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이야기들/독서

몫(최은영,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中)

Varsika 2023. 9. 5.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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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과 줄거리>

해진 : 주인공, 소설의 독백은 해진을 '당신'이라고 부른다. 편집부 일을 하며 그곳을 떠나고 싶어 했지만 학기가 바뀌어 희영, 정윤, 용욱이 편집부를 떠났을 때에도 해진은 편집부에 남는다. 글을 읽는 기쁨이 편집부 생활이 주는 고통보다 크다고 생각한다. 해진은 결국 기자가 된다.

 

정윤: 대학시절 세미나의 간사. 정윤은 같은 편집부에서 만난 용욱과 결혼했고 그의 유학을 위해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희영 : 편집부의 희영은 여성인권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용욱을 비롯한 대부분의 운동권 지도부들은 구조적인 모순과 거시적인 문제에만 관심을 갖는다. 여성인권에 대한 희영의 진심도 그저 '배부른 소리'로 취급받는다. 희영이 좋아하던 정윤조차 희영에게 몸을 팔아야 할 만큼 가난해본 적도 없으면서 같은 여자라고 기지촌 여성의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있느냐고 따져 묻는다. 희영은 정윤의 말에 반박하지 않고 그냥 알겠다고만 답한다. 희영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운동가가 되어 기지촌 여성을 위한 운동을 하다 서른아홉 살의 나이로 눈을 감는다. 

 

 

<리뷰>

책에 실린 단편집 중에 가장 감명 깊었다. 제목이 '몫'인 부분도 마음에 들었다. 작가는 본인이 대학시절 겪었던 윤금이씨 피살사건과 그 이후 있었던 사회운동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 이야기를 썼다고 한다. 살아있을 땐 사람 취급을 하지 않다가 죽고 나선 '민족의 누이'로 만들어 시신 사진을 유인물로 뿌린 모습을 보고 본인이 당사자나 유가족이었다면 무척이나 슬프고 화가 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세계일보에서 진행한 인터뷰에서 작가는 글쓰기의 나르시시즘에 빠지면 안 된다고 말했다. 글을 쓰는 것은 그저 노동일 뿐이지, 다른 노동에 비해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본인의 생각을 밝혔다. 인터뷰를 읽고나니 <몫>이 마치 스스로에게 던지는 경계(警戒)이자 자기 성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주장의 진정성에 대해 의심, 추궁을 받는 희영을 보면서 또 그런 지적을 하는 정윤을 보면서 둘의 관계는 거기서 끝날 것이라고 쉬이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런 지적을 당해보기도, 지적을 해보기도 했지만 어느 쪽이 옳다기보다는 그저 그런 지적은 관계를 충분히 파탄낼 수 있다는 것만이 내가 알 수 있는 전부였다. 그 일이 있고 난 이후 희영이 갑자기 사회운동에 전념하게 되는 전개는 다소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희영에게는 그 방법 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윤을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그 길 밖에 없었을 것이다. 타인에게 자신의 진정성을 증명받고자 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제 몫'을 하기 위해서 내린 선택이었으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활동가가 되는 수 밖에는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부분은 책을 다 읽은 후에도 계속 생각을 곱씹게 되었다. 제 몫을 다하는 삶이란 무엇인가. 

 

해설에서 양경언 평론가는 극중 언급되는 글을 가르켜 그런 글은 흔히 누군가가 '재수가 없어서' 겪는 일로 다뤄졌던 사안을 사회가 해결해야 할 사안이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즉 모두의 문제로 바라보게 해준다고 말하며 무엇보다 글을 매개로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의 마음에" 닿을 수 있다는 점을 깨울칠 수 있게 된다고 말했다. 공감되는 구절이었다. 

 

 

<해설>

<몫>은 자기혐오와 씨름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1990년대 중반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 여성주의적인 관점에서 학생운동을 했던 이들의 분투와 겹쳐놓는다. 이들은 관점이 왜소하다는 시선에 맞서 무엇이 더 숭고한지 위계화하려는 편협한 지성의 언어가 아닌 다른언어로 자신들이 지향하는 가치에 대해 말하려 하고, 이를 통해 끝끝내 지키고자 하는 사람이 있음을 알리고자 노력한다. <몫>의 인물들은 자신을 이루는 다양한 정체성을 인식함으로써 그것이 설령 자기 자신을 깎아내린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스스로가 어떤 목소리를 내려하는지, 자신의 '몫'이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을 포기하지 않는다. 

 

 

<책 속에서>

- 어쩌면 희영은 그때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지금의 당신은 생각한다. 정윤을 존경한다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정윤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정윤이 자신보다 더 돋보이는 것을 경계했던 용욱의 마음을 꿰둘어보았는지도 모른다고, 

 

-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어.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을 털어버리는 사람들 있잖아.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고 느낌을 얻고 영영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편집부 할 때, 나는 어느 정도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아. 내가 그랬다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달랐겠지만.(※ 희영의 말)

 

- 당신은 걷다가도, 밥을 먹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깨어 분노에 휩싸였다. 분노는 배출될 수 없는 독처럼 하루하루 당신 몸에 쌓여갔다. 당신은 당신의 분노가 무엇 하나 바꾸지 못하고, 그저 당신 자신의 행복을 깨뜨리고 있다는 생각에 슬픔을 느꼈다. 

 

- 우리는 구조적인 모순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돼요. 기지촌 사건은 민족 모순, 계급 모순 아래에서 배태된 문제죠. 거대한 구조를 봐야 해요. 왜 그 사람이 그때 거기서 살해당했는지, 구조적인 틀을 놓치고 보면 안 되죠. 

 

- 그렇게 멸시하고 인간 취급도 안 하던 사람을 민족의 누이라고 부르는 거, 그걸 해석하고 싶어요. 가해자가 미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이었더도 그렇게 사람들이 분노했을까 싶고....

 

-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그런 일이 없어질 거라고, 통일 조국이 되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여자들이 맞고, 강간당하고, 죽임 당하는 일이 없어질 거라고 믿어요,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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