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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나라 이웃나라 - 스페인(나폴레옹의 침략과 스페인 독립전쟁)

Varsika 2023. 5. 1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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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6년부터 1700년까지 184년간 합스부르크 왕가가 스페인을 통치했다. (카를로스 1세부터 카를로스 2세까지 5명) 이후 펠리페 5세부터 현재의 펠리페 6세까지 총 12명의 왕이 부르봉 왕가에서 나왔다. 스페인은 펠리페 5세가 즉위한 1700년부터 나폴레옹이 몰락하는 1814년까지 프랑스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터지자 스페인 왕실은 공포에 휩쌓인다. 특히 1793년 루이 16세가 처형 당하자 스페인은 영국 등과 손을 잡고 대 프랑스 동맹(제1차 1793~1797)을 맺고 전쟁에 참여한다. 그러나 1799년에 나폴레옹이 권력을 잡고 1806년 신성로마제국을 멸망시킨다. 그는 1804년에 프랑스 황제로 즉위한 이후 거이 모든 반프랑스 세력을 굴복시킨다. 스페인 역시 나폴레옹에 항복하였으나 프랑스 왕정의 복고를 두려워한 나폴레옹은 부르봉 왕실의 싹을 자르기 위해 스페인 정복을 계획한다.

 

1805년 10월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함대에 고ㅞ멸당한 나폴레옹은 1806년 대륙 봉쇄령을 내린다. 그러나 영국과의 교역이 중요했던 포르투갈과 러시아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고 포르투갈이 영국과 지속 교역하자 나폴레옹은 포르투갈 원정을 계획한다. 나폴레옹운 이를 위해 1807년 10월 스페인과 퐁텐블로 조약을 맺고 스페인을 관통해 포르투갈로 향한다는 내용을 전한다.

 

그러나 조약을 맺은 후 1808년 프랑스 군은 스페인의 주요 도시를 점령했고, 이에 격분한 스페인 백성들이 포르투갈과 연합해 대프랑스 전쟁을 시작하니 이를 6년에 걸친 스페인 독립전쟁이라 한다. 포르투갈 왕실은 이미 나폴레옹의 군대가 스페인에 진주하자 브라질로 망명했고, 스페인 왕실도 비슷한 루트로 멕시코 망명을 타진하고 잇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스페인 왕실은 격분했고 국왕 카를로스 4세와 당시 전권을 휘두르던 총신 고도이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여 폭동이 일어났다. 당시 고도이는 왕비의 정부라는 소문이 파다했으나 국왕 카를로스 4세는 사냥에 정신이 팔려 왕실의 문제에도, 국정에도 관여하지 않았다. 왕자 페르난도는 고도이를 축출할 기회라 여기고 반란에 앞장서 카를로스 4세, 고도이, 왕비를 모두 마드리드에서 쫓아낸다. (아란후에스로 피난감) 이어 승리를 선언하고 페르난도가 즉위하니 페르난도 7세다.

 

이렇게 스페인 왕실이 분열되자 나폴레옹은 중재에 나섰고, 프랑스 남부의 바욘(스페인명 바요나)로 양측이 모일 것을 제안했고 양측에 왕위 포기를 강요한 후 자신의 형이자 나폴리의 왕이던 조제프(스페인명 호세 보나파르트)에게 스페인 왕위를 물려 준다. 이후 페르난도 7세는 발랑세성, 카를로스 4세는 파리 교외 퐁텐블로성으로 압송되어 유폐된다.  이들은 나폴레옹이 쫓겨난 1814년까지 갇혀 있게 된다. 

 

그러나 호세 1세가 스페인 왕위에 오르자 스페인 백성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고 독립전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나폴레옹은 스페인인의 저항정신을 간과했던 것이다. 스페인 저항군은 기습 후 사라지는 '작은 전쟁'을 주로 벌였는데 이를 게리야(Guerrilla), 영어로는 게릴라라고 한다. (Guerra 전쟁, Guerrilla 작은 전쟁)

 

영국과 포르투갈도 1809년부터 스페인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 군을 공격하기 시작하는데 동맹군의 총지휘자가 바로 아서 웰즐리 장군, 훗날 워털루 전쟁을 승리로 이끈 웰링턴 공작이다. 

 

스페인의 주요 인사들은 프랑스군이 점령하지 못한 남부 카디스에 모여 카디스 의회를 구성하고 1812년 스페인 역사의 첫 헌법을 반포한다. 스페인이 입헌 군주국임을 골자로 하였고, 페르난도 7세의 이름으로 반포되었으며 이 헌법에 따라 이듬해 선거를 통해 새 의회가 구성된다. 반포일은 3월 19일은 산호세, 즉 성요셉의 날이라 호세의 속칭인 페파를 따 페파의 날이라고도 한다. 

 

1812년은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과 스페인 헌법 반포 등 굴직한 사건이 일어났고, 60만 대군이 러시아로 간 틈을 타 영,포,스 동맹군은 총공격을 감행, 1813년에 프랑스 군을 스페인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듬해 4월 결국 나폴레옹은 퇴위하여 엘바섬에 유폐된다. 5월에는 유폐되었던 페르난도 7세가 풀려나 스페인 왕으로 돌아왔다. 그는 1813년 12월 퇴위한 호세 1세의 뒤이어 왕위에 올랐고 왕권을 크게 제한한 카디스 헌법을 무효화한다. (상당수의 지주, 성직자, 왕당파들이 카디스 헌법에 반발했다.)

 

그러나 자유주의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고, 라파엘 데 리에고 장군의 반란으로 페르난도 7세도 결국 카디스 헌법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1820년, 남아메리카 독립을 요구하는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임명된 델 리에고은 출항직전 카디스에서 반란을 일으켜 마드리드로 회군한다.) 그러나 델 리에고는 프랑스 부르봉 왕가가 10만 대군을 투입해 자유주의자들을 탄압하고 스페인 왕권이 회복되는 과정에서 체포되어 1823년 사형에 처해진다. 페르난도 7세기 실권을 의회에 넘겨준 1820년부터 1823년까지는 자유주의자들과 왕권파의 치밀한 권력 투쟁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미의 독립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고 대부분의 남미 식민지는 1810년부터 1825년 사이 독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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