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과 일상/역사

[제주] 제주 4·3 사건("4·3이 머우꽈?" 기억투쟁 70년)

Varsika 2021. 10. 19.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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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포스팅은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회의 동의를 얻어 제주4·3평화재단이 제작한 <"4·3이 머우꽈?" 기억투쟁 70년> 자료집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기억이 말살당한 곳에는 역사가 없는 것입니다. 역사가 없는 데는 인간의 존재가 없는 것입니다. 기억을 잃어벌니 사람은 사람이 아닌 주검과 같은 존재입니다. 반세기가 넘도록 기억을 말살당한 4·3은 한국 역사 속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입 밖에 내놓지 못하는 일, 알고서도 몰라야 하는 일인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기억의 자살'이라고 불렀습니다. 공포에 질린 섬사람들 자신이 스스로 기억을 망각으로 들이 쳐서 죽이는 '기억의 자살'인 것입니다. - 김석범(소설가)

 

○ 해방정국과 제주도

일제의 패망이 다가오자 여운형은 '건국동맹'을 조직하였다. 건국동맹은 이후 '건국준비위원회'로 발전했고 조선총독부로부터 잠시나마 치안 유지 권한을 넘겨받기도 했다. 곧이어 명칭을 인민위원회로 바꾸었다. 남북이 분단되기 전에는 대부분 '인민'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당시에는 이 용어가 국민, 시민보다 보편적인 용어였다. 인민위원회는 전국 단위의 조직이었고 당연히 제주도에도 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다.

 

38선 이남에 진주한 미군은 인민위원회를 인정하지 않았고, '미군정'만을 38선 이남의 합접 정부라 선언했다. 인민위원회는 이미 각 지방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에 미군정은 이들을 강제로 해상시켜야 했다. 이후 미군정은 통치 효율을 명분으로 과거 일제에 부역했던 관료들을 재등용하면서 갈등이 커지기 시작했다. 

 

제주도의 인민위원회는 특히 결속력이 강했고 미군정의 탄압으로 다른 인민위원회가 소멸되거나 명칭을 바꿀 때에도 건재했다.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이 주축이 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치안 공문이 각 지역으로 하달되면 인민위원회 동맹위원장 이름을 먼저쓰고 이 아래에 지서장의 이름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미군정과 인민위원회의 대립은 커지게 된다. 

 

"제주도 인민위원회는 모든면에서 제주도의 유일한 당이었고 유일한 정부였다."
- E. 그랜트 미드(미군정 정보요원)

 

해방 이후 징용, 징병과 노동으로 제주도를 떠났던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전체 인구가 20만 남짓이던 제주도에 갑자기 6만의 인구가 늘어난다. 이후 일자리 부족과 친일 부역자 잔존 등으로 사회불만이 쌓여가게 된다. 특히 1946년 여름에는 콜레라가 발생하여 매일 평균 50명이 환자가 생기고 가뭄과 흉년도 겹쳐 식량부족이 극심했다. 그러나 관료들은 부패했고 결국 청년들을 중심으로 문제해결에 나서게 된다.

 

- 1947년 3·1절 기념대회 

전국적으로 이루어진 3·1절 기념대회가 제주도에서도 개최되었다. 당시 미군정은 제주지역에 100명의 응원경찰을 내려보냈다. 집회 이후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어 다치는 사태가발생하고,이에 항의하는 군중들에 대해 육지에서 급파된 응원경찰이 발포를 하고 만다. 민간인 6명이 죽고 8명이 부상을 당했다. 피해자 대부분은 등에 총을 맞았다. 잘못된 발포임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정당방위를 주장했고 이에 제주도민은 1937년 3월 10일부터 창의 총파업을 실시한다. 이에 미군정은 검속을 시행하고 한달 만에 500명을 체포,했다. 이중 245명이 수형된다. 이후 1년 간 약 2,500여명이 잡혀갔을 정도로 검속은 강경했다. 

 

특히 미군정의 지시를 받아 제주도로 들어온 서북청년회는 경찰직함을 받았으나 아무런 급료를 받지 않았다. 자연스레 이들은 도민들을 약탈하기 시작했고, 이미 제주도는 '빨갱이 섬'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기에 도민에 대한 태도 역시 폭력적이었다. 이후 박경훈 제주도지사가 3·10 총파업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고, 후임으로 유해진 지사가 서청단원 7명을 데리고 부임하였다. 이후 4·3이 발발하기 전까지 제주도에 들어온 서청단원 수는 총 760명으로 추정된다. 

 

* 3월 10일 ~ 3월 13일까지 166개 기관 단체에서 41,211명이 총파업에 가담(공무원, 교사 주축)

* 3월 12일 : 경무국 최경진 차장, "제주도는 주민 90%가 좌익" 발언

 

- 1948년 4월 3일

남한의 단독선거인 5·10 선거를 약 한 달 가량 앞둔 시점에서 제주도민들에 대한 서청의 폭력은 더욱 극에 달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무장대는 남북분단을 막겠다는 명분을 앞세워 제주도내 경찰지서 12개를 습격해 14명이 삼아하는 사고가 일어난다. (당시 제주도 내에는 총 24개의 경찰지서가 있었다.) 당시 이러한 성격의 사건은 육지에서도 발생하였는데 미군정은 4·3을 '북한과 연계된 공산주의자들의 난동'으로 규정짓고 강경대응을 선언한다. 당시 미군정 관리였던 이인(李仁)은 "고름이 제대로 든 것을 좌익계열에서 바늘로 터트린 것이 제주도 사태의 진상"이라며 미군정 관리들의 부패에서 그 원인을 찾았지만 미군정은 4·3을 이념 문제로 치부해버린다. 

 

초기에는 군에서도 개입을 꺼려했으나 결국 미군정의 명령하에 4월 말에 이르러서는 진압작전에 돌입하게 된다. 당시 제주 주둔군 9연대장 김익렬 중령은 4·3 발발 이후 한달이 지나지 않은 4월 28일부터 무장대 측 대표 김달삼과 협상을 시작한다. 평화적으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협상 끝에 72시간 내에 전투 중지와 점진적 무장해제, 그리고 무장대에 대한 신변 보장이 합의되었다. 그러나 평화협상을 깨는 공작이 시작된다. 제주시 오라동 연미 마을에 무장대를 가장한 괴한들이 몰려 불을 지르고 난동을 피운다. 후에 이는 조작으로 밝혀졌으나 미군정은 당시 장면을 하늘과 땅에서 촬영하여 <제주도의 메이데이>라는 선전용 기록영화를 만든다. 이 직후 5월 3일에는 평화협상을 믿고 산에서 내려오던 민간인들에게 총격이 가해진다. 김익렬 연대장은 항의했으나 미군정은 그를 해임한다. 그리고 강경파인 박진경 중령을 후임자로 임명했다.

 

이후 5·10 총선거가 진행되었으나 제주도에서는 1명의 국회의원만 선출되고 나머지 2개 지역구에서는 주민들의 투표거부로 투표 자체가 무효처리 된다. 이후 제주도는 큰 탄압을 받게 된다. 그리고 혼란 속에서 박진경 중령은 부하인 문상길 중위 등에 의해 암살된다. 이후 제헌의원들에 의해 헌법이 공포되고(1948년 7월 17일), 뒤이어 이승만 대통령이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1948년 8월 15일) 미군정은 협약에 따라 1948년 말까지 한반도를 떠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미군정은 철수 이전에 한반도의 상황을 정리하고자 완전 섬멸 계획을 세운다.

 

* 1948년 1월 22일 : 군정경찰, 조천에서 개최된 남로당 집회 급습하여 106명검거. 폭동계획이 있음을 보고

1948년 3월 6일 : 조천중학원생 김용철, 조천지서에서 취조받다 고문으로 사망.

1948년 3월 14일 :  청년 양은하 모슬포 지서에서 고문으로 사망

1948년 5월 6일 : 김익렬 9연대장 해임, 후임에 박진경 중령 임명

1948년 5월 20일 : 9연대 소속 군인 41명 무장 탈영 후 무장대 가담

 

- 광기의 시대

본격적인 강경진압이 시작된 것은 1948년 10월 17일부터이다. 제주지역 토벌 사령관인 9연대장 송요찬은 "해안선에서 5km 이상 지역은 적성구역으로 간주하여 출입자는 전원 사살하겠다"는 포고령을 내린다. 이는 전투행위에 참여하지 않은 자도 무차별 사살하겠다는 극단적인 조치로 제네바 협약에도 위반되는 행위였다. 같은 해 11월 17일에는 계엄령이 내려진다. 그러나 당시에는 계엄법이 제정되지도 않은 상태였다. 계엄법은 1년이 지난 1949년 11월 24일에야 제정 공포된다. 계엄법이 없는 상태에서 불법적으로 계엄령이 내려지고, 재판도 없이 처형하는 일이 발행한 것이다. 진압 초기 군경이 파악했던 무장대는 불과 500명 수준이었지만 이후 7년 동안 제주도에서는 무려 3만 명이 희생당하고 만다. 무장대의 민간인 살해도 많았다. 토벌대에 협조한 민간인들에 대한 보복이 잔인하게 이루어졌고, 전체 사망자 중 10%는 산부대(무장대)에 의한 보복 살인으로 추정된다. 결국 양민들도 점차 무장대를 '폭도'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군경 역시 믿을 수 없었다. 양민들은 이 시대를 '광기의 시대'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 1949년 1월 17일 : 토벌대에 의한 '북촌사건' 발생, 약 400명 주민 학살

1949년 10월 2일 : 제주비행장 인근에서 군법회의로 사형선고된 249명에 대한 총살 집행, 암매장

1950년 7월 27일 : 제주주정공장 수감자 사라봉 앞 바다에 수장

 

- 침묵의 시대를 거쳐

6·25때까지 이어진 제주 4·3은 이후, 강요된 침묵으로 잊혀져 갔다. 1987년 6월항쟁의 민주화 열기로 4·3의 목소리도 세상 밖으로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1989년 4월 3일 제주시민회관에서 공개적으로 첫 추모제를 가졌다. 이후 지속된 시민들의 노력은 결실을 맺어 2000년에 4·3특별법이 제정 공포되었고 2003년에는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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