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정보

[역사여행] 이순신의 마지막 발걸음, 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

Varsika 2021. 6. 16. 23:13
728x90
반응형

고금도에 위치한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은 과거 '충무사'라는 이름으로 이순신 영정을 모시던 곳이며, 노량해전 이후 이순신의 유허를 88일간 가매장했던 장소로도 유명하다. 마지막 삼도수군통제영인 고금도 통제영 터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과거 묘당도는 고금도에 딸린 섬이었으나, 간척을 통해 지금은 고금도와 하나의 땅으로 붙어있다. 고금도가 행정상 완도에 속하기 때문에 유적지의 명칭도 '고금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이 아니라 '완도'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으로 명명되었다. 

이충무공 유적 위치 (* 삼도수군통제영은 한산도 → 정유재란 이후 소실   → 명량해전   → 목포 고금도에 재건   → 고금도로 이전하였다.)

 

1598년, 정유재란 원군으로 조선에 도착한 명나라 수군제독 진린이 이순신과 함께 고금도에 주둔하기 시작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순신은 1598년 2월 17일 약 8천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고하도에서 고금도로 진을 옮겼고, 진린 역시 이를 따라 7월 16일 5천여 명의 수군을 이끌고 고금도에 상륙했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공이 고금도에 이르렀을 때는 군의 위세도 장했거니와 섬 안의 민간인도 수만 호에 달해 한산도 시절의 10배나 되었다.]라고 기록했다. 

 

진린은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중국 장수 관우를 묘시는 관왕묘를 이곳에 세웠는데 이것이 이충무공 유적의 첫 모습이다. 현종 7년인 1666년 동무를 지어 진린과 이순신을 배향하였고 인근 옥천사의 승려를 시켜 수호하게 하였다. 정조 5년 1781년에는 정조가 직접 '탄보묘(誕報廟)'라는 편액을 하사하기도 했다. (사액묘우). '탄보'는 관우의 탄신을 기리며, 그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을 담았다는 뜻이다. 일제강점기에는 관우 상과 위패 등 유물이 훼손되고 제향이 중단되었다. 광복 후 1953년 명칭을 '충무사'로 개칭하고 이순신의 영정을 모셨다. 1959년 가리포진(완도에 위치) 첨사였던 이영남을 추배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충무사 바로 맞은 편에는 월송대(月松臺)가 있는데 이곳이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이순신의 유해가 88일간 임시로 안장되었던 장소이다. 이후 1599년 2월 11일 정식으로 발인하여 충남 아산으로 묘역을 옮겼다. 현재에도 이 터에는 풀이 자라지 않는다. 

묘당도 이충무공 유적지와 고금도 삼도수군통제영 위치(현재 고금도 덕동리 일대)

한편, 완도군에서는 국비를 지원받아 2023년까지 덕동리 일대에 고금도 삼도수군 통제영을 복원한다고 한다. 완도 청해진, 가리포진, 묘당도, 삼도수군통제영 등 유적지를 정비해 테마여행 코스로 개발한다는 방침이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