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과 일상/역사

한국정치사 1(일제시대, 식민지, 제국주의, 해방, 독립, 근현대사)

Varsika 2023. 8. 10.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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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준비운동

- 초정권적, 초정파적인 수렴과정에 대한 이해

- 역사는 고정된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현재와 과거 간의 대화이다. 

- 시간과 공간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성격을 가진다. (공간의 정치경제학)

 

○ 그렇다면 한국정치사를 어떻게 연구할 것인가?

- 세계체제(wallerstein 주창)는 양면성(동전의 앞뒷면)을 가진다. 제3세계의 낙후와 서방의 발전, 일제의 발달과 조선의 식민지화. 세계체제론은 분석 단위를 과거 1국(사회학)에서 세계단위로 확장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자급자족 국가가 사라진 시대에 1국 단위의 분석은 부족하다는 것.

 

- 참고

전체 대 부분, 구조 대 행위, 이론 대 연사, 반전도적 시각, 내인론 대 외인론

* 내인론 대 외인론의 사례를 들자면 DJ의 재벌개혁, 노동자 해고라는 정책에 대해 외인론은 IMF와 경제위기를, 내인론에서는 개혁정신을 그 이유로 본다.

* 꼭 양자택일을 할 필요는 없다. 어떻게 조합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 일제 36년 : 일본의 제국주의는 보편성과 특수성을 함께 갖고 있다.

- 일본 제국주의의 보편성

보편성은 식민지 반(half)봉건체제라는 점으로, 제국주의와 봉건지주의 연합체제의 성격을 보였다. 개인의 토지 소유권을 보장하면서도 지주 계급을 유지하도록 했다. 식민지의 산업화는 저지했다. 대부분의 식민지가 산업화를 하지 못하고 공산품 수입처로 전락했다.

* 현재는 선진국에서 기획, 디자인, 금융을 맡고 제3세계는 제조를 담당한다.

 

- 일본 제국주의의 특수성

일본은 독일, 이탈리아와 함께 국가주도성을 특징으로하는 후발제국주의 국가였다. 이 때문에 고속발전을 위한 파시즘 성향이 강했다. 또한 유일한 비서구 제국주의 국가였다. 

 

거기다 조선은 일본의 이웃국가였기 때문에 일본은 공장을 식민지로 옮겨와 병참기지화하여 영구병합을 꾀했다. 이것은 후에 식민지근대화론의 뿌리가 된다.

 

1) 식민지반봉건 사회화

1910년 vs 1945년 중 어떤 시기가 농민들이 더 고통을 받았을까. 당연히 후자다. 실제로 1914년에는 소작농 비중이 35%에 불과하였으나 1945년에는 60%에 이르게 된다. 일제 말기에 해외이주 농민들이 대거 발생했고 이것이 지금의 조선족을 형성하게 된다. 따라서 식민지근대화론은 타당하지 않다. 

 

2) 노동계급의 성장 : 한국과 타 제3세계 국가의 차이점

 

3) 초초과대성장국가

- 인도, 베트남과 함께 한국은 세계 3대 과대성장국가에 포함된다.

* 영국은 의회정치국가라 식민지 정책에도 그 문화가 반영되었다. (관리자 수를 과다하지 않게 유지)

프랑스는 왕권이 강했고 국가 주도형 국가였기 때문에 탄압이 억세어 독립 운동이 힘들었다. (일제는 프랑스보다도 강력한 통제를 실시함 - 총독부 시스템은 국가주도형 경제체계였다. 국가주도형 경제체제는 정치가 경제를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한다.)

 

4) 민족자본가의 미발달

민족자본가란 우리나라 자본으로 우리나라에서 생산

당시는 친일이 아니면 기업을 운영할 수 없었으므로 민족자본가가 발달할 수 없었고 이는 독립운동의 주도권을 우파가 갖지 못한 주요한 이유이기도 했다. (과거에 일부있었던 상업자본들은 매판자본의 성격이 강해 민족자본이라 할 수 없다.)

 

일본경찰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노동자 파업, 농민운동(적생농조 등)을 비롯한 다양한 독립운동 세력의 90%가 좌파로 분류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 직후 신탁문제에 있어서 좌파들은 찬탁 세력으로 몰려 반민족주의자로 낙인이 찍히게 된다. 

(c.f) 보광당(경남 함양에서 1945년 3월 봉기한 독립운동. 해방 이후 해체되어 대부분의 세력이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흡수되었으며 후에 빨치산이 지리산을 근거로 삼는데 영향을 주었다.)

 

○ 해방과 분단

- 한국은 패망 제국주의 식민지들 가운데 가장 빨리 독립하였다. (승전국으 ㅣ식민지인 베트남, 인도 등에 비해)

- 한반도 문제에 대한 국제적 논의는 카이로 회담(루즈벨트, 처칠, 장제스) 당시 루즈벨트가 신탁안을 제시하면서 거론되었다. (루즈벨트 in a proper time, 처칠in due course)

- 해방 3년사(1948년 국가성립과 분당), 해방 8년사(1953년 휴전과 분단)

- 분단의 3가지 유형

(1) 독일형 : 외세형

(2) 베트남(중국)형 : 민족해방 *서구의 개입도 일부 작용

(3) 한국형 : 외세와 내재적 분단이 함께 

 

세계체제적 배경

- 2차 대전은 연합국 대 추축국으로 제국주의 간 모순(선발제국주의 vs 후발제국주의)에 의해 발상하였다. 당시에도 진영모순, 민족모순, 계급모순(지주와 농민)이 있었으나 제국주의간의 모순이 너무 극심하여 다른 모순이 은폐되었다. 진영이 다른 미국과 소련이 2차 대전의 동맹국이었던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2차 대전 당시 온건 정책을 통해 제국주의간 화합을 도모했다면, 종전 후에는 진영갈등에 대응하고자 마샬 플랜을 실시하였고 일본에 비교적 포용적 태도를 취하였다. 

(c.f) 데탕트 : 1960년대 이후 미소 양극체제에서 다극체제로 세계정세가 변함에 따라 미소간 긴장이 완화되던 현상

 

종전 후 전후질서

- 미국헤게모니체제, 진영모순의 부각(루스벨트의 사망), 냉전의 시작.

- 한국도 갈등의 중심에 놓이게 된다. (진영모순의 첨단지역, 미소분할점령, 한국전쟁)

* 미소분할점령은 얄타회담에서 루즈벨트와 스탈린이 합의한 사항이다. 

 

○ 미군정 

- 주한미군 : 친일파 중용, 극우파 영향력 확대

- 주일미군 : 재벌해체, 농지개혁, 노동조합 활성화, 사회당 육성

* 남한은 불꽃만 당기면 폭발할 준비가 되어있는 화약통(미군정 보고서)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ht/view.do?levelId=ht_004_0030_0010_0050 

 

우리역사넷

하지 장군 휘하의 미 육군 24군단은 매우 위압적인 자세로 38도선 이남 지역의 점령에 임하였다. 한국의 정치 문제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대처하도록 진주 이전부터 강조되었지만 하지가 맞닥뜨

contents.history.go.kr

"그들은 지난 35년간 일본에게서 배워 왔다. 우리의 목적으로 볼 때 최상의 셋업이다. 우리가 단추만 누르면 어디선가 경찰이 누군가의 골통을 까부수고 있을 것이다."

 

○ 해방정국의 상황

건준, 인공 등 한국은 사실상의 정부를 두고 혁명이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친미우익 정권의 창출을 위해 혁명을 분쇄하였다. 건준과 인공을 불법단체로 규정했고 친일경찰을 고용했다. (초과대성장기구의 계승, 강화) 농지개혁에도 실패해 1946년 추수폭동이 일어났다. 귀속재산 처리는 관료자본주의의 시초를 제공하게 된다.  

 

○ 1948년부터 1950년까지

단독정부 수립이후 미군은 단계적으로 철수한다. 한국은 여순사건을 계기로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고 반공국가화되기 시작한다. 남한 내 빨치산들의 투쟁은 전면화된다. (대중투쟁에서 무장투쟁으로의 전환)

 

이승만과 소장파, 한민당의 갈등이 시작된다. (반민특위, 국가프락치사건 등)

* 한민당은 한국야당의 뿌리로 친일지주 세력이 포함

 

- 농지개혁

지주계급이 없거나, 몰락한 아시아 4개국

 

(1) 북한은 농지개혁을 진행하였으나 사회주의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지주의 몰락이 산업의 성장으로 이어져야 했으나 북한은 산업자본도 통제하고 말았다. 소련은 산업화에 성공하였으나 북한은 산업화에 실패했다. 

 

(2) 농지개혁을 하지 않으면 공산화가 된다? (가능성 有)

- 중국 : 모택동, 장제스

 

○ 남북갈등의 격화

- 38선 무력대립(백선엽 등), 국방군 2개 대대 우러북

- 49년 ~ 50년 겨울 동계토벌작전으로 인한 빨치산 괴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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