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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여행] 가토 기요마사의 울산 서생포 왜성을 가다

Varsika 2021. 6. 13.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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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8호

주소 :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711 일원

 

서생포왜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인 1593년 5월부터 7월까지 집중적으로 축조된 왜성으로, 일본식 평산(평지+산)성 구조를 띄고 있다. 성의 축조를 담당한 장수는 일본군 제2군 선봉장인 가토 기요마사다. 이곳으로부터 북서쪽으로 800m 떨어진 곳에 서생포 만호진성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개전 직후 함락당했고, 가토 기요마사는 이곳의 석재를 옮겨와 서생포 왜성을 축조했다. 

 

 

회야강 강구의 포구와 산 정상을 끼고 내성을 쌓고, 동쪽 경사면 아래로 이어지는 공간에 외성을 배치했다. 지금은 성 출입구 쪽이 평지로 매립되었지만 당시에는 동북쪽 성벽 바로 앞까지 회야강이 흘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성곽의 전체 면적은 국내 왜성 중 가장 거대한 46,000평(외각 호壕 포함)에 이르고, 호를 제외한 외각부 길이는 2.5km에 이른다. 남해안에 위치한 왜성 중 가장 큰 규모다. 해발 약 130m의 정상에는 5m 수준의 천수대가 남아 있다. 왜군은 철수할 때 왜성을 파괴하고 철수했기 때문에 당시 모습이 그대로 보존된 경우가 드물다. 서생포 왜성은 가장 본모습이 잘 유지되어 있는 왜성으로 평가받고 있다.  

 

1594년 4월부터 사명대사가 4차례에 걸쳐 가토 기요마사와 강화교섭을 하였는데 그 장소가 바로 이곳 서생포 왜성이다. (회담의 내용은 <송운대사분충서난록>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송운'은 유정(사명대사)의 또 다른 법호이다.) 울산왜성(학성왜성)이 축조되기 전까지는 남해안의 왜성 중 가장 동북쪽에 위치하여 전략적 요충지로 기능하였으며, 서생포 - 기장 - 부산 - 김해 - 거제 - 경남지역으로 이어지는 왜성 라인(line)의 중추를 담당했다.

 

1598년 이곳에 주둔하던 가토 기요마사가 전라도 방면으로 출병한 이후에는 아사노 요시나가(淺野慶長)가 3천의 군사를 데리고 와서 주둔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충청도에서 철군한 가토가 다시 서생포로 돌아와 주둔하였다. 가토가 울산왜성(학성왜성)으로 위치를 옮긴 이후에는 일본군 제3군 대장 구로다 나가마사가 주둔하였다. 이후 11월 왜군이 철군하기 시작하자 1598년 명나라 장수 마귀가 서생포 왜성을 접수했다. 1599년에 전사한 충신 53명을 기리는 창표당(蒼表堂)을 세웠으나 지금은 파괴되어 터만 남아 있다. 왜란이 종전된 이후부터 1895년까지 조선 수군 경상좌수영 소속의 동첨절제사영(同僉節制使營)으로 사용되었다. 

 

인근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으며 내성 출입구 쪽에 화장실이 마련되어 있다. 화장실을 지나 길을 따라 내성으로 접근할 수 있는데 내성으로 가는 길이 지그재그식 통로로 되어 있으며, 내성에 들어간 후에는 되형 출입구, 돌출형 소곽, 엇물림형 출입구, 굴절성벽 등을 볼 수 있어 경사가 가파른 곳임에도 불구하고 방어에 빈틈이 없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왜성 정상에 올라서면 진하해수욕장과 해변 인근의 마을이 한눈에 들어와 왜 이곳에 왜성을 축조했는지 바로 알 수 있다. 벚나무가 많아 봄에는 울산시민들의 벚꽃놀이 장소로 유명하다고 한다. 인근에는 진하해수욕장과 더불어 간절곶, 외고산 옹기마을 등의 관광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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