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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패권의 역사 - 스페인 (대구경북과학기술원 김대륜 교수)

Varsika 2022. 12. 14.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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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패권의 역사 - 스페인 (대구경북과학기술원 김대륜 교수)
 
1부 : 스페인은 왜 튼튼한 재정을 구축하지 못했나? 
 
스페인은 아메리카 제국에서 엄청난 재화를 얻었지만 부강해지지 못했다. 스페인 왕실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얻은 귀금속에 스페인 국왕 몫으로 '킨토 레알'이라는 세금을 부과하였으나, 대부분 전쟁이나 황제의 빚은 갚는데 사용되고 말았다. 
 
스페인 제국의 문제점은 중앙집권적인 재정 체제를 구축하지 못한 채 많은 전쟁을 치렀다는데 있었다.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의 경우 전쟁으로 영토를 넓히는 데는 성공했으나, 과거 이사벨과 페르난도 시대의 통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데 그쳤다. 영토는 확장되었그나 정복지의 제도와 체제를 그대로 방치함으로써 통합적인 국가 체제를 구축하는데는 실패했다.
 
이로인해 황제는 끊임없이 엘리트와 타협을 해야만 했다. 엘리트 대의 기관인 코르테스가 힘이 강한 지역에서는 황제라도 임의로 세금을 부과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한 부작용으로 엘리트의 힘이 약하고 황제의 권력이 강한 카스티야 지방에는 수탈이 집중된다. 카스티야는 스페인 전쟁 비용의 대부분을 부담하게 된다. 
 
거기다 당시에는 현재와 같은 국가관이 존재하지 않았다.  황제는 곧 국가였음으로 지역의 산물은 황제의 개인 재산처럼 취급됐다. 카를 5세는 한 지역에서 거둔 수입을 다른 지역에서 사용하는 것을 당연시했고, 이는 당연히 특정 지역의 반발로 이어졌다. 지역 엘리트들의 저항이 계속되었고 이는 훗날 네덜란드가 반란을 일으키는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당시 재정 수입은 정규 세금 40%, 특별 세금 20%, 부담금 20%, 아메리카에서 유입된 은 20%으로 구성되었다. 카스티야는 전통적인 농업지역이었으나 황제의 수탈로 인하여 1522년에서 1560년 사이 재정수입은 4배나 폭증하게 된다. 자연히 카스티야 백성의 경제상황은 궁핍해졌다. 당시 상업이 발달한 네덜란드 백성이 부담하던 세금의 3배 이상을 카스티야 백성이 부담했다.
 
카를 5세는 이러한 재정수입으로도 전쟁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카스티야 세금을 담보로 외국인 은행가들로부터 큰 돈을 대출받는다. 1521년 ~ 1555년 사이에 2,800만 두카트(현재 가치로 약 2억 8천만 달러) 를 대출했는데 60% 이상이 독일과 제노바 은행가들로부터 빌렸다. (스페인내 유대인들을 종교적 이유로 모두 쫓아냈기 때문에 스페인 국내에서 대출받을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당시 카스티야 재정 수입은 연평균 220만 두카트였다. 
 
뒤 이은 펠리페 2세는 이러한 문제를 안고 즉위하였으며 네덜란드, 잉글랜드와의 전쟁비용으로 인하여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1571년~1575년 플랑드르 지역에서 사용한 전쟁비용은 900만 두카트였는데, 이는 같은 시기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입된 귀금속 총액의 2배가 넘는 금액이었다. 세금인상을 통해서도 재정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고, 펠리페2세는 결국 42년간의 즉위기간 동안 4번의 지불정지를 선언한다. 그럼에도 전쟁을 그만두지 못해서 스페인은 이로 인해 쇠퇴하게 된다.
 
이처럼 자본주의 이전 패권국가의 한계는 통합적인 재정 체제 구축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또 지속적인 부가가치를 창출하지 못한 점도 원인이 되었다. 스페인 제국은 전통적인 농업사회에 머물면서 결국 패권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2부 : 스페인의 은이 세계 경제에 미친 영향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져온 은은 전쟁비용 및 귀족들의 사치로 인하여 유럽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결국 이 은은 무역을 통하여 아시아로 흘러들어가게 된다. 포르투갈, 스페인, 네덜란드, 잉글랜드 상인들은 향신료, 도자기, 실크 등의 사치품을 구매하며 은을 지불했다. 아시아로 흘러들어온 은은 최종적으로 중국으로 흘러들어 갔는데, 이때 중국은 '은의 무덤'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당시 중국을 통치하던 명나라는 유교 이상사회 건설을 목적으로한 나라였다. 화폐 경제를 억압하였고, 보초(불태환지폐)라는 화폐를 한정적으로 사용하였으나, 이마저 15세기초 가치가 하락하며 경제침체에 빠지게 된다. 16세기 초부터 상거래가 발전하기 시작하였으며, 면화, 실크, 도자기 등을 취급하는 전문 시장이 확대되었다.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은으로 세금에 납부하던 관행이 확장되었고, 결국 은괴가 상거래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하며 은 거래가 확대된다.
 
한편, 1530년대 일본 혼슈 서부 이와미 은광이 발견되어 은 채굴이 본격화된다. 당시 중국와 일본은 무역이 금지되었지만 이미 1540년대 중국 남동부 해안을 중심으로 막대한 양의 일본 은이 밀수입된다. 같은 시기 유럽 상인들도 중국과의 무역을 시작한다. 1571년 스페인이 필리핀 마닐라에 무역 거점을 세우면서 은의 대량 유입이 시작된다. 안데스 산맥에서 채굴된 은은 페루 해안으로 옮겨진뒤 멕시코 남서부의 아카풀코 항구를 거쳐 태평양을 건너 마닐라로 들어왔다. 
 
중국에서 은은 아주 매력적인 상품이었다. 중국은 16세기 말 일조편법을 제정하여 여러가지 노역을 은으로 대신 납부할 수 있게하였다. 일조편법은 중국 시장 경제의 확산을 상징하는 조치였다. 또 유럽보다 은과 금의 교환비가 좋았기에 같은 양의 은으로도 유럽보다 3배나 많은 금을 받을 수 있었다. 즉 16세기 초부터 중국 경기 부흥과 더불어 늘어난 은 수요를 아메리카와 일본에서 충족시켜 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유럽인들 또한 중국 상품을 구입해 유럽에 판매함으로써 큰 이윤을 얻을 수 있었다. 즉, 패권국가가 유지되려면 세계시장을 지배할 수 있는 상품과 금융 네트워크를 갖추어있어야 한다는 점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3부 : 중국은 왜 세계로 진출하지 않았을까?
 
1500년대 국내총생산 기준 5대 경제강국은 중국, 인도,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이다. 특히 중국과 인도는 나머지 3개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규모를 갖고 있었다. (3위 프랑스에 비해 각각 5배 이상의 규모)
 
명나라 3대 황제는 영락제는 자신의 위대함을 과시하기 위해 해양 원정을 추진했다. 1405년 환관에게 시켜 세상 끝까지 가서 조공을 받아오라는 명령을 내린다. 정화는 317척의 대선단을 꾸리고, 선박의 길이도 120m에 달해 한척에 선원 1천 명이 탑승할 수 있었다. 해군 28,000명과 천문학자 등 각계 전문가 180여명으로 이루어진 원정대는 인도, 페르시아, 아라비아, 아프리카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나 정화의 원정은 1424년 영락제 사망 이후 중단되고, 정화 역시 1433년 7차 항해 때 사망한다. 1436년,홍희제는 해외 원정을 위한 배 건조를 금지시키고 남은 배는 썩도록 방치하게 한다. 40년 뒤엔 정화의 항해기록을 말소하기도 한다. 원정 중단에 대한 가설은 여러가지가 있다.
 
  • 조공에서 얻은 수입이 항해 경비보다 적었다. 
  • 북방의 침탈을 막기 위해 국경 방위에 자원을 투입하기 위해
  • 관리 세력과 환관 세력의 권력 투쟁
  • 기존 목표인 조공무역의 확대를 이미 7회의 원정으로 달성함(유럽의 해외원정과 기본적인 성격이 다름)
 
결국 목표를 달성한 중국의 해외원정은 스스로 막을 내리게 된다. 
 
*영락제는 주원장(홍무제)의 넷째 아들로 다섯 번왕 중 하나였으나. 2대 황제 건문제가 자신을 견제하자 북경에서 정난의 변을 일으켜 건문제를 축출하고 황제에 등극한다. 영락제의 연호는 영락은 영원한 즐거움이라는 뜻이며 스스로 명명하 ㄴ것이다. 
 
 
4부 : 네덜란드는 스페인에 맞서 싸웠는가
 
네덜란드는 본래 스페인 - 합스루브크 제국의 영토였다. 전쟁이 일어날 16세기 중반엔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네덜란드를 통치하고 있었는데, 1568년 17개 주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펠리페 2세는 반란을 진압하는데 성공하나 북부 7개주는 끝까지 저항하였고, 1581년 네덜란드 공화국을 건립하는데 이른다. 이후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1648년까지 이어지고 결국 독립을 쟁취한다. 
 
네덜란드는 자유 경제에 대한 열망이 있었고, 이는 80년 전쟁을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네덜란드는 국내외 상업, 제조업, 농업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큰 부를 축적하였고 이는 다시 독립전쟁을 지속할 수 있는 자금이 되었다. 
 
자유 경제 외에도 개신교를 따르려는 네덜란드인과 가톨릭을 강제하던 스페인의 종교적 갈등도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원인은 경제적 이유라고 볼 수 있는데, 네덜란드는 남부 안트베르펜을 중심으로 무역, 국제 금융업을 통해 번성했다. 그러나 스페인 제국의 지속적인 전쟁과 전쟁 자금을 위한 조세부담이 증가함에 따라 결국 네덜란드의 상업 세력은 반 스페인으로 노선을 변경하게 된다. 초기에는 네덜란드에 부과되는 세금이 없었으나, 계쏙된 전쟁으로 부채가 증가하자 1542년부터 부동산, 대부 수입에 10%이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했다. 이후 맥주, 와인 등의 상품에도 소비세가 부과되었고, 그럼에도 재정적자가 해결되지 않자 결국 펠리페 2세는 세제 개혁을 통해 네덜란드의 모든 상업 거래에 10%의 세금을 부과한다는 내용을 발표한다. 이 경우 네덜란드이니 내야 할 세금은 기존의 15배에 달하게 되었다. 
 
주 의회와 총독은 대립하게 되었고 총독은 주 의회의 결의와 관계 없이 신 조세 정책을 취하겠다고 발표했다. 브뤼셀 상인들과 플랑드르의 상인들은 특사를 보내는 등 반대의견을 피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당시 네덜란드의 대외적 상황도 좋지 못했다. 덴마크 - 스웨덴 전쟁으로 발트해 곡물 교역이 중단되었고, 잉글랜드의 통상 금지령으로 플랑드르 직물의 수출길이 막혔다. 거기다 흉작과 기근, 자연재해가 연이어 발생하였는데 북부 해안지대에서는 홍수로 2.5만 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이는 곡물 공급 부족으로 인한 물가상승으로 이어졌다. 결국 상인세력은 네덜란드 독립을 지지하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한다. 
 
상인 집단이 전쟁 기간 동안 재정 지원을 꾸준히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네덜란드는 80년 간의 독립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다.
 
 
5부 : 네덜란드는 어떻게 스페인에 승리했을까
 
근대 국제관계의 출발이라고 이야기하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국제적으로 네덜란드의 독립이 인정되었다. 이후 반세기 동안 네덜란드의 황금기가 도래한다.
 
네덜란드는 꾸준한 재정 지원을 바탕으로 군사개혁을 성취했고 결국 1590년부터 전세를 역전할 수 있었다. 1640년 네덜란드의 전쟁 비용은 1,800만 플로린에 달했는데 1641년 네덜란드 정부 예산이 2,200만 플로린임을 감안하면 전체 예산의 대부분을 군비에 투입했다고 볼 수 있다. 
 
네덜란드 재정수입은 대부분 세금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네덜란드의 세금은 공화국 전체를 대표하는 전국 의회 세금과 7개의 각 주 지방세가 있었는데, 전국 의회 세금은 미미했고 대부분 각 주의 지방세로 재정수입이 채워졌다. 지방세는 인구와 경제 규모에 따라 부담하였는데, 경제적으로 가장 번성했던 홀란트가 전체 세금의 60%를 부담했다. 이 가운데 홀란트 소비세가 2/3을 차지했고 1550년 1630년대 홀란트의 재정수입은 30배 증가하였는데 인구가 2배, 물가가 3배 상승한 것을 감안해도 조세부담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세금으로도 모자란 돈은 대부로 충당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네덜란드는 스페인보다 훨씬 저렴한 이자로 대출을 받았다. 기록에 따르면 거금 100만 플로린을 3%라는 싼 이자를 주고 2일만에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자본가들이 네덜란드의 경제를 신뢰했다는 방증이 된다. 
 
네덜란드는 대부 방법도 다변화하였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단기대부이다. 네덜란드 징세청부인이 약속어음을 발행하면 이를 담보로 단기 대부를 받을 수 있었다. 이 관행이 정착되었는데 한가지 주목할만한 점은 네덜란드인뿐만 아니라 외국 상인들도 단기 대부 요청을 수락했다. 네덜란드 피난민들이 많이 정착했던 잉글랜드 북부 입스위치의 상인들은 5만 파운드를 융자해주었고, 네덜란드 안프베르펜과 직물 교역을 주로 하던 런던 모험상인회는 10만 파운드를 투자했다. 이 역시 네덜란드 경제가 전쟁 중에도 꾸준이 성장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장기 공채제도(renten, 1510년대 등장, 1540년대에 완성)은 원금 상환을 유예해주는 제도였는데 공채 보유자는 대부금에 대한 이자만 지불하면 되었고, 국가가 이자 지불 및 원금을 보증하는 제도였다. 원금 상환이 지연되어 채무자 부담이 경감됨은 물론이다. 1515년 주 의회가 공채 보유자의 이자 지급을 책임지는 역할을 하였고, 1540년대 장기공채 지급 이자를 특정 세금 수입과 연동하였다. 장기공채 판매로 채권시장도 함꼐 발달하게 되었다. 
 
즉, 네덜란드 공화국이 스페인에 비해 자본을 효과적으로 동원했기 때문이다. 단기, 장기 대부를 활용해 스페인보다 낮은 이자로 자본을 동원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네덜란드 경제에 대한 투자자의 신뢰가 밑바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돈이 권력의 힘줄이다" - 키케로
 
 
6부 : 네덜란드 경제 성장의 밑거름
 
중세 네덜란드 농업 특성과 도시화 - 네덜란드에서는 봉건제가 정착되지 않은 대신 농민공동체 주도 농경사회 구축이 주를 이루었다. (다만 땅이 척박하여 곡물 농사에 적합하지 않았다) 

네덜란드는 목축이나 상품작물 재배를 통해 얻은 이익으로 곡물을 대량 수입했다. 주로 발트해에서 곡물을 수입했다. 이런 농업은 곡물 농업에 비해 적은 노동력을 투입해도 되었기에 잉여 노동력은 농촌을 떠나기 시작했다.
 
농촌을 떠난 네덜란드인은 14세기부터 동시다발적으로 도시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도시는 농촌 지역과의 교역이 중요했기에 수공업, 어업, 해운업, 조선업이 발전하게 되었다. 도시의 성장을 바탕으로 1600년에는 네덜란드 인구의 30%가 인구 2,500명 이상의 도시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농촌 인구 비율이 80%에 달하였다.
 
발트해는 곡물, 묵재의 주산지였고 독일 한자동맹 상인과 네덜란드 상인이 주로 이를 교역하였다. 경쟁 끝에 16세기초 네덜란드 상인이 주류가 되었고, 주로 홀란트 상인이 활약했다. 1497 ~ 1530년 발트해 통관 선박 중 70%가 네덜란드 선박이었고 이중 78%가 홀란트 상인의 배였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대규모 선당과 선박율 효율성을 바탕으로 낮은 운송비를 경쟁력으로 삼았다. 네덜란드는 일찌감치 어업이 발전해서 이것이 가능했다. 네덜란드는 15세기 중반부터 보이센을 활용한 청어잡이가 크게 발전하였다. 보이센은 항해기간이 5~8주까지 이를 정도로 튼튼한 배였고 배 위에서 청어를 바로 가공 및 염장하여 1년 이상 보관할 수 있었다. 17세기 전반기 어선이 1,500척, 어부가 12,000명에 달할 정도로 청어잡이는 활황을 띠게 된다. 네덜란드인은 청어를 발트해 지역 곡물과 교환하였고, 곡물을 서유럽, 이베리아 반도 지역에 수출 후 소금과 수공업 제품을 수입해 큰 이윤을 창출했다.
 
어업과 무역업의 성장은 네덜란드 조선업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1595년 개발된 플로이트는 선체 좌우가 볼록한 무역선인데, 적재 상품 수는 늘리면서 항해에 필요한 선원 수는 즐어든 특징이 있었다. 덕분에 통행료가 감소하는 이득이 있었다. 17세기 초 네덜란드는 매년 400여 척 이상의 배를 건조했고 종사자만 1만 여명에 달했다.
 
중세 말 이후 네덜란드는 상업적 농업의 발전과 도시화, 발트해 무역과 어업의 발전으로 번성하게 된다. 도시 중심의 시장경제가 발전하고 기술혁신이 일어나면서 도시와 농촌 경제가 함께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북부는 직물업과 사치품 교역이 발전한 남부에 비해 발전이 더뎠고, 북부의 부흥을 위해서는 새로운 계기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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