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과 일상/역사

한국정치사 3 (제1공화국, 1950년대, 4.19 혁명, 제2공화국)

Varsika 2023. 8. 11.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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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1공화국의 경제

 

1953년부터 1960년까지는 원조경제의 성격을 띤다. 전체 예산에서 원조가 차지하는 비율은 59%, 전체 GNP에서는 13%였다. 이 시기 한국자본주의 발전의 초석을 다질 수 있었으나 원조배분권의 영향이 컸기에 관료적 자본주의의 역시 이때 시작되었다. PL480(Public Law, 미국공법)에 의거하여 잉여농산물이 한국으로 쏟아져 들어와쏙, 이로 인해 국내 농업은 사양화 되고 자영농은 몰락한다. (1공화국 시기 농산물 생산비대비 수매가는 76.7% 수준, 도시 근로자에 비한 농민 수입은 57.7%에 불과했다.)

 

산업화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제1공화국 시기 제조업 성장율은 16.8%로 같은 시기 개도국 평균인 5%에 비해 3배 이상 높은 수치였다. 이는 제 3공화국 시기의 수치(한국 20.3%, 개도국 평균 6.6%)에 비해서도 높은 수치다. 보편적인 인식과 다르게 1950년대 경제는 정체하지 않았다.

 

* (c.f) 남미와 한국의 차이

 

남미 - 지주계급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기에 노동자들이 연대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훗날 포퓰리즘(페론주의)으로 연결되나 노동자 계급이 정치에 포함되는 결과를 낳는다.

 

한국 - 농지개혁으로 인하여 지주가 몰락했고, 노동자들의 연대할 필요가 없었다. 이로 인해 노동자 계급은 정치에서 배제된다. (권위주의)

 

2. 제1공화국의 정치

이승만은 자유당을 창당했고 반이승만 세력은 민주당(한민당)을 창당했다. 그러나 한민당은 조봉암 등 진보세력의 합류를 거부하고 반공주의 정당임을 분명히 했다. 이로써 한국 정치는 보수양당제(1 1/2 정당체제)의 길을 걷게 된다. 

 

이승만은 미국의 세계전략 변화와 내부 경제 위기로 인하여 몰락하기 시작한다. 먼저 세계 체계적 요인으로는 미국이 주도한 중심부 정리가 완료되었고, 제3세계 전략(Alliance for Progress)가 시작되었다. 원조에서 발전지향적 전략을 채택하였고, 한일국교 정상화를 시도했다. 두 번째로는 원조경제가 한계에 봉착하였으며, 수입대체산업화의 쉬운단계가 모두 소진됨에 따라 성장률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하여 도시중산층의 지지가 사그라들었고(야촌야도), 결국 부정선거를 저지르는 악수를 두고 만다. (부정선거, 이기붕 부통령, 마산 김주열 사건)

 

3. 4.19 혁명과 제 2공화국

(1) 혁명의 전개

2.28 대구 시위, 3.15 부정선거, 마산 김주열 사태 드응로 인하여 전국 각지에서 학생(중고등생과 대학생)과 도시빈민의 봉기가 잇달았고 서울에는 경무대 앞 경찰의 총격에 의해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이승만은 군을 투입해 시위를 진압하려했으나 계엄군(서울지역 계엄사령관 조재미)은 발포를 거부하였고 거기다 미국의 압력이 더해져 이승만은 하야 후 하와이로 망명한다. 이기붕 가족은 자살한다.

 

(2) 4.19의 성과

60년 총선에서 민주당은 쉽게 승리한다. 이후 내각제 개헌이 이루어졌고 장면을 주축으로 한 신파와 윤보선 대통령을 주축으로 한 구파가 파벌 싸움을 벌인다. 제 2공화국은 경제 개발 5개년 게획을 발표하고 홍콩을 모델로 삼았다. 한미경제협정을 체결하였는데 이를 두고 제2의 태프트 가츠라 조약이라 비판하며 반대시위가 잇달았다. 대미예속을 가속화한다는 것이 주요 반대 사유였다. 제2 공화국은 제 2의 조선총독부라 불릴만큼 친미적인 성격을 보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가폭등과 경제 위기를 심화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러한 경제 위기는 5.16의 배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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