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과 일상/역사

한국 고대사

Varsika 2021. 11. 27. 2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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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무왕의 익산 경영과 미륵사>

무왕은 법왕의 아들일 가능 성이 높다. 법왕 또한 정변으로 인한 죽음이 아닐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에는 비교적 안정적인 시기였기 때문이다. 다만 무왕은 법왕의 정상적인 혼인을 통한 정비를 통한 소생은 아니엇을 것이다. 따라서 사비를 피해 익산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익산 천도는 실행되지 않았다.  사비와 웅진이 모두 충분히 기능을 잘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쇄신과 국면전환용으로 익산에 궁궐을 짓고 사찰을 신축한 것으로 추측된다. 익산 경영과 미륵사 대사찰은 절박한 상황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정도로 대 공사였다. 미륵신앙을 바탕으로 무왕은 자신의 신성함을 제고하고자 했다. 

 

미륵사는 의자왕 때까지 건축이 이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서동설화와 서동>

설화에는 서동이 황금을 가진 자로 나오는데 이는 경제적 부를 축적한 사람을 표현한 것을 알 수 있다. 다수는 서동을 무왕으로 추측하는데 삼국유사 기록이 있기에 함부로 부정할 수는 없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무왕은 몰락한 왕족으로 왕위에 오른다. 639년에 미륵사를 창건한다. 

 

하지만 미륵사를 짓는데 기부했던 사택적덕의 딸이 무왕의 왕비로 확인됨에 따라 선화공주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제기 되었다. 무왕 초기의 왕비라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무왕 초기에는 백제가 신라를 공격한 기로깅 없다. 

 

서동이 무령왕이라는 설도 있고, 동성왕(475~501)이라는 설도 있다. 신라 소지왕과 혼인동맹을 추진하였고, 이름 모대가 맛둥과 비슷하며 익산 출토 유물이 웅진 시기의 유물로 밝혀진 것 등이를 이를 뒷받침한다. 동성왕이 탐라 정벌을 하면서 익산을 거쳐갔을 확률이 있고, 이를 계기로 익산개발을 시작했더는 설도 있다. 

 

혹은 서동설화가 아예 민담의 결합이라는 주장도 있다. 금마저(익산)은 군사적 요충지로 신라에 대한 이해다고 높았고, 따라서 현시릉ㄹ 벗어난 적국 공주설화를 통해 평화를 기원했다는 것이다. 미륵사 건립 20년 후 백제가 망했으며, 고구려 역시 이어서 망했다. 고구려 이민들이 금마저로 몰려왔고 685년 보덕국의 난이 진압되었다. 익산의 주민들은 망국의 경험을 두 번이나 한 것이다. 고장의 정체성과 역사를 재인식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설화가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찬기파랑가>

기파랑은 신라 중기의 이상적 유형의 인물이다. 골품제 시대의 모순을 뚫고 사회통합, 국가 통합에 적극적으로 나선 인물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경덕왕의 신임과 백성의 애정이 더해졌다. 경덕왕 시기는 신라 중대 전제왕권과 귀족연합간의 갈등이 만연하던 시기다. 기파랑을 통한 전제왕권의 직접지배를 강조하고 사회통합을 추구했다. 찬기파랑가는 월인천강의 형상을 차용했다. 달(왕)과 조약돌(백성)의 매개인 흰 구름(기파랑)을 활용한 구도로 여기에 반대하는 이들은 먹구름으로 표현했다.

 

당시는 왕권이 질골귀족의 사회경제적 성장에 따라 몰락하던 시기였다. 왕권 강화가 필요했으며 경덕왕은 전제왕권을 추구했다. 화백회의를 견제하였으며 관료제도의 발전을 위해 국학을 진흥했다. 녹읍을 부활시켜 정치적 타협을 추구하기도 했다. 

 

화랑 자체가 골품제읨 ㅗ순을 해소하고 사회통합적 기능을 가진 집단이었다. 신라 중대는 골품제 사회의 모순을 중앙집권을 통해 일정정도 해소하고 있었으며 화랑은 여기에 추가적인 역할을 했다. 

 

<단군신화와 고조선>

단군신화는 고급신화에 속한다. 사제 등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며 작의성이 있다. 그 시대 사회가 지향하는 바와 소망하는 바가 담겨져 있따. 시대의식의 한계를 초월하여 쓰였다. 이러한 특징을 바탕으로 통치권력의 정당화를 추구했다. 반면 저급 신화는 민간에서 자연발생하여 내용이 소박한 것을 뜻한다. 

 

웅녀 이야기를 통해 신의 변신과 수난을 표현했고 이는 단군의 탄생을 정당화 했다. 웅녀는 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갖기를 기원하였다. *신단수 : 환웅이 인간세상에 내린 곳

 

단군의 할아버지는 지고신으로 창조주, 하늘의 신이며, 아버지는 지상의 합법적 통치자(천부인, 칼, 거울, 옥)이자 지고신의 아들인 환웅이다. 어머니는 지상을 대표하는 신성한 존재(유라시아 지역의 신성한 곰)이다. 환웅이 바람, 비, 구름의 신을 데리고 천강했다는 것은 세속적 권위와 종교적 권능을 함께 지니고 있음을 표현한다. 

 

단군은 고조선의 시조이자 신성한 존재이자 신적 피를 이어 받은 초인간적인 장수를 뜻한다. 신선항 시조의 영(靈)이 육화(肉化)한 것이다.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함에 있어서 영웅적 면모나 수난 같은 것은 없었다. 중요시 되는 것은 단군의 혈통과 신성함이다. 단군에 대한 이야기보다 단군의 혈통에 관한 이야기가 더 많다.

 

단군 왕검에서 단군은 종교적 전능을 뜻하고 왕검은 정치적 지배자를 뜻한다. 따라서 단군왕검은 divine kingship이란 뜻이다. 

 

단군신화는 결과적으로 고조선의 정치권력을 권위화한 것이다. 

 

신화는 은유된 사실을 전한다. 이는 현실의 모순을 은폐하고 현존 질서를 정당화한다. 허구도 있다. 하지만 이를 따지기 보다는 무엇을 알리려하는지 메세지를 파악해야 한다.

 

고조선의 배경은 기원전 10세기로 정치권력이 등장하는 청동기 시대다. 고저선의 왕은 종교적 권위에 의해 세속적 권력행사가 가능한 신성 왕권이다. 

 

환웅의 천강은 선진문화 종족의 이동을 상징하며, 곰 토템은 비교적 후진적인 집단을 표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두 집단의 결합은 선진 이주세력과 후진 토템 세력의 연맹이로 이어졌다. 환웅이 기후 관련 신을 대동한 것은 농경사회에 진입했음을 뜻하며 상하관계가 있음은 계급사회였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수조(獸祖) 신화는 수렵문화와 관련이 깊고 동물의 등장은 시조왕의 신성성을 돋보이게 한다. 

 

삼국유사에서는 단군신화를 가장 신성한 존재로 그렸으며 제왕운기에서는 박달나무신으로 등장한다. 웅제시에는 단군이 직접 하늘에서 내려온 것으로 표현되어있고 규원사화에서는 군주호가 단군이라고 설명한다.

 

<단군신화와 민족의식>

단군이 민족의 시조 혹은 인류의 조상이라는 식의 언급은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의식의 토대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단군신화의 첫 등장은 일연의 삼국유사이다. 당시는 몽고와의 전쟁이 이어지던 시기라 민족의식 고취가 필요했다. 

 

민족이란 정신이나 의식, 의지를 공유하며 문화적 공통성을 지닌다. 언어, 지역, 문화 및 자의식 공동체로서 독자적 단일한 국가를 형성하려는 지향성을 지닌 역사적으로 형성된 인간 집단을 뜻한다. 물론 단일민족이 반드시 단일국가를 형성하는 것이 힘들 수도 있으나 적어도 문화를 공유하고 같은 민족이라는 의식이 있어야 한 민족이라고 부를 수 있따. 민족은 구성원간의 최소한의 형식적 평등과 동일한 권리가 전제되어야 한다. 민족은 역사적 개념으로 근대 자본주의의 출현과 연관하여 발생한 역사적 범주로서의 인류 공동체이다. 

 

<한국의 민족의식 발달>

삼국말기 : 삼한이라고 지칭했다. 신라의 통일도 삼한일통이라고 표현했다. 실제 고구려는 과거 삼한과는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삼한이라는 표현으로 고구려를 포함시켰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백제를 예족, 신라를 한족으로 칭했다. 고려 초기에는 발해 유민을 받아들였고 고려 후기에는 삼국유사를 편찬하였으며 단군의 후손임을 천명했다. 삼국유사의 첫 장이 고조선이다 반면 삼국사기는 신라가 첫 장을 장식한다. 

 

조선에서는 단군을 시조로 인식하였으며 단기를 사용했다. 개천절 역시 제정되었다. 

 

민족주의 : 민족 전체의 공동의 이해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는 후에 식민주의와 침략주의로 변질되기도 한다. 한국의 민족주의는 제국주의 침략에 저항하면서 형성된 방어적인 민족주의다. 어떠한 정치 이데올로기든 한국사회에서는 민족적 여부가 평가의 기준이 되곤한다. 과거는 우리를 지탱해주는 버팀목이다. 하지만 이제는 개방적 민족주의로 나가야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바보 온달과 고구려 귀족사회>

가난한 사람이 등장한느 첫 번째 설화다. 경제적으로는 가난하지만 신분상으로는 예속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읍락사회가 무너지고 개별 가호의 경제적 자립성이 생겨난 것을 알 수 있다. 황금이 중요한 재물로 등장하는데 전통적 부의 축적과는 다른 것이다. 

 

(1) 평민/부민설 : 경제적 부를 바탕으로 국가정치 지배체제의 하부로 편입되었다. 6세기 생산력의 발전과 4세기 이후 철제 농기구의 보급과 우경의 확대로 인한 현상이다. 비교적 발달이 덜된 신라에도 6세기에 이르러 우경과 도로정비, 시장 개설 등의 현상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고구려도 소와 철제 농기구를 가진 부농이 등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 시장이 존재했다면 황금으로 거래가 가능햇을 것이다. 

 

바보 온달의 바보라는 호칭은 다만 결혼을 하지 못했던 것과 통혼권이 없었던 것에서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온달은 무예가 뛰어나서 평민에서 시작했으나 하급무사로 성장햇을 가능성이 있다. 당시 고구려는 무예를 숭상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이렇게 추측해볼 수 있다. 다만 6세기에 재벌급으로 자산을 가진 평민이 탄생할 수 있었을지는 미지수이다. 

 

(2) 하급무사설 : 하급무사라 할 지라도 공주와의 통혼권은 없다. 따라서 바보라고 불렸을 것이다. 용감하고 뛰어난 무사는 6세기 혼란기에 군공을 세워 전쟁 영웅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북주와의 전투 및 평강왕의 전투참여 때 공을 세웠을 수 있다. 왕을 구할 정도의 군공을 세웠다면 온달 설화에 나온 것처럼 출세가도를 달렸을 것이다.

 

(3) 귀족설 : 6세기는 정치적 혼란기였다. 따라서 공주와 통혼권이 없는 이가 결혼을 한다면 엄청난 반발이 있었을 것이다. 가령 김춘추의 경우 할아버지가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에 어려움이 많았다. 따라서 온달 역시 귀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정치적 부침을 겪은 귀족 정도로 추정해볼 수 있다. 

 

대형(大兄) : 병력 통솔권을 가진 큰 벼슬

 

당시는 국내성계와 평양성계의 대립이 있었다.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권력이 이동하던 시기였고 천도 전 환도산성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졸본의 시조묘 참배를 통한 국내성계 회유, 귀족 연립정권 참여 등 유화책도 있었다. 당시 고구려는 신라 및 돌궐과의 갈등이 많았는데 이들을 막기 위해서는 국내성계가 반드시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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