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과 일상/역사

근현대사 요점 정리 4. 항일의병운동의 전개

Varsika 2023. 12. 30.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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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을미의병

- 1895년 을미사변(10월 8일), 단발령(11월)으로 거병

- 을미의병은 1896년까지 이어졌고 친일내각은 서울 수비군을 지방에 파견하여 진압을 시작함.

- 친일내각이 혼란한 틈을 타 고종은 아관파천(1896년 2월 11일)을 단행

- 친러내각 수립 이후 고종의 의병해산 권고조치(2월 18일부터 2월 27일까지)

- 양반 의병장들의 해산, 농민 의병들의 혼란 가중

* 을미의병은 근왕창의라는 왕조 중심, 위정척사 사상의 한계를 갖고 있었으나 구한말 최초의 의병운동이라는 의의가 있음

 

* 유인석(충북 제천-강원 영월 일대), 민용호(강원 강릉) 부대는 만주로 이동한다. 

유인석은 제천에서 궐기하여 단양, 청풍(제천)을 거쳐 충주부를 점령하였으며 3개월 넘개 항쟁했다. 이후 관군과 일본군의 반격이 거세지자 제천으로 퇴각한다. 이후 의병해산 권고조치가 있었으나 지속 항쟁하였다. 제천에서 패배한 이후에 서북 지역을 통해 만주로 망명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압록강을 건넌 뒤 청나라로부터 무장해제를 요구받아 의병을 해산한다.

 

훗날 1908년 5월 25일, 일제는 관찰부를 충주에서 청주로 옮긴다. 여기에는 서울에서 진압군 증파가 용이한 곳으로 옮긴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당시 충주에는 철도가 없었으나 청주 근방 조치원에는 철도가 가설된 상태됨)

 

민용호는 경기도 여주에서 궐기하여 산악지대인 관동으로 이동하였다. 원주, 평창, 진부를 거쳐 병력을 증원하고 1896년 1월 강릉에 도착했다. 산군지방 포수를 모집하여 영동 9군 도창의소를 설치했다. 그해 3월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며 지리적 요충지인 원산을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기밀 누설로 실패하였다. 6월에는 고성, 양양을 점령하여 군수를 처형하였고 7월에 다시 원산을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했다. 8월에 회양, 금성(지금의 김화)에서 격전을 벌였으나 경군군과 지방 관군의 경계가 삼엄했다. 민용호는 다시 북진하여 9월초 고원, 영흥, 정평을 거쳐 함흥부를 점령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장기주둔이 여의치 않아 결국 만주로 떠난다. 압록강을 건넜으나 청나라로부터 무장해제를 요구받아 의병을 해산한다. 

 

 

2. 을사의병

- 1905년 을사조약이 계기. 본격적 의병활동이며 평민 의병장이 나타나기 시작(신돌석 등)

 

3. 정미의병

- 1907년 고종의 강제폐위(헤이그 특사),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1907년 7월 24일)에 따른 군대 해산이 계기

- 13도 연합의병 조직, 서울진공작전을 계획하였으며 1907년 12월, 서울 각 공사관에 의병부대는 합법적 교전단체임을 통보함(총대장 이인영 → 부친상으로 귀향). 진공작전 무산

 

4. 호남의병

- 남한대토벌작전(1909.9~1909.10)

- 남한대토벌작전 이후 국내 의병활동을 잃고 만주, 연해주로 활동 지역을 옮기게 된다. 

 

5. 기타

 

1904년

(1) 한일의정서(2월 23일)

일본군이 한국의 영토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권한 획득(러일전쟁 중 체결)

 

(2) 제1차 한일협약(8월 22일, 한일 외국인고용 용빙에 관한 협정서)

- 일본이 고용한 고문을 통해 한국의 재정권과 외교권에 개입할 수 있게 됨

- 고문정치

(1) 재정고문: 메가타 다네타로(화폐정리사업)

(2) 외교고문: 더럼 스티븐스(미국)

 

1905년

(1) 화폐정리 사업

- 전환국(조폐창) 폐지, 일본제일은행 한양지점에서 조선 화폐의 제조 및 관리 허가

- 금본위제 도입

- 조선의 상업자본 몰락

 

(2) 을사조약(제2차 한일협약, 11월 17일, 통감부설치)

- 일본의 러일전쟁(1904년 2월 8일 ~ 1905년 9월 5일) 승리 후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

 

1907년

(1) 헤이그 특사(4월 서울 출발, 6월 4일 페테르스부르크 도착, 6월 25일 헤이그 도착)

특사단은 러시아의 지원을 얻기 위해 15일간 페테르스부르크(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렀으나,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를 만나지 못했다. 특사단은 6월 19일 출발하려 베를린을 겨융하여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한다. 회의가 시작된 지 열흘이 지난 시점이었고, 회의 참석도 불가했다.

 

대신 고종의 밀명을 받은 미국인 헐버트의 도움으로 특사단은 영국 언론인 스테드가 주관한 언론인 모임(7월 9일)에서 발언할 기회를 얻었다. 

“일본인들은 항상 평화를 말하지만 어찌 기관총구 앞에서 사람들이 평화로울 수 있는가. 한국민이 모두 죽어 없어지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는 한국의 독립과 한국민의 자유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극동에 평화는 있을 수 없다. 한국 국민들은 독립과 자유라는 공동 목표에 대하여 정신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이 목적을 위하여 한국 국민은 죽음을 무릅쓰고 일본인의 잔인하고 비인도적이며 이기적인 침략에 대항하고 있다. 어떠한 행동을 해서라도 일본인과 싸우려고 결심한 2천만의 한국 국민을 대량 학살한다는 것은 일본인에게 있어서 그다지 흥미 있거나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다.” (《The Independent》 Vol.63, No.3064, August 22.1907, New York)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끝내 참석을 거부당하자 이준은 7월 14일 헤이그에서 순국한다. 

이후 이상설은 연해주로 가 독립운동에 매진했고, 통역관으로 함께한 이위종은 헤이그에서 러시아로 돌아간 것으로 추정되나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는다. 고종의 밀명을 받은 헐버트는 미국으로 돌아가 한국의 입장을 미국에 소개했다. 1948년 한국 정부 수립이후 방한하였으나 수일 뒤 세상을 떠나 현재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2) 고종 강제 퇴위

1907년 7월 16일, 이완용과 송병준을 중심으로 한 대한제국 내각에서는 황제 폐위가 결정되었고, 7월 18일 황태자 대리 조칙이 발표되었다. 7월 20일 양위식이 거행되었다. 

(3) 순종 즉위(7월 20일)

 

(4) 한일 신협약(정미7조약, 7월 24일) - 차관정치

- 7월 27일 신문지법(언론탄압)

- 7월 29일 보안법(집회, 결사 금지)

- 7월 31일 군대해산 조칙 발표

 

 

* 헤이그 특사 정사 이상설

1911년 권업회(勸業會)조직 / 훗날 러시아에 의해 해체됨

1914년 이상설(1대 정도령), 이동휘(2대 정도령) 중심으로 대한광복군정부 창설(블라디보스토크)

* 이후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러시아 내 한인들의 정치, 사회활동이 금지되어 대한광복군정부는 설립 만 1년을 채우지 못하고 해체된다. 

1917년 3월 2일 이상설, 러시아 우스리스크에서 사망(향년 46세)

 

1919년 3.1 운동 이후 연해주 전로한국회중앙총회(대한국민의회)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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