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과 일상/역사

근현대사 요점 정리 5. 애국계몽운동 / 신민회 / 기타 단체들

Varsika 2024. 3. 1.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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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계몽운동은 개화운동이자 민족실력양성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애국계몽운동과 의병활동이 합쳐서 3.1 운동이 일어난다. 

 

* 개화운동이라는 점에서 위정척사에서 시작한 의병활동과 차이가 있음.

* 애국계몽운동은 실력양성 운동이자 국원회복 운동이라는 점에서 개화운동과 차이점을 보인다. 

* 애국계몽운동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어느 정도 정당화시킨 면이 있고 훗날 관련된 인물들이 친일파로 변절하기도 한다. 

 

- 1904년 보안회: 일제의 황무지개간요구를 무산시킴. 농고아회사를 만들어 스스로의 힘으로 황무지 개간을 추진

 

- 1905 헌정연구회: 대중적인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헌정 연구회는 을사조약 체결 이후에 '대한자강회'로 개편하였으며 교육, 언론, 종교, 문화활동을 정치활동에 우선시했다. 연설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했고 '원보'를 간행했다. 고종 강제퇴위를 비판했다. 1907년 정미조약 이후 강제 해산된다. 후신인 대한협회로 이어지나 훗날 대한협회는 친일단체화 된다. 

 

- 일제는 신문지법을 1907년, 보안법을 1908년 개정하여 애국계몽운동을 탄압하였다. 대한매일신보(양기탁, 박은식, 신채호)와 황성신문이 이에 저항했다. 

* 독립신문은 이보다 이른 1898년에 폐간된다.

 

- 신민회(1907, 비밀결사단체)

표면적으로는 경제적, 문화적 단체를 내세웠다. 대성학교와 오산학교를 세웠고 평양자기회사, 대구 태극서관(출판사겸 서점)을 운영했다. 내면적으로는 군사적 활동을 계획해 해외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했고 독립전쟁론을 추장했다. 만주 상원보에 신흥강습소를 세웠고 이는 훗날 신흥무관학교로 이어진다. 신민회는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해체된다. 

* 신민회는 민주공화제 정부를 추구했다. (대구에서 생긴 대한광복회와 같은 점) 반면에 독립의군부(1912)는 복벽주의, 독립협회(1896~1899)는 입헌군주제를 주장했다. 

 

- 중광단은 만주 길림성에서 1911년 대종교 세력에 의해 설립된다. 1919년 같은 지역에서 김원봉의 의열단이 창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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