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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 한국사] 회담 총정리 - 카이로 회담부터 모스크바 3상회의까지

Varsika 2021. 6. 18.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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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이로 회담 - 한국의 독립을 최초로 언급

 

장소 : 이집트 카이로

일시 : 1943년 11월 22일 ~ 11월 26일

참여 : 미국(프랭클린 루스벨트), 영국(처칠), 중화민국(장제스)

 

배경 :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이 일본을 격퇴했다. 이듬해인 1943년 2월에는 소련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을 격퇴했다. 연합군은 기세를 몰아 1943년 5월 아프리카 전선에서 독일 + 이탈리아군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결국 43년 9월 이탈리아는 항복한다. 따라서 카이로 회담이 열리던 1943년 11월에는 이미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귀결되고 있던 상태였다. 이로 인하여 전쟁 이후의 세계 질서를 논의할 필요가 생겼고, 연합군 측은 카이로 회담을 개최한다.

 

미국은 소련의 스탈린도 참여하길 희망하였으나, 스탈린은 장제스와의 회담을 원치 않았다. 중화민국을 4강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또 스탈린은 장소를 이란의 테헤란으로 변경할 것을 고집하였고(안전문제) 결국 카이로 회담은 미영중 3국만 참여하게 된다.

 

의의 : 장제스가 미국과 영국에게 아시아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였다. 또한 한국의 독립이 다음과 같이 최초로 언급되었다. "상기 3대 강국은 한국 인민의 노예상태를 유념해 적절한 시기에 한국이 자유와 독립 상태가 될 것을 결의한다." 

 

 

2. 테헤란 회담 - 소련이 미군의 유럽 상륙을 제안함

장소 : 이란 테헤란

일시 : 1943년 11월 28일 ~ 12월 1일

참여국 : 미국, 영국, 소련(스탈린)

 

배경 : 카이로 회담과 같음. 스탈린이 카이로 회담에 불참하였기에 스탈린이 원하던 테헤란에서 별도의 회담 개최. 

의의 : 당시 유럽전선은 영국과 소련만이 독일과 싸우고 있었고, 특히 육군은 동부전선이 소련이 전담하고 있었음. 스탈린은 미군에게 북프랑스 상륙을 건의하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져서 미 육군이 유럽 전선에 투입됨.(노르망디 상륙작전)

 

기타 : 한국과 관련된 언급은 거의 없었으며, 미국이 한국의 신탁통치를 언급하고 소련이 동의한 수준.

 

 

3. 얄타 회담 - 미국이 소련의 대일전쟁 참전을 제안함

장소 : 소련 얄타(휴양 도시)

일시 : 1945년 2월 4일 ~ 2월 11일

참여 : 미국, 영국, 소련

 

배경 : 유럽 전선은 다실상 독일의 패망으로 귀결됨. (5월 8일 최종 항복) 젆 유럽 및 독일의 영토문제에 대해서 논의함. 미국은 소련의 대일 전쟁 참여를 요청(당시 소련과 일본은 불가침 협정을 맺은 상태였음)

 

의의 : 이 시기부터 영국은 더 이상 강대국의 지위가 아니었고, 사실상 미-소 간의 양자토론으로 많은 합의가 결정됨. 스탈린이 이번에도 자신에게 가까운 회의장소를 고집하여 얄타로 장소가 정해졌으며, 소련은 회의장소에 도청기를 설치하여 미-영의 협상 내용을 파악해 유럽 내 많은 이권을 챙김). 건강이 안 좋았던 루스벨트는 무리하여 회담에 참석하였다가 2개월 뒤 사망함. 

 

소련은 대일 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고, 이에 따라 식민지이던 한국은 38선을 경계로 분할 점령하기로 합의함. 테헤란에서 제안되었던 한국 신탁통치(수습기간 40년)가 재확인됨. 

 

 

4. 포츠담 회담 - 일본의 무조건 항복 요구

장소 : 독일 포츠담(베를린 근교)

일시 : 1945년 7월 17일 ~ 8월 2일

참여 : 미국(해리 트루먼), 영국(처칠 → 클레멘트 애틀리), 소련(스탈린)

 

배경 : 독일은 이미 패망한 상태. 전후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점령지 분할 문제를 토론함. 장제스는 중일전쟁 수행 중이라 불참함. 처칠이 처음에 영국 대표로 참여하였으나 정권교체로 인하여 애틀리로 교체됨.

 

의의 :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 

 

 

5. 모스크바 3상 회의 - 한반도 신탁통치

장소 : 소련 모스크바

일시 : 1945년 12월 16일 ~ 12월 26일

참여 : 미국, 영국, 소련 - 국가원수가 아니라 외무장관(외무상)들의 회의. 그래서 3相회의

 

배경 : 일본의 항복 후, 점령지의 관리 및 한국의 신탁통치에 대해 의논

의의 : 미국이 한국에서 최소 5년, 최장 10년의 신탁통치를 제안. 소련은 해당 안에 동의 및 미소 공동위원회 개최를 제안.

결국 다음과 같은 사항이 최종 합의됨.

(1) 한반도에 단일 민주정부를 수립한다.

(2) 이를 돕기 위해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립하여 민주정부 수립을 지원한다.

(3) 미영중소 4개국이 참여한 신탁통치를 5년간 실시한다.

 

그러나 국내에 이를 보도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소련이 한반도 신탁통치를 시도하고 있고, 미국이 저지 중이다."라고 잘못 보도하게 됨. 

 

(찬탁) "한반도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신탁통치를 받아들일 수 있다."

-. 좌우 합작론자 : 김규식, 여운형

-. 좌익 공산진영 : 박헌영

 

(반탁) "즉각 완전한 독립을 원한다."

-. 민족주의 세력 : 김구 "외세 개입 절대 반대"

-. 우익 반공 진영 : 이승만 "소련은 신탁을 통해 결국 공산화를 노릴 것이다."

 

결국 국내 지도층이 분열되고 극심한 혼란이 전개됨. 미소 공동위원회는 결렬되고 좌우합작 운동은 실패. 한반도의 분단이 진행됨.

 

여운형 : 1947년 7월 19일, 서울시 종로구 혜화동에서 암살당함.

김구 : 1949년 6월 26일, 서울 서대문구 평동 경교장에서 육군 중위 안두희의 저격으로 서거.

김규식 : 한국전쟁 중 납북되어 1950년 12월 10일, 평안북도 만포진 부근 군 병원에서 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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