네덜란드를 지배하려 들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잇었다. 펠리페 5세는 자신의 후손이 프랑스 왕이 되는 것을 영구히 포기하는 것과 함꼐, 루이 14세도 스페인 왕이 되는 것을 영구히 포기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즉, 스페인 왕위를 부르봉 왕가가 이어가되, 프랑스와 스페인은 절대 하나의 제국으로 합쳐질 수 없으며 합스부르크 왕가 역시 스페인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게 되는 절충안이었던 셈이다. 이 조약은 1714년 라슈타트 조약, 바덴 조약 등으로 보완되고 결국 전쟁은 막을 내린다. 

 

이 조약을 말미암아 네덜란드도 스페인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 남부(벨기에)까지 독립하게 된다. 오스트리아는 스페인이 지배하던 영토 남부 네덜란드(벨기에), 밀라노 공국, 샤르데냐 공국, 나폴리 왕국, 시칠이아 왕국 등을 할양받았으나 본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큰 소득이라 할 수 없었다. 또한 스페인은 유럽 내 모든 영토를 빼앗겨 더 이상 제국이 아닌 이류 세력으로 전락하게 된다. 사실상 프랑스의 보호국가가 된다. 루이 14세에 이은 루이 15세(1710~1774) 시절에도 프랑스는 유럽의 중심을 자체해 여러 문제에 간섭했고, 프랑스가 수행하는 전쟁에 스페인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훗날 나폴레잉이 페레네 산맥 남쪽은 아프리카라고 무시했던 인식도 이러한 맥락에서 기인한다. 

 

반면 영국은 지중해의 요충지인 지브롤터와 메노르카를 얻었다. 특히 지브롤터는 군사적 의미가 아주 커 지금도 영국의 영토로 남아있다. 스페인 정부는 여전히 영국의 영토로 인정하지 않는다. 북아메리카 지역에서도 영국은 프랑스로 부터 식민지 영토 대부분을 할양받아 캐나다 지방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또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유럽 대륙의 세력 균형이라는 개념이 도입되고 영국은 유럽에 절대 강자가 등장하지 않도록 균형을 잡는 역할을 맡게 된다. 이 원칙은 나폴레옹이 등장하던 1795년까지 80년간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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