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과 일상/역사

한국정치사 5 (서울의 봄과 5.18, 제 5공화국)

Varsika 2023. 8. 11.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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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능의 극치 최규하 체제

10.26 직후는 박정희 없는 유신체제 였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비롯한 대다수의 군인들은 정치적 중립을 지지하였으나, 박정희가 키운 정치군인 세력 하나회가 여기에 불만을 가졌다. 이를 눈치챈 수뇌부는 전두환을 보안사에서 동해방위사로 전출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최규하 휘하의 비서마저도 하나회 출신이었기에 비밀이 누설되고 만다. 

 

○ 12.12 쿠데타

군의 사병화(노태우의 9사단), 4단계에 이은 다단계 쿠데타, 3김시대의 도래, 

 

○ 1980. 5. 17. 비상계엄확대 조치

3김은 5월 20일 국회를 소집하여 개헌 및 계엄 해제결정을 추진하고 있었음. 이를 막기 위해 신군부는 5월 14일 진행된 시위를 빌미로 5월 17일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단행함.

* 서울의 봄 :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은 신구부에 계엄해제 등을 요구하였고 답변 기한은 5월 13일로 못박은 상태였다. 신군부의 입장에 변화가 없자 5월 14일 서울 지역 대학생들은 총궐기 및 가두시위를 진행하였다. 5월 15일 오후 3시경 서울역 인근에 10만 명의 대학생이 모여 계엄철폐를 요구하였고, 지방 주요도시들도 시위가 잇달았다. 그러다 많은 인파를 통제하기가 어려워 학생대표들은 회의 끝에 자진해산하기로 결정하고, 해산 직후 신군부는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한다. 

 

○ 5.18 광주 민중항쟁

가. 배경

- 국회개헌을 막기 위한 신군부에 결정에 대한 저항

- 서울역 회군(심재철)

- 3김 분리타격(JP - 부정부패, DJ - 구속, YS - 연금)

 

나. 진행

- 부유층은 참가하지 않았다.

시위에 대한 부정적 입장, 계급적 모순이 있어 민중항쟁은 아니라는 비판이 있다. 5.18에서 많은 계급 세력이 연합하여 항쟁하긴 하였으나 일부 부유층과 BG계급은 동참하지 않았다.

(1980년 시위에는 중산층이 주로 참여하였으나 1987년에는 중산층을 포함한 전국민이 반정부 시위에 지지를 보냈다는 차이가 있음)

 

- 광주'시민'이 아니라 '광주'시민이라는 것에 중점을 둠. 지역성이 계급성을 뛰어넘지 못했다.  

 

- 5.18 중 미국에서 항공모함을 부산에 진주시킴. 광주 시민군은 이를 광주를 위한 것으로 오판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신군부에 대한 지지라 할 수 있음. 이에 따라 5.18 이후 반미 투쟁이 격화됨

https://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757369 

 

전두환을 안심시킨 항공모함의 정체

[김종성의 히,스토리] 미국 비밀문서 사본 공개... 다시 주목받는 5.18 당시 미국의 역할

www.ohmynews.com

 

다. 5.18 이후

- 삼청교육대

- 국보위(초헌법적 기구)

- 단임제 개헌(군의 정치지배 제도화 - 남미형. 7년씩 돌아가면서 군인이 통치하자)

- 유신헌법의 계승. 대통령 간선제, 중선거구제

- 김대중 사형선고

 

○ 80년대와 제 5공화국

- 국가개입의 강화 : 과잉중복투자 구조조정, 초헌법적 개입(사유자샌권) - 정주영의 정치결정 계기, 국제그룹 공중분해

- 탈규제, 민영화가 아닌 사유화(Privatization)

- 한국 경제의 도약 : 3저 호황, 70년대 말 투자의 결과, 유학 자유화, 해외여행 자유화

 

○ 제 5공화국의 정치

 

- 3김의 강제 퇴장

- 민정당의 창당과 관제 야당(다당제, 관제사회당)

 

- 탄압의 딜레마

RC(repression cost) > TC(tolerance cost). 진압할수록 진압에 무뎌져 탄압비용이 상승된다.

 

- 자유화, 유화 국면 : 통금철폐, 교복 자유화, 학도호군단 허용, 반미반핵 운동(새로운 저항)

민민투 대 자민투(노선투쟁의 본격화), 강철서신(강철은 필명, 북한의 주체사상을 알림, NL 주체사상파의 시조. 현재는 북한 민주화 운동가로 활동 중)

* 자유화와 민주화는 차이가 있다.

 

- 민추협 결성. 김영삼의 단식. 양김의 협조와 대립

- 84년 총선에서 양김의 신한민주당이 27%의 득표율로 제 1야당에 등극. 어용야당의 몰락. 김대중 귀국(1985), 직선제 개헌 투쟁

 

○ 87년 6월 항쟁

- 직선제 개헌요구, 4.13 호헌선언, 범국민적 저항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명동성당과 화이트 칼라 부대, 지역주의 없는 전국적 저항

* 노동자들은 생계로 인하여 시위참여가 비교적 적었음

- 비상계엄선포, 비상계엄 취소와 6.29 선언

* 신군부의 구조적 제약(88 올림픽)

 

○ 87년 7월 ~ 8월 노동자 대투쟁

- 노동운동의 분출, 전투적 조합주의

- 병영적 노사관계(노동자 장발금지, 임금인상요구 X) 극복의 계기

 

○ 87년 대선

노태우 - TK / 김종필 - 충청 / 김영삼 - PK / 김대중 - MK(목포광주) / 백기완(민중주의) - 전술적 후보

양김의 분열로 인한 노태우의 승리. 양김이 분열하지 않았으면 지금과 같은 지역갈등이 없었을 것이다.

 

소설 <1987년> 분열의 5가지 죄악

민주화 지연, 한국정치의 강시 JP, 지역주의 , 분열의 되물림(김대중과 하느니 한나라당과 하겠다), 허무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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