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과 일상/역사

[제주] 상생의 바람, 제주 4·3 평화공원

Varsika 2021. 10. 19.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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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4·3 평화공원

역사 이래로 영웅만을 기념하던 인류는 20세기에 이르러 마침내 민중의 역사를 기념하기 시작했다. 제주 4·3 평화공원은 4·3 사건으로 인한 민간인 학살과 제주도민의 처절한 삶을 기억하고 추념하며, 화해와 상생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한 평화·인권 기념공원이다.

 

1980년대 말 4.3진상규명운동에 매진하던 민간사회단체 등은 진상규명과 함께 지속적으로 위령사업을 요구했다. 이런 요구에 부응하여 제주도는 1995년 8월 위령공원 조성계획을 발표했으며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후보는 <4.3특별법> 제정을 통한 진사규명, 위령사업과 보상을 공약으로 제시한다. 1999년 1월 4.3범도민추진위원회는 4.3위령사업 공청회를 실시한다. 이후 특별법 공포와 공원부지 매입, 현상공모와 건축공사를 통하여 2008년 3월 28일 개관하게 된다. 

 

○ 제주 4·3 사건이란?

제주 4·3 사건은 미군정기에 발생하여 7년여에 걸쳐 지속된 비극적 사건이었다. 해방 이후 미군정의 정책 실패와 사회 문제 등으로 민심이 불안한 상황에서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죽는 사건이 일어났다. 제주도민의 민관 총파업에 대응해 미군정은 응원경찰과 서청 단원을 제주도에 파견하여 테러와 고문을 일삼았다. 결국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는 경찰과 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무장봉기하였고 5월 10일 총선거(200개 선거구)에서 제주도 2개 선거구만이 투표수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 되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수립된 뒤, 정부는 제주도 사태를 진압하기 위하 군병력을 증파하여 강경한 진압작전을 펼쳤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중산간마을에 대한 초토화 작전이 전개된다. 1949년 3월 비로소 선무(宣撫, 지방이나 점령지의 주민에게 정부 또는 본국의 본의本意를 권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는 것)를 원칙으로 한 진압작전이 전개되어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하산하였다.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성공리에 치러졌고, 그해 6월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예비검속자와 내륙지방 형무소 재소자 등이 또다시 희생되었다. 결국 1954년 9월 21일에야 한라산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되었다. 7년 7개월 동안 약 3만 명의 주민들이 희생되었다. 

 

○ 4.3 평화기념관의 성격

 

(1) 기념 및 추념 공간 : 해방공간의 제주도에서 자존을 위해 불의에 맞섰던 제주도민의 저항과 그에 뒤이은 처참한 살육의 역사를 기념하고 추모하는 공간이다. 국가권력의 시각에서 일반주민의 시각으로, 중앙사의 시점에서 지방사의 시점으로, 해방공간에서 발생한 제주도민의 역사를 기념, 추모하는 기념관이다. 

 

(2) 아카이브 공간 : 역사적 진실을 기록하는 엄정한 공간으로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과 증언, 유가족의 기록, 4.3과 관련된 역사자료 등으로 사실은 증명된다. 4.3사건과 제주도민의 역사를 유기적이고 총체적으로 제공하는 공간이다. 

 

(3) 역사교육 및 교훈의 공간

 

- 한국현대사 전문역사관으로서의 기념관 : 4.3 평화기념관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한국 현대사(해방 전후사)를 전면적으로 다루는 기념관으로서, 이 분야의 연구자나 괌심있는 방문객들에게 해방 전후사의 인식을 깊게하는 전문적 기능을 가진다.

- 제노사이드 및 과거사 청산의 역사관으로서의 기념관 : 학살은 4.3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단면이다. 20세기 들어 인류의 제노사이드는 가장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4.3 평화기념관은 제주도민의 학살의 역사와 함께 세계의 주요한 제노사이드를 다룬다. 

- 화해와 상생의 공간으로서의 기념관 : 진상규명을 통한 화해와 생상을 염원하는 공간

- 제주의 향토성을 바탕으로 한 기념관 : 4.3 평화기념관의 전시언어는 제주의 향토성과 문화정체성에 기초한다. 

 

○ 전시구성

 

제1관 : 프롤로그. 제주 4.3의 전 기간을 통하여 화산섬 제주도의 중산간 지대에 산재한 천연동굴들은 주민들에게는 천혜의 피신처로 활용되었다. 동굴을 모티프로 한 전시관으로 통하는 긴 터널은 4.3의 역사를 찾아가는 여정의 첫 관문이기도 하다. 이는 오랫동안 지하에 묻혀 있던 역사적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터널을 지나면 원형의 천창 아래 누워있는 '백비'를 만나게 된다. 4.3은 아직도 정명(正名)되지 못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4.3의 진정한 해결이 이루어지는 날, 비로소 비문이 새결질 것이며, 누워 있는 비석도 세워질 것이다. 

 

제2관 : 해방과 좌절. '전쟁-해방-자치-미군정-3·1 발포사건-탄압'의 순서로 전개된다. 1948년 3·1절 기념대회에서 민간인 6명이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를 계기로 제주도민과 미군정의 대립이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제3관 : 무장봉기와 분단거부. 1948년 4월 3일 새벽에 일어난 무장봉기의 발생과정과 배경을 보여준다. 이 공간에는 오름을 상징하는 중앙부와 오름 위의 상황을 묘사한 강요배 화백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다랑쉬 특별전시관 : 1948년 11명의 민간인이 토벌대에 의해 질식사한 동굴 현장을 발굴 당시 그대로 재현하였다. 

 

제4관 : 초토화와 학살. 4.3사건의 희생자의 80%가 희생된 초토화 작전을 다룬다. 

 

제5관 : 후유증과 진상규명 운동. 2000년 1월 <4.3 특별법>이 제정됨으로써 진상규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해원과 쪽낭 : 제주의 마을 어귀에는 언제나 정자목이 있어서 지나는 이들을 반긴다. 또한 제주의 마을에는 팽나무가 주종을 이룬 공동체신앙의 본산인 '본향당'이 있다. 이 공간은 이런 마을의 공동체적 만남과 해원의 신목을 동시에 상징하는 장소이다.

 

제6관 : 에필로그. 이 공간은 희생자를 기리는 한편 어두운 터널에서 다시 광명천지로 빠져나오는 재생의 공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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