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과 일상/역사

[충북 보은] 신라의 꿈, 난공불락의 삼년산성 (1부)

Varsika 2021. 7. 28.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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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록 속의 삼년산성

충북 보은에 위치한 삼년산성은 5세기 후반(470년) 신라가 쌓은 석축식 산성으로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 성을 쌓는데 3년이 걸렸기에 삼년산성으로 명명했다고 전해진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오향산성으로 기억되어 있고, 다른 역사서에는 산의 이름을 딴 오정산성으로 전해진다. 삼년산성은 삼국사기에 유일하게 축성시기와 과정이 기록된 산성이다. 이를 통해 삼년산성이 지닌 역사적 가치와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5세기 초까지만해도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발전이 늦었다. 광개토대왕 시기 고구려 원군의 도움을 받은 이래로 신라 영토에 고구려군이 주둔하고, 고구려 장수가 신라의 벼슬을 받을 정도로 종속된 관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후 신라는 김씨 세습 안정화 등을 통해 자주국가로 발돋움하기 시작하였으며, 남하정책을 펼치던 장수왕에 대응하여 백제와 나제동맹을 체결(433년), 북진정책을 추진하게 된다. 삼년산성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따라 당시 신라의 최전방인 충북 보은에 축조된다. 

5세기 당시 삼국 + 가야의 대략적인 국경선 (9번은 후기 가야연맹의 주도세력인 대가야, 지금의 고령)

삼국사기에 따르면 삼년산성은 470년 완공되었고, 486년(소지 마립간 8년)에 일선(一善)의 장정 3천명을 동원해 굴산성(충북 옥천 이성산성으로 추측)과 더불어 개축했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일선이란 지금의 경북 선산(구미)을 지칭한다. 당시 전쟁도 아닌 축성에 3천 명을 동원했다는 것은 삼년산성이 국가단위의 큰 프로젝트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당시 축성 책임자로 임명된 자는 이찬(伊飡) 실죽(實竹) 장군으로 이찬은 신라 경위 17 관등 중 제2 관등에 속하는 고위직이다. 지금으로 따지면 제1급 관청의 장관직에 비유할 수 있다. 축성지 인근(충북 보은)이 아닌 60km나 떨어진 경북 지역에서 장정을 징발했다는 사실은 축성 시기만 해도 신라의 행정력이 해당 지역에 미치지 못하였음을 뜻한다. 

 

 

- 삼년산성의 군사적 중요성

그러나 삼년산성 축조 이후에 인근 세력들을 통합해나감에 따라 충북 일대의 행정력까지 장악하게 된다. 완전한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것이다. 또한 군사적으로는 고구려의 남방 교두보인 중원(지금의 충주)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게 된다. 실제로 삼년산성 축조 이전 신라-고구려 간 국경 충돌은 주로 동해안 일대에서 이루어졌는데, 삼년산성의 등장 이후 중원으로 그 무대가 옮겨가게 된다. 신라의 입장에서는 도읍 서라벌에 대한 위험부담을 덜어낸 것이다. 삼년산성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하여 방어뿐만 아니라 북쪽으로는 중원과 한강 유역, 서쪽으로는 백제의 웅진, 사비에 대한 견제/진출도 용이해졌다. 단순한 방어적 기능을 넘어 외교, 군사적 거점으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삼년산성을 신라 삼국통일의 전초기지로 해석하는 의견이 많다. 

 

5세기 이후 신라의 전성기를 맞은 6세기에는 삼년산성의 역할이 더욱 빛을 발한다. 나제동맹을 바탕으로 고구려를 한강유역 이북으로 쫓아내기(551년)까지 삼년산성은 신라 북진의 교두보로 역할을 했으며,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553년)함에 따라 나제동맹이 파기된 이후에는 對백제 전쟁의 최전선으로 활약한다. 신라는 이 시기에 북방으로는 강원도 화천, 양구 지역까지 점령한 것으로 추정되며 한강 유역을 차지한 이후에는 신주(新州)를 설치했다. 신주의 군주로는 당시 아찬(제6 관등)이던 김무력을 임명한다. 김무력은 김유신의 조부이다. 

 

 

- 관산성 전투와 삼년산군의 대활약

한강 유역을 신라에 빼앗긴 백제는 혼인동맹으로 신라를 안심시키는 한편 복수전을 준비하였다. 한강 유역 철수 1년 후인 554년, 백제는 가야, 왜 등과 총 5만 병력의 연합군을 결성하여 삼년산성 남쪽 25km 떨어진 관산성을 공격한다. 관산성은 현재 충북 옥천 월전리 일대로 추정되면 대전과 옥천 사이의 길목에 위치해있다. 지금도 경부고속도로, 경부선 철도가 모두 이곳을 통과한다. 만약 관산성 인근 지역을 점령한다면 백제는 지금의 옥천 - 김천 - 성주 - 대구를 거쳐 빠르게 신라의 수도 서라벌(경주)을 공격할 수 있게 된다. 해당 지역은 후기 가야연맹의 중심지인 대가야(고령)와도 가깝다.

 

또 한 가지 백제가 고려했던 점은 신라의 주력군이 한강 하류에 여전히 주둔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제동맹 말기 삼년산성 인근에 주둔했던 신라의 주력군은 한강 유역을 점령한 후 여전히 그곳에 주둔 중이었다. 따라서 관산성 공략시 빠르게 지원병력을 보낼 수 없을뿐더러, 지원병력을 보낼 경우 고구려가 다시 남하할 우려가 있으므로 아주 제한적인 병력만 동원할 것으로 백제는 판단했다. 그러나 역사는 백제의 편이 아니었다. 

전투 초기 백제군은 관산성을 불태우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인근 지역을 모두 점령하기도 전에 북방의 김무력은 병력을 대거 거느리고 남하한다. 당시 당나라와 돌궐로 골치를 아프던 고구려와 불가침 밀약을 맺고 신주의 주력부대를 모두 데려온 것이다. 이를 알지 못했던 백제군은 초창기 승리에 도취해 제대로 된 방어태세를 갖추지 못했고, 승리에 도취한 성왕이 50기의 호위병만 데리고 관산성으로 이동 중 살해당한다. 백제 성왕을 참수한 인물은 김무력의 비장(부관)이자 삼년산군 출신이던 고간 도도(高干 都刀)였다. 성왕의 사망 이후 백제군은 기세가 꺾여 몰살당하고 연합군도 해체되고 만다. 가야는 관산성 전투 이후 신라의 공격을 받아 완전히 신라에 통합된다. 

 

이처럼 삼년산성과 삼년산군(軍)은 5세기와 6세기에 걸쳐 신라의 전쟁사에 중추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백제나 고구려는 왜 미리 삼년산성을 공략하지 않았을까. 비수와도 같이 국경을 찌르는 삼년산성을 신라가 강성해지기 이전에 미리 공략할 수는 없었을까. 삼년산성이 470년 완공된 이후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676년까지 200년간 신라의 군사적 요충지로 활약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2부에서 알아보자. 

 

 

- 삼년산성 위치와 보은 가볼만한 곳

보은에는 삼년산성 외에 법주사(유네스코 세계유산), 오장환 문학관 등의 관광지가 있다. 

<참고자료>

1. 국방TV 캐슬어택(임용한 박사) 삼년산성편(2019) 링크

2. KBS 역사스페셜 삼년산성편(2000)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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