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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세 개의 인도와 군사 쿠테타가 없었던 사연(서울대 강성용 교수)

Varsika 2022. 6. 5.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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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포스팅은 2020년 ASIA 지역전문가 과정 7강 강연(본문 하단 링크)을 참고하였습니다.

* 본 강의는 아래 두 자료를 읽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 「쌍쓰끄리땀과 암벧까르의 소환 그리고 고대사 재구성과 인도 현대 정치의 규정 요소로서의 언어(링크)」서울대학교 아시아 연구소 <아시아 리뷰> 

- 「인도에는 왜 군부 쿠데타가 없는가: 인도군의 위상과 역할를 이해하기 위한 역사적 맥락(링크)」, 대외경제정책연구원 KIEP 

* 본문 전개는 방송을 따르되 일부 내용은 이해하기 쉽게 순서를 조정하였습니다.
* 본문 내용 중 '▷' 표시는 방송 내용 외 포스팅을 하면서 추가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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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범위와 다양성의 다층성

 

1914년의 British India 범위

 

영국 식민지 시기의 브리티시 인디아는 현재의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와 미얀마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이었다. 미얀마는 1937년에 브리티시 인디아에서 분리된다. 인도를 떠올릴 때는 독립국가의 단위, 문화적인 단위, 역사적인 단위 크게 3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 미얀마는 신인도통치법(Government of India Act 1935)에 따라 1937년 현재 예맨의 아덴과 함께 인도에서 분리되어 별도의 식민지가 된다. (추가 끝)

 

많은 경우 인도를 남아시아와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UN에서는 남아시아 지역협력기구(SAARC)에 포함된 8개 국가를 다룬다. 방글라데시, 부탄, 인도, 몰디브, 네팔, 파키스탄, 스리랑카, 아프가니스탄이 그것이다. 한국도 이 조직의 참관국 9개국 중 하나이다.

 

민족국가(nation state)는 문화를 공유하는 지배적인 집단(ethnic group)으로 이루어진 국가를 말한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근대국가 울타리 안에서 운명을 함께한다고 믿는 집단, 그들이 만든 상상의 공동체가 바로 민족(nation)"이라고 말한 바 있다. 민족국가의 구성원들은 역사, 언어, 종교를 공유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관점으로 인도를 보면 국가 전체가 아니라 각 주가 이런 민족국가 개념에 더 부합한다. 인도를 비롯한 남아시아는 다양성뿐만 아니라 다양성이 가진 다층성과 다면성을 알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민족, 종교, 언어 중 하나의 측면으로만 봐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인도의 종교와 언어

 

인도의 종교는 힌두교가 80%, 이슬람이 14%, 기독교 2% 수준이다. 언어를 기준으로 이야기하자면, 공용어는 힌디와 영어지만 국어는 없다. 하나의 국어를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앙정부와 별도로 각 주에서 공용어를 설정한다. 지역별로 사용되는 언어 현황은 아래와 같다. 문자 역시 지역별로 다르다. 특히 남인도권 문자는 동남아시아(태국 등)에서 사용하는 문자와 형태가 비슷하다. 그 문자들의 조상이 남인도 문자이기 때문이다. 

 

 

이런 지역별 차이는 인도-유러피언 계통의 사람들이 이주하며 비롯된 것이다. 이란을 거쳐서 인도까지 이주해온 사람들이 현재 북인도권의 언어와 문자를 만들었다. 

 

India-European migrations(Aryan migrations)

 

인도 헌법은 22개 언어를 인정한다. 헌법 제정시에는 14개의 언어가 인정되었고 이후 개정을 통하면서 부칙(Schedule)으로 추가된 언어를 합하여 22개에 이르게 된 것이다.

 

* Schedule은 인도 헌법에 부칙 조항을 뜻한다. SCs(Scheduled Castes)는 헌법에 보호 대상으로 명시된 불가촉천민 계층을, STs(Scheduled Tribes)는 각 지역의 원주민들을 뜻한다. 

 

▷ SCs는 지정 카스트, STs는 지정 부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들은 오랜 시간 동안 사회, 경제적으로 소외된 계층이다. 이들은 어느 계층에도 속하지 못하고 불가촉천민인 Dalit(달리트)로 구분되었다. 인도 전체에서 불가촉천민은 약 16% 정도를 차지한다. SC와 ST 외에 OBC(Other Backward Caste, 기타 소외 계급) 역시 지원대상이다. OBC는 주로 수공업에 종사하는 수드라 계층이 많다. 인도 정부는 이들 3개 그룹을 일정 기준을 두고 쿼터 방식으로 관리하고 있다. (추가 끝)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할

인도 번왕국(Princely states of India)

 

1947년, 영국 의회에서 인도 독립법이 통과되고 이후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할 독립된다. (동파키스탄,  인도, 서파키스탄으로 분할) 식민시기에 인도 내부에는 565개의 토후국(Princely States)이 있었다. 모두 개별 왕국으로 존재했다. 특히 하이데바라드(위 지도의 중앙부 녹색 지역)와 같은 거대한 토후국은 인도라는 하나의 국가로 종속시키는데 어려움이 있기도 했다. 이들 토후국은 대부분 지배계층은 무슬림이었고 피지배계층은 힌두인들이었다. 이 때문에 인도가 동, 서 파키스탄으로 나뉘며 독립할 때에는 종교적 이유로 인하여 대거 이주민(실향민)이 발생했다, 인도와 파키스탄 양측의 추측이 조금 다르나 대략 7백만 명의 실향민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과정에서 유혈사태가 일어나 최소 20만 명에서 20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파키스탄의 건국, 우르드어와 힌디어

과거에도 무슬림만의 나라를 건국하자는 논의는 있었으나, 1933년 라흐마트 알리가 [Now or Never]이라는 이름의 정치 간행물을 만들며 이 구상을 본격화한다. 파키스탄의 공용어는 우르드어와 영어다. 그러나 실제 사용되는 비중은 펀자브어가 39%, 파슈토어가 18%를 차지한다. 우르드어를 사용하는 비중은 7% 남짓이다. 

 

힌디어와 우르드어는 뿌리가 같은 언어라고 할 수 있다. 간디는 이 둘을 합쳐 힌두스타니(Hindustani)라고 불렀다. 같은 언어이나 문자가 다르고, 종교적 속성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우르드어는 이슬람교의 언어의 성격을 띠게 때문에 파키스탄이 건국될 당시 당연히 힌디어가 아닌 우르드어가 공영어가 된 것이다.

 

힌디어를 하나로 정의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어떤 이들은 아주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산스크리트어 계열의 힌디어만을 힌디어로 규정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이후 변형된 형태의 힌디어까지 포함하여 말하기도 한다. 1998년 센서스에 따르면 약 48개의 언어가 힌디어라는 개념에 포함된다. 개념이 다양하기 때문에 힌디어를 단일 언어로 보기에도 어렵고, '인도는 힌디어를 사용하는 나라'라고 표현하기도 구조적인 어려움이 있다. 다만 방송, 영화 등에서는 힌디어를 주로 사용하기 때문에 이러한 영역을 바탕으로 힌디어 패권이 강화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표준 힌디어가 형성되는 중이라고 할 수 있다. 

 

 

방글라데시와 세포이 항쟁

 

방글라데시는 벵골만에 자리하고 있다. 98%의 인구가 벵갈어를 쓴다. 때문에 공영어로 벵갈리(벵갈어)로 쓰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방글라데시라는 국호 자체가 벵갈의 땅(방글라 - 벵골 + 데시 - 산스크리트어로 '땅')이라는 뜻이다.

 

본래 벵갈의 범위는 지금과 조금 다르다. 과거에는 웨스트 벵갈이라 불렸던 지역이 현재는 인도에 편입되었고, 이스트 벵갈이 방글라데시가 되었다. 인도 전체에 비해 면적은 크지 않지만 인도 역사에서는 벵갈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497년, 바스쿠 다 가마는 희망봉을 돌아 인도 서쪽에 도착했다. 유럽이 최초로 인도 직항로를 개척한 사건이다. 그러나 영국이 인도를 침략할 때는 동쪽을 벵골을 통해 들어왔다. 1767년이었다. 이후 벵골은 영국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좋게 말하자면 인도에서 가장 빨리 근대화가 된 지역이자, 나쁘게 말하면 식민지배의 앞잡이 노릇을 한 지역으로 인식된다. 

 

1905년 영국은 벵골 분할령을 발표한다. 영국 입장에서는 무슬림 인구가 많은 동쪽과 힌두 인구가 많은 서쪽을 분리하고자 했다. 그러나 서쪽의 힌두 상인들이 극렬히 반대했다. 벵골 전체의 상권을 장악한 이들 입장에서는 시장의 절반이 사라지는 것을 좌시할 수 없었다. 이런 과정에서 과거에는 영국의 어용단체에 불과했던 인도국민회의(INC, 간디, 네루 등이 속함)가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단체로 급부상한다. 

 

1857년 세포이 항쟁이 일어나고, 1858년 반란을 진압한 영국은 인도동인도회사를 해체시키고 직접 통치에 들어간다. 이후 인도 통치법이 같은 해 영국 의회를 통과하고 영국은 2가지 대원칙을 발표한다. 첫째, 힌두와 무슬림 종교 문제에 개입하지 않는다. 둘째, 시장경제가 기존 사회질서를 해칠 위험이 있으므로 기존의 계급질서를 유지한다. 

 

* 세포이는 본래 무굴제국의 군인을 뜻하는 말로 주로 장총으로 무장한 보병을 부르는 말이었다. 페르시아어 세파히(Sepahi)에서 유래했다. 초기에는 프랑스 동인도 회사가 현지 용병으로 채용하기 시작했고, 후에는 영국이 이들을 용병으로 대거 채용했다. 세포이 항쟁 당시에는 벵골 지역에 강렬히 일어났으나 벵골 지역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 종교에 대한 불개입 원칙은 인도식 세속주의(Indian Secularism)로 이어진다. 인도식 세속주의는 모든 종교에 대한 동등한 존중(Equal respect for all religions)으로 표현된다. 이 때문에 인도는 현재에도 종교에 따라 민법이 적용되는 법전이 다르다. 형법의 경우 모든 종교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세포이 항쟁을 진압한 이후 영국은 벵골에 대한 철저한 응징에 들어간다. 먼저 1912년, 수도를 콜카타(캘커타)에서 델리로 옮겨 버린다. 그리고 인도 서쪽의 뭄바이를 경제 중심지로 만든다. 델리는 수도 이전을 위한 계획도시로 조성되었다. (Edwin Lutyens와 Herbert Baker가 델리 도시계획의 밑그림을 그린다.) 경제 중심지도 인도 서쪽의 뭄바이로 옮긴다. 이후 벵골 지역은 초라한 낙후 지역으로 전락한다.

 

* 뭄바이는 본래 125년 동안 포르투갈이 통치하는 땅이었다. 이후 포르투갈의 공주 캐서린 브라 간자가 1662년에 영국의 왕 찰스 2세와 결혼하면서, 뭄바이는 결혼 지참금으로 영국에 넘어간다. 

 

세포이 항쟁 이전에는 용병의 대부분이 벵골 출신이었으나 벵골 보병으로 구성된 74개 부대 중 12개만 존속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펀자브 출신 부대로 교체해버린다. 펀자브 외에는 시크(Sikh), 구르카 출신이 martial race(무골 종족)로 인정되어 채용된다. 이어 영국은 모든 카스트를 무골 종족과 비무골 종족으로 구분하였으며, 무골 종족은 용맹하다는 인식을 만들어 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이 명분을 바탕으로 용병 채용에서 차별이 발생했다. 이후 벵골인들은 허약하고 겁이 많으며 군인으로서 적합하지 못하다는 담론이 만들어진다. 

 

* 시크교도들은 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군 용병으로도 참전하였으며, 용맹함으로 명성을 떨쳤다. singh(a)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도인들은 대부분 시크교도들이다. 싱(하)이라는 말 자체가 사자를 뜻하는 말로 그들이 용맹함을 상징한다. 시크교는 힌두교와 이슬람이 결합된 형태의 종교인데, 이들은 양쪽에서 오랜 세월 탄압을 받았기에 무장투쟁의 역사를 갖고 있다. 

 

* 1984년 인디라 간디를 암살한 경호원 2명 역시 시크교도들이었다. 이들은 인디라 간디가 시크교 사원에서 일어난 시크교 독립운동을 강경 진압한 것에 앙심을 품어 암살을 저질렀다.

 

1984년 6월, 인디라 간디는 군대를 투입하여 시크교 성지인 황금사원을 점령한다. 

 

* 인디라 간디는 초대 총리 네루의 딸이며, 남편의 성이 우연히 간디일 뿐 마하트마 간디와는 상관이 없다. 1975년 부정선거에서 유죄를 받아 정치적 위기에 처했을 때 군부에 친위 쿠데타를 청탁한 것이 밝혀졌다. 

 

▷  인디라 간디는 1966년 총리로 취임했다. 1974년에는 핵실험에 성공했다. 암호명은 '미소 짓는 붓다'였다. 그러나 지속된 경제난과 부정부패로 전국적인 저항에 직면한다. 1975년에는 부정선고로 인하여 고등법원에서 의원직과 6년간의 피선거권을 박탈당한다. 이후 인디라 간디는 인도 헌정사상 처음으로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계엄령에 가까운 강압통치로 반대파를 탄압했다. 빈민가를 강제 철거하고 산아 제한을 명분으로 빈민 남성들에게 불임수술을 강요하기도 했다. 

 

이후 인디라 간디는 종교분쟁에 개입하여 시크교도들을 분열시키기 위해 힌두교 근본주의 세력을 지원하다 시크교 무장반군의 공격을 받게 된다. 인디라 간디는 반군의 근거지인 황금사원에 탱크를 비롯한 중화기를 투입하여 이들을 진압한다. 약 4개월 뒤인 1984년 10월 31일 인디라 간디는 시크교도 경호원들에게 피격된다. (추가 끝)

 

 

 

지역 패권국 인도와 인도군

 

인도가 생각하는 그들의 지위는 지역 패권국이다. 미래의 강대국이 아니라 이미 패권국으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다. 인도는 과거부터 비동맹 노선, 비폭력 노선을 국제적으로 천명해왔으나 이는 지역패권을 주장하는 외교적 수사에 불과하다. 약소국이 비동맹, 비폭력을 주장해봤자 무시받을 뿐이다. 그러나 인도는 그들의 입장을 국제사회에 관철시켜 왔다. 냉전시대에도 미국과 소련이 인도의 패권 지역 내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강력한 메시지를 던져왔다. 

 

인도군은 징병제가 실시된 적이 없고 철저한 모병제 전통이 유지되고 있다. 이 때문에 군 입대가 취업에 가까운 취급을 받기도 한다. 과거 영국은 인도에서 용병을 운영할 때 그들이 배신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배신을 염두에 두고 온순한 군대를 키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시 북쪽에서는 러시아가 남하하고 있고, 영국이 미얀마를 점령할 때에도 많은 전쟁을 치렀기 때문이다. 영국은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소수 집단에서만 모병을 실시하고, 사회 전반과 이들이 일정한 거리를 두는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세포이 항쟁 이후에는 북서부 변경주에서 펀자브족과 파슈툰족 위주로 모병을 한 것이 바로 이러한 까닭이다. 영국은 이들을 무골 종족으로 지정하였고, 이러한 무골 종족 리스트는 취업을 위한 화이트 리스트로 활용되었다. 독립 후인 1949년 이 리스트가 폐지된다. 

 

펀자브족들이 군인으로 대거 활동하긴 하였지만 이들이 무슬림 부대라는 개념으로 편성된 적은 없었다. 그러나 파키스탄 이후에 과거 영국 용병 출신의 펀자브족 군인들 중 파키스탄으로 국적을 바꾼 이들이 생겨난다. 이들은 부대 단위가 아니라 개인 단위로 개인의 종교적 확신에 의거하여 파키스탄 군으로 합류하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이들이 주축이 된 파키스탄군은 자연스럽게 정서적, 정치적 동질성이 강화된다. 신념을 공유한 이들이 군을 조직하게 된 것이다. 

 

영국 통치의 영향으로 인도와 파키스탄에서는 군인이 특수직으로 인정받고, 전문가 집단이라는 인식이 있다. 특히 장교 중심의 엘리트 집단이라는 이미지가 있고, 군은 당연히 문민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통념이 있다. 

 

독립 이후 민족주의 세력인 인도 국민회의(INC)는 군에 개혁을 요구한다. 이미 독립 전인 1920년대부터 세금 납부 비율과는 동떨어진 모병 비율을 비판했다. 무골 종족 리스트에 따른 취업 차별 폐지를 요구한 것이다. 1930년대에는 이런 불평등에 대한 비판이 더욱 거세졌고, 특히 인도 국민회의의 지도층은 펀자브 지역의 이기주의에 대한 경계심이 커졌다. 독립 이후에도 인도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세력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무슬림들은 무골 종족에 대한 혜택에 큰 반대가 없었다. 펀자브 출신이 군에 많을수록 무슬림에게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46년, 네루는 군 총사령관 겸 국방장관에게 인도군에 대한 총체적 배경 전환(Transform the whole background of the Indain Army)을 요구한다. 독립 당시 장교와 사병의 3/4이 무골 종족 출신이며 최고위 장교의 절반이 당시 인구의 5%에 불과한 펀자브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네루를 비롯한 인도 지도층은 일체감과 동질감이 강한 군대일수록 정치에 개입할 확률이 높다고 판단했다.

 

인도 집권층의 노력으로 1939년에는 60%에 달하던 펀자브 출신이 1948년에는 32%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펀자브 출신은 1970년대까지 사령관으로 임명하지 않는 불문율도 존재했다. 현재는 단일 주 출신이 인도 군 전체의 13% 이상을 차지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한 장교 봉급을 하향 조정하여 중산층 출신의 비중을 확대했고, 군 고위 장교의 공식 연설과 정치활동금을 금지하였으며 3군을 통합 지휘하던 총사령관직을 폐지했다.

 

* 1999년 파키스탄과의 카길 전투 이후 3군을 통합 지휘하는 총사령관(Cheif of Defence Staff)에 대한 부활 논의가 있었으며 2019년 모디 정부가 총사령관직을 부화시켰다.

 

3군 사령관은 별도로 임명하며 사관학교는 출신지역에서 먼 곳으로 배정한다. 영향력이 강한 장교는 외교관으로 채용하여 먼 타국으로 파견 보내는 불문율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군내 파벌을 예방, 감시하는 기능을 강화하였다. 또한 군을 견제하기 위해 준 군사조직을 별도로 편성하여 델리 지역에 배치했다. 과거 영국군이 구르카 용병을 활용한 방식과 동일하다. 내무부 관할의 중앙무장경찰은 총 7개의 준 군사조직을 지휘하며 이 중 하나인 국경수비대는 총 25만 7천 명 명의 병력을 갖고 있다. 인도에 군사 쿠데타가 없었던 이유는 독립 이후 민주주의 체제가 전복되는 것을 막기 위한 의도적 노력이 이루어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인도 엘리트 계층은 과거 세포이 항쟁을 문민통치가 작동하지 않은 사례로 인식하고 있으며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군에 대한 다양한 견제책을 마련했다. 

 

 

현대 전장과 낙후된 인도군

 

현대에 와서 인도군의 역할은 전투가 아닌 일자리 창출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실제로 1962년 인도-중국 전쟁 당시 인도는 제대로 된 저항을 하지 못했다. 미국의 개입을 우려한 중국군이 자발적으로 철군했기 때문에 전후 처리 역시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했다. 이 문제는 지금까지도 인도-중국 간 분쟁의 원인이 되고 있다.

 

거기다 정치인과 관료 중심의 의사결정구조와 만연한 부정부패로 인하여 군의 현대화 사업은 거의 이루어진 것이 없다. 2019년 인도는 공군을 투입하여 파키스탄 지역을 폭격했다. 파키스탄 내 테러리스트를 사살한다는 명분이었다. 인도는 1976년 개발된 미그기를 활용해 파키스탄의 F16을 격추했다고 발표했으나 실제로는 미그기가 파키스탄 영토 내에 추락하였으며, 파일럿은 민간인들에게 생포되어 린치를 당했다. 결국 파키스탄군이 파일럿은 민간인들로부터 인계받아 다시 인도로 돌려보낸 일이 있었다. 

 

(좌) 파키스탄에서 생포된 인도 파일럿 (우) 아리한트 급 잠수함

인도 해군에서는 첫 국산 핵잠수함인 아리한트급 잠수함이 잠행 중 해치를 닫지 않아 침수로 인해 10개월간 작동 불능에 빠진 일도 있었다. (2018년)

 

인도는 최근 자유주의와 세속주의 국가에서 힌두교 중심의 국가로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인도군은 효율성과 민주적 원칙을 유지하며 현대화를 이뤄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비효율과 민주주의가 공존하는 나라, 인도

 

인도는 1947년부터 1990년까지 Licence Raj 혹은 The Permit Raj로 대변되는 부패와 비효율이 만연했다. 모든 산업은 정부의 허가가 필요했고, 허가 후에도 생산량은 시장이 아닌 정부가 결정했다. 네루가 생각한 Mixed Economy는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두 가지 이념의 결합은 좋은 것들의 결합이 아닌 나쁜 것들의 결합을 낳고 말았다.

 

그렇다면 인도는 이러한 빈곤과 극단적인 비효율 속에서 어떻게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이것은 바로 하부 단위의 정치적 협상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는 카스트의 정치화, 소선거구제, 의원내각제가 맞물리면서 가능했다. 소선거구의 채택으로 인하여 지역 내의 소수 그룹도 캐스팅 보트의 역할을 할 수 있었고, 이러한 작은 돌들이 움직이면서 인도 전체의 상부구조를 지탱할 수 있었다.

 

▷ 소선거구제는 한 선거구에서 한 명의 대표자만 선출한다.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후보는 모두 낙선하는 구조다. 인도에서는 소선거구제와 연방제도가 결합되면서 카스트 집단이 각 주의 정치권력에 미치는 영향이 극대화되었다. 따라서 소수자 집단과의 연정이 구체적으로 필요한 맥락이 만들어졌다. (추가 끝)

 

 

https://varsika.tistory.com/396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세 개의 인도와 군사 쿠테타가 없었던 사연(서울대 강성용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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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varsika.tistory.com/395

 

[삼프로TV] 인도는 어쩌다 가난해졌는가(서울대 강성용 교수)

* 본 포스팅은 삼프로TV 신과 함께 210화(본문하단 링크)를 참고하였습니다. * 본문 전개는 방송을 따르되 일부 내용은 이해하기 쉽게 순서를 조정하였습니다. * 본문 내용 중 '▷' 표시는 방송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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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한방] 핵보유국 파키스탄 총리가 쫓겨난 이유 (강성용 교수)

* 본 포스팅은 박종훈의 경제한방(본문하단 링크)을 참고하였습니다. * 본문 전개는 방송을 따르되 일부 내용은 이해하기 쉽게 순서를 조정하였습니다. * 본문 내용 중 '▷' 표시는 방송 내용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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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프로TV] 인도는 뭘 믿고 미국에 맞서나? f.강성용 교수

* 본 포스팅은 삼프로TV 방송(본문하단 링크)을 참고하였습니다. * 본문 전개는 방송을 따르되 일부 내용은 이해하기 쉽게 순서를 조정하였습니다. * 본문 내용 중 '▷' 표시는 방송 내용 외 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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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varsika.tistory.com/388

 

[삼프로TV] 스리랑카를 사이에 둔 미중전쟁의 배경(인도, 강성용 서울대 교수)

* 본 포스팅은 삼프로TV 방송 신과 함께 203화 1부(본문하단 링크)를 참고하였습니다. * 본문 전개는 방송을 따르되 일부 내용은 이해하기 쉽게 순서를 조정하였습니다. * 본문 내용 중 '▷' 표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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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EbengnzP9_s&t=182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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