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과 일상/역사

[충북 보은] 신라의 꿈, 난공불락의 삼년산성 (2부)

Varsika 2021. 7. 28.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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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년산성 위치, 보은 시내에서 1km 정도 떨어져있어 군사적, 행정적 기능을 모두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 난공불락의 삼년산성
삼년산성이 유명한 가장 큰 이유는 삼년산군이었던 고간 도도의 활약이나 인근에서 벌어진 수많은 전투 때문만이 아니다. 진정 삼년산성이 유명세를 탄 이유는 바로 200년이 넘는 세월동안 단 한번도 함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자는 150전 149승 1패라고도 말하는데 정확한 통계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기록에 따르면 통일신라 시기 김헌창의 난 당시 반란군이 삼년산성에서 농성을 벌이다 토벌된 적을 제외하고는 함락된 기록이 없다고 한다. 이는 내란 규모의 전투였으니 국가간 전투에서는 함락된 적이 없는 셈이다.

축성 이후 삼국통일이 이루어진 7세기 후반까지 200년 동안 신라의 성으로 남았다. 후삼국 시대에는 후백제 견훤의 세력권에 포함되었는데 왕건이 친히 공략하였으나 실패해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의 후삼국 통일 이후에는 국경의 요충지보다는 군창(軍倉)으로 역할이 바뀌었기 때문에 특별한 전투 기록은 찾기 어렵다. 삼년산성은 둘레 1,680m의 작다면 작은 산성이다. (성남의 남한산성은 외성까지 합치면 그 둘레가 8km가 넘는다.) 그러나 삼년산성은 200년의 혼란기를 꿋꿋이 버텼다. 백제 공벌 때는 남천정(경기도 이천)에서 출발한 김유신의 신라 본대가 삼년산성을 거쳐 탄현을 넘어 황산벌로 진격했다. 백제 멸망 이후에는 웅주도독으로 부임한 당나라 사신(왕문도)를 이곳에서 맞이했다. 삼년산성의 군세를 과시하고자 하는 태종 무열왕의 뜻이었다. 작은 군사기지가 마침내 승자의 성지(聖地)로 승격된 것이다.


- 철옹성의 비밀(서문)
삼년산성의 뛰어난 군사적 기능은 그 구조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삼년산성은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사각형 형태로 구축되었으며 성의 정문은 보은군으로 출입할 수 있는 서문이다. 서문을 포함하여 동서남북의 4문이 존재하는데 각각 방어에 유리하도록 구축되어있다. 서문부터 차례로 살펴보자.

삼년산성의 정문인 서문

정문인 서문으로 가는 길은 현재 포장도로가 구비되어 있다. 그러나 서문 성벽 앞으로 넓게 계곡(암반) 지형이 펼쳐져있어 포장도로임에도 조금 가파르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다. 서문에 도달하면 먼저 성벽의 웅장한 두께에 놀라게 되는데 약 8m ~10m에 달하는 폭의 성벽이 능선을 따라 좌우로 길게 뻗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하나하나 깎아 만들었다. 돌의 크기를 고려해 성벽을 쌓았기 때문에 그 견고함이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성에 비해 더 높다.

서문 앞에서 남측으로 바라본 전경

거기다 국내에 있는 다른 성의 경우 성벽만 돌로 쌓고 성벽 내부는 흙으로 채우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삼년산성은 성벽의 외부, 내부를 모두 돌로 쌓아 일부가 파손되더라도 성벽 전체가 무너지는 것을 방지한다. 이를 내외협축(內外協築) 방식이라고 한다. 2000년 KBS 역사스페셜팀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삼년산성을 쌓는데 돌 1천만 개, 8톤 트럭으로 2만 5천대분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당시 빈약했던 신라의 국력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생사를 걸고' 축성한 것이다.

공격자 입장에서 난감한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었다. 우선 서문에 도달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은 포장도로가 일직선에 가깝게 뻗어있지만 과거에는 계곡의 숲을 지나 성벽에 붙어있는 작은 오솔길만이 산성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고 한다. (KBS 역사스페셜, 2020) 좁은 길을 제외하고는 모두 계곡(암반) 지형이라 급경사를 기어오르는 수 밖에 없었고 이는 엄청난 피해를 불러올 것이 불보듯 뻔했다. 심지어 성문 앞에는 방어를 위해 옹성이 존재했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좌) 성문이 안에서 밖으로 열리는 구조(뒤로 밀리지 않도록 기단석을 배치) (우) 자연 암반이 만든 2차 방어선

운 좋게 성문 앞에 도달해도 문제가 있었다. 우리나라의 성은 대부분 밖에서 안으로 열리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숭례문, 광화문을 생각해보시라) 그런데 삼년산성의 성문은 특이하게도 안에서 밖으로 열리는 구조로 되어있으며, 밖에서 성문을 안쪽 방향으로 밀었을 때 밀리지 않도록 성문 뒤에 기단석을 배치했다. 이는 충차와 같은 공성무기의 효과를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성문 자체가 출입보다 방어에 강조를 두고 있다.

다시 운 좋게 성문을 열었다하더라도 성문 바로 뒤에는 아미지라는 연못이 있어 빠질 위험이 있고, 좌측으로는 성벽 바로 뒤에 능선을 따라 자연 암반이 경계를 만들고 있다. 즉, 성문과 성벽을 넘어도 아미지와 자연 암반이 2차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서문을 공략하려면 1차적으로 좁은 오솔길과 계곡을 지나 성문에 도달해야하며, 두 번째로 옹성과 방어용 성문, 단단한 성벽을 넘고, 세번째로 성내 2차 방어선까지 뚫어야 성내로 진입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병력이 있다한들 결정하기 어려운 방식이다.


- 성문이 아닌 창문, 남문
두 번째로 살펴볼 남문은 서문에서 성벽따라 올라가면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서문에서 남문에 이르는 길은 오르막으로 이어져있는데 신기하게도 남문 위치는 다시 내리막으로 내려가지 않고 오르막의 남쪽 꼭대기에 위치해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남문 밖으로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남문 밖은 바로 5m 높이의 낭떨어지가 있다. 따라서 공격자 입장에서는 남문에 5m가 넘는 사다리를 걸고 올라와 문을 열어야 한다. 이쯤되면 성문이 아니라 창문에 가깝다. 참고로 조선시대 읍성의 성벽 높이가 평균 4m라고 한다.

남문지, 목책 너머에는 길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낭떠러지다. 대략 5m 이상의 높이다.

남문지에서 바라본 성밖의 모습. 길 없이 바로 낭떠러지로 이어진다.

그 밖에 삼년산성에는 동문과 북문이 있는데 실제 출입구로써 주된 기능을 한 것은 동문과 북문이라 한다. 그러나 동문 역시 현재 계단을 오르지 않으면 통과할 수 없는 경사지에 있다. 동문 옆 성벽의 높이는 최고 22m로 삼년산성의 성벽 중에서도 가장 높은 구간에 속한다. 북문 역시 산 중턱에 설치, 성문 밖에는 별도의 석축을 쌓아 방어를 견고히 했다고 한다. 이쯤되면 공격군이 전의를 상실하기에 충분하다.

거기다 성내에는 장기 농성에 대비해 성안에는 최소 6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하니 아무리 신라의 최전방이라 할지라도 중앙의 지원병력이 오기까지 충분히 수비할 수 있었을 것이다. 6세기 백제는 삼년산성에서 불과 4km 거리의 학림리 인근에 산성을 쌓고 주둔했다고 한다. 삼년산성 앞 풍취리에는 지금도 당시의 말무덤이 남아있을 정도로 백제와 신라간의 중원 쟁탈전은 치열했다. 삼년산성 남쪽 9km 거리의 삼승면 내망리(판동초교 인근)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을 나누는 경계석(선돌)을 설치하기도 했다. 이처럼 격렬한 시기였지만 삼년산성은 앞서 살펴본 유비무환의 태세로 200년을 넘게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서문과 남문 사이 성벽에서 바라본 보은 시내, 성내에서 보은이 한눈에 보여 군사적 요충지임을 직감할 수 있다.

남측 고지에서 바라본 서문 쪽 모습, 우측 하단에 아미지의 흔적과 중앙 부분에 자연 암반 2차 방어선이 보인다.

한편 삼년산성 인근 보은군 대야리에는 삼국시대 고분군이 약 1천기 가까이 분포해있다고 한다. 삼년산성이 축성되는 5세기에 함께 조성된 것으로 보이나 대부분 과거에 도굴당한 상태라고 한다. 보은군에서는 예산을 투입하여 2017년부터 동문지 ~ 고분군 구간의 산책길을 조성했다고 밝혔다. 이후에는 별다른 복원 및 활용 소식이 없으나 역사적 가치가 높은 곳이니 만큼, 지금보다 더 잘 가꾸어 보은군민, 나아가 전국민에게 사랑받는 유적지로 거듭나길 기대해본다.


- 삼년산성 위치와 보은 가볼만한 곳

보은에는 삼년산성 외에 법주사(유네스코 세계유산), 오장환 문학관 등의 관광지가 있다.

<참고자료>
1. 국방TV 캐슬어택(임용한 박사) 삼년산성편(2019) 링크
2. KBS 역사스페셜 삼년산성편(2000)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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