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과 일상/역사

[한국사] 개항과 문명 개화운동(이승만과 문명개화파, 근현대사)

Varsika 2022. 7. 9.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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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화국과 이승만의 평가
수정주의적 평가
: 이승만에게 분단의 책임이 있다. 반공론을 명분 삼아 정적 조봉암을 숙청했다. 외교 독립노선을 주장하면서 해외에서는 과소비를 일삼았다. 반민특위에 부정적이었고 결정적으로 친일파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다. 

1. 남한 단독 정부 수림
2. 민주주의 발전 저해(정치적 부패와 4.19 혁명), 정적 타파(조봉암) 3. 무능한 독립 운동가
4. 민족 정기 훼손 : 친일파 청산에 미온적
5. 농지개혁 불철저
6. 50년대 원조경제에만 의존했다, 절대 빈곤

 

신전통주의적 평가
: 행정조직 유지를 위해 친일파 청산이 미비했다. 친미 반공은 청년 시절 이승만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외교 독립노선에 대한 비판이 있지만  결과론적으로 모든 독립 노선이 무능했다. 

1. 남한 건국의 아버지 
2. 처음 민주주의 제도를 시행했기에 시행착오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3. 외교 독립노선
4. 지지기반 확충(한민당 vs 공산주의)
5. 현실주의자
6. 노련한 외교술 : 미국 원조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받아냈다. 

* 이승만 옹호론 : 외교독립노선뿐만 아니라 무장독립투쟁 역시 실패한 것은 마찬가지다. 적화될 가능성이 높았던 한반도를 자유민주주의 국가로 만든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 이승만은 오랫동안 미국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국내 지지기반이 없었던 한계가 있다.

한국전쟁 직전에 농지개혁을 시도했다. 물론 친일 지주세력을 처단하지 않았기 때문에 철저하진 않았다. 그러나 정치감각이 있었기에 친일 지주의 편만 들지도 않았고, 농민의 편만 들지도 않았다. 북한을 견제하면서 자신의 우위를 유지했다. 

 

* 이승만은 북한이 농지개혁을 통해 인민들의 지지를 받는 것을 보고, 남한의 농지개혁을 실시한다. 이 농지개혁은 박헌영이 주장했던 '남조선 대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였다. 

 

* 50년대 경제성장 재조명의 관점 : 식민지 시대에도 근대화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 50년대의 이승만은 왜 근대화를 하지 못했냐는 비판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박정희의 60년대 경제성장이 너무 화려했기에 상대적으로 50년대가 빈곤해 보인다는 것이다. 

 

 

전통주의와 수정주의 그리고 신전통주의

 

- 전통주의 : 50~60년대 기원했다. 냉전 및 한국전쟁의 책임소재가 공산권에 있다는 관점

- 수정주의 : 80년대 한국전쟁의 기원을 미국과 이승만의 책임에서 찾는다. 미국 정부 아카이브에 보관된 공문서에 기반한 주장으로 신빙성이 높았다. 전쟁을 갈등을 해소화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일방적인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시각이다. 

 

- 신전통주의(박명림) : 스탈린 문서 공개 이후 소련에 책임이 있다는 시각. 전쟁에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시각.

 

 

우익(이승만과 한민당, 1945년 이후)

 

우익은 크게 아래 두 세력이 합쳐져 만들어졌다. 같은 우익이지만 한민당과 이승만은 뿌리가 다르다. 적어도 이승만은 친일에 대한 부채는 없다. 한민당은 계보상 친일파가 다수였다. 

 

(1) 이승만을 위시로 한 문명개화파(구한말)

(2) 문화적 민족주의자(실력양성주의자, 타협적 민족주의자, 3.1 운동 이후)

 

 

문명개화운동과 문명개화파

1. 강화도 조약(1876)

2. 갑신정변(1884) :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홍영식, 서재필 *급진개화파

3. 갑오경장(1894) : 김홍집, 유길준 *온건개화파

4. 독립협회(1896) : 서재필, 이승만(배재학당 당시 사제지간)

* 급진/온건개화파라는 표현은 이광린 선생이 처음 사용함.

 

 

어떻게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서양식 근대화를 이루었나?

일본은 서양의 방식과 의도를 알고 개항은 불가피하다고 판단, 빠른 개항을 결정했다. 이후 미국의 방식을 배워 한국과 중국에 적용했다. 당시 조선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로 인하여 쇄국정책이 더욱 강화되던 시기였다. 

 

 

문명개화파와 문명개화운동

- 신사유람단 : 박정양, 어윤중, 홍영식(갑신정변), 유길준(갑오경장), 윤치호(친일파, 감리교 대부, 윤보선이 그의 종질)

 

- 수신사 : 박영효(부마이자 한성판윤), 김옥균, 서광범

→ 신사유람단과 수신사 일원이 갑신정변의 주역이 됨. 

 

- 갑신정변(1884)의 영향으로 한성조약(1884, 조선-일본)과 텐진 조약(1885, 청-일본)이 체결됨

 

- 갑오경장(1894) : 일본에 의한 근대화 추진(내재적 발전론은 외세에 의한 근대화라고 갑오경장에 부정적인 입장임), 과거 및 신분제 폐지(신분제 폐지는 당시 후폭풍이 거셌다)

 

* 내재적 발전론 시각에서는 고종이 자발적 근대화를 시도(칭제, 덕수궁 도로정비사업 등)하였으나 일본에 의해 이것이 꺾였다고 본다. 고종은 유럽의 계몽군주처럼 성장할 수 있었다는 시각이다. 

 

 

일본 1만엔권(후쿠자와 유키치)

* 후쿠자와 유키치(문명개화정책)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 : 인식론적으로 일본은 더 이상 아시아 국가와 대등하지 않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신분제가 철폐된 시대적 배경에서 학문을 권장했고 이는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의 제자로는 서유견문을 발표한 유길준이 있다. 서유견문은 서양사상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박영효(철종의 사위, 한성 판윤)는 경의의숙에서 수학했다. 경의의숙은 현재의 게이오 대학이다. (설립자 : 후쿠자와 유키치) 후쿠자와 유키치는 한국에도 개화를 위해 신문을 만들라고 박영효에게 말했고 이 영향으로 1883년 한성순보가 탄생한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의 근대화와 청으로부터의 독립을 이야기했다. 여기서 식민지 시대 이전의 '독립'의 의미란 무엇인가? 일본은 왜 조선의 근대화와 청으로부터 독립을 함께 말하였나? 
→ 청일전쟁 당시 일본이 내세운 명분이 바로 조선의 독립과 근대화였다.

 

 

전통시대 동아시아 세계 질서

- 실질적 정치적 지배에 반대되는 문화적, 관념적 지배방식을 유지

- 지배층의 인식은 사대주의로 상징됨(지배층은 사대주의를 부끄러워하지 않았음, 사대주의라는 표현은 신채호 선생이 이를 비판하며 사용한 단어)

 

* 따라서 식민지 시대 이전의 당시 독립의 의미는 과거 전통(사대주의)으로부터의 독립을 뜻한다. 독립은 당시로 치면 일종의 신조어로 지금까지 가장 귀한 것으로 여겼던 가치관을 저버리고 홀로 선다라는 것을 의미한다. 

→ 그러나 '근대화', '독립'의 의미에 있어서 일본과 문명 개화파는 해석이 달랐다. 일본은 다른 속내(조선의 식민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 당시 '독립'의 의미를 명확히 모르는 이들에게는 '축출'과 같은 의미로 받아졌을 수도 있다. 독립의 의미는 문명개화파 등 소수만이 알고 공유했을 것이다. 고종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고 많은 지배층은 식민지(자주권 상실)와 종속국의 차이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문명개화운동의 전개

1. 새로운 세계(국제) 질서 인식 : 전통적 세계질서의 타파, 중국으로부터의 독립

2. 조선국가 존립의 위기의식

3. 새로운 세계 질서 편입을 위한 근대화와 독립

4. 문명개화파(소수의 세력), 외세인 일본에 의존

5. 개혁의 실패(1910 식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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