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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나라 이웃 나라 스페인 - 남미 식민지의 독립

Varsika 2023. 5. 10.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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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볼리바르(1783~1830)는 남미 북부 지방의 독립운동을 주도 했다. 카라카스(베네수엘라의 수도)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으며 21세가 되던 1804년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나폴레옹에 큰 충격을 받았고, 고향에 돌아와 독립운동에 뛰어 들었다. 진보적 사상가 시몬 로드리게스의 영향을 받이 받았고 훗날 로드리게스를 국가의 스승으로 기리기도 했다. 유럽여행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오기 전, 미국을 방문하였는데 여기서 연방 국가에 대한 구상을 하게 되고 귀국 후 독립운동 세력을 연합해 스페인군과 싸워 이겼다. 1811년 베네수엘라 공화국을 건국하였으나 왕당파의 반격에 카르타헤나(지금의 볼리비아 항구도시)로 망명한다.

 

이곳에서 카타르헤나 선언을 통해 베네수엘라와 콜롬비아의 독립을 선포하고 다시 독립 전쟁을 지휘한다. 1814년 다시 베네수엘라에 입성하여 제2 베네수엘라 공화국을 선포한다. 1814년 유럽에서 나폴레옹이 패퇴하고 다시 스페인이 주권을 되찾자 왕당파, 고위성직자들은 본국의 힘을 빌려 다시 카라카스를 점령했고 볼리바르는 콜롬비아 아이티 등으로 도망쳐 혁명생활을 한다.

 

1819년 영국군과 아일랜드군의 도움을 받아 다시 콜롬비아를 해방시켰고, 미국 연방 정부를 본따 그란 콜롬비아(지금의 콜롬비아 + 에콰도르 + 베네수엘라 + 페루 + 기아나 일부)를 건국한다. 1821년에는 베네수엘라, 1824년에는 페루에서 왕당파를 제거함으로써 남아메리카를 해방시킨다. 1819년부터 1830년까지 그란콜람비아의 대통령을 역임한다. 베네수엘라는 그를 기려 정식 국호에 그를 넣었고(레푸블리카 볼리바리아나 베네수엘라), 볼리바아는 나라 이름 자체를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 카라카스에 있는 시몬 볼리바르의 생가는 현재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호세 데 산마르틴은 칠레, 아르헨티나 등 남미 대륙 남부의 해방자였다. 그는 1778년 아르헨티나의 야페유에서 태어났다. 7살에 스페인으로 건너가 마드리드의 귀족 학교에서 수학하고 장교가 되어 20년간 스페인군에 복무했다. 1812년 아르헨티나로 돌아온 그는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는데 다른 남미 독립운동가들이 페루 독립에 주력한 반면 그는 칠레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1813년부터 1817년까지 아르헨티나에서 스페인을 쫓아내고 안데스 산맥을 넘어 칠레의 왕당파를 쫓아낸 다음 1818년 산티아고를 점령하고 칠레를 해방시켰다. 1820년에는 페루의 왕당파를 칠레군과 함동으로 몰아내고 1821년 7월 28일에 리마에 입성함으로써 페루까지 독립시켰다. 그는 페루의 보호관(총독)이 된다.

 

그러나 페루 내부 왕당파의 저항이 계속되고 독립군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나자 시몬 볼리바르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한다. 둘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에콰도르 과야킬에서 만나 이틀 간 회담한다. 1822년 7월 21일부터 22일까지였다. 그러나 볼리바르는 공화제를, 산마르틴은 군주제를 주장해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산마르틴은 결국 정치싸움에 휘말려 1824년 프랑스로 망명했고 프랑스 북부 불로뉴에서 가난한 삶을 마감한다. 그는 아르헨티나 국민의 아버지로 기려지고 있으며 산마르틴 해방자 훈장은 아르헨티나 최고의 훈장이다. 사후 30년이 지난 1880년 그의 유해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성당에 안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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