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솔직한' 고백 혹은 표현이 독자에게 울림을 준다. 나는 그렇게 친구에게 말했다. 그러자 친구가 이 책을 추천해주었다. 자신이 본 책 중 가장 솔직하고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이 묻어있는 책이라며. 이 책을 읽고 한참을 울었다. 그 시간이 나에겐 선물 같았다.
<한 말씀만 하소서>는 작가 박완서가 자신의 아들의 사고로 잃고난 후의 슬픔, 분노, 상실을 기록한 작품이다. 한 인간이 거대한 슬픔 앞에 얼마나 무참히 부수어지는지, 그리고 다시 어떻게 회복되어 가는지를 담백한 문체에 담았다. 첫장에서 끝장까지 단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아들을 향한 그녀의 강렬하고도 끝없이 치밀어오르는 사랑과 그리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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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은 제아무리 독한 저주에도 애타는 질문에도 대답이 없었고, 그리하여 저는 제 자신 속에서 해답을 구하지 않으면 안되었고, 그러기 위해선 아무한테나 응석부리고 싶은 감정을 억제하고 이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니까. 제 경우 고통은 극복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고통과 더불어 살수 있게는 되었습니다.
- 먹은 건 없는데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나는 걸까. 정말 싫다. 예전에 우리 시골에선 자식을 앞세운 에미한테 자식을 잡아먹었다고 말했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 소리가 끔찍해 소름이 끼쳤는데 지금 생각하니 나한테 해당하는 소리가 아닌가. 나야 말로 자식을 잡아먹은 것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줄창 먹지도 않고도 배부를 수가 없고, 먹지 않았는데도 수족을 움직이는 데 지장이 없을 수가 없지 않은가.
- <인생은 풀과 같은 것, 들에 핀 꽃처럼 한번 피었다가도 스치는 바람결에 이내 사라져 그 있던 자리조차 알 수 없는 것.> (『시편』, 15~16)
주여, 그렇게 하찮은 존재에다 왜 이렇게 진한 사랑을 불어넣으셨습니까.
- 나 역시 그랬었다. 아들의 세계와 나의 세계는 동일한 축을 가지고 마냥 팽배해가고 있었다. 그 나름의 독립, 혹은 연애나 결혼 등으로 에미로부터 분화해 나가기 직전, 모든 가능성과 희망을 공유하던 에미로서는 가장 행복한 착각의 시절에 아들은 홀연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러니까 그의 죽음은 하나의 세계의 소멸이 아니라 두 개의 세계의 소멸을 뜻했다.
(...)
나는 아들로 인하여 자랑스럽고 우쭐해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누가 시키거나 애써서가 아니라 그 애 스스로가 선택한 학교나 학과가 에미의 자긍심을 충분히 채워주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으레 그러려니 했다. 내가 무지한 탓도 있었지만 마취과는 어째 내 허영심에 흡족지가 못했다. 나는 왜 하필 마취과냐고 물었다. 그 애는 그 과의 중요성을 자세히 설명했다.
(...)
나는 내 허영심을 숨기지 않고 실토했다. 그때 아들의 대답은 이러했다.
"어머니, 마취과 의사는 주로 수술장에서 환자의 의식과 감각이 없는 동안 환자의 생명줄을 쥐고 있다가 무사히 수술이 끝나고 의식이 돌아오면 별 볼일이 없어지기 때문에 환자나 환자 가족으로부터 고맙다든다 애썼다는 치하를 받는 일이 거의 없지요. 자기가 애를 태우며 생명줄을 붙들어준 환자가 살아나서 자기를 전혀 기억해주지 않는다는 건 얼마나 쓸쓸한 일이겠어요. 전 그 쓸쓸함에 왠지 마음이 끌려요."
- "주님, 당신을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믿어서도 아닙니다. 만에 하나라도 당신이 계실까 봐, 계셔서 남은 내 신구 중 누군가를 또 탐내실까 봐 무서워서 바치는 기도입니다"라고 내 기도에다 주석을 달았다.
- 특히 하느님꼐서는 의인을 먼저 데려가신다는, 예수쟁이들의 상투적인 위로는 딱 질색이었다. 내 아들은 물론 의인도 아니었지만, 만약 그런 소리를 조금이라도 믿어야 한다면 세상의 어느 에미가 지식에게 정의나 도덕을 가르칠 수가 있단 말인가.
- 그래, 나는 주님과 한번 맞붙어보려고 이곳에 이끌렸고, 혼자돼보기를 갈망했던 것이다. 주님, 당신은 과연 계신지, 계시다면 내 아들은 왜 죽어야 했는지, 내가 이렇게까지 고통받아야 하는 건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말씀만 해보라고 애걸하리라.
- 나는 그 산책길을 <시인의 길>이라고 이름 붙였다. <명상의 길>이라는 원이름이 있었지만 나는 그리스도의 고난 같은 건 명상하고 싶지 않았다. 내 고난도 벅찼다. 행복에 겨운 자들이나 실컷 명상을 하든지 감동을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시인의 길이라고 생각한 건 이해인 수녀 때문이었다. 지금 그 수녀님은 여기 없지만 여기가 본원이니 이 길을 무수히 산책했으리라.
- 그 동안 아들을 꿈에 보았다. 생각하는 대로 꿈을 꿀 수 있는 거라면 매일 아들 꿈을 꾸련만 그 애를 꿈에라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 애를 왜 데려갔는지 한 말씀만 하시라고 처절하게 기도하고 몸부림친 끝에 꾼 꿈이었다.
- 죽음의 문제야말로 신이 개입하지 않으면 풀 수 없는 문제건만 나는 그 문제에 얼마나 아둔한가. 신을 느끼고 깨닫는 능력에도 지능지수라는 게 있다면 나는 저능도 못 되는 백치 수준이었다. 그런 주제에 어떻게 그걸 답답해 할 줄은 아는지.
나는 울며불며 내 미칠 듯한 고통을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내 방에서 혼자 뒹굴며 신에게 퍼붓던 포악과 별로 다르지 않은 푸념이었다. 나는 열심히 단란한 가정을 이루며 살아왔다. 아이들을 건강하고 바르게 잘 길렀고 깊이 사랑했다. 남에게 해를 끼친 일도 없고 마음의 상처가 될 짓도 안하려고 노력하며 살아왔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벌을 받을 까닭이 없다. 고약하고 못된 사람도 자식을 앞세우는 벌은 좀처럼 안 받던데 이게 무슨 처사냐? 억울하고 원통하다. 요약하면 그런 얘기였다.
나는 마치 귀중품을 훔쳐간 소매치기를 고발하듯이 열렬하게 악다구니를 치며 수녀님께 하느님을 고발하고 있었다. 부당하게 빼앗긴 건 감쪽같이 돌려받는 것 외에 달리 위로의 여지가 있을 수 없었다.
- 내가 이 나이까지 겪어본 울음에는, 그 울음이 설사 일생의 반려를 잃은 울음이라 할지라도, 지내놓고 보면 약간이나마 감미로움이 섞여 있게 마련이다. 응석이라 해도 좋았다. 아무리 미량이라 해도 그 감미로움에는 고통을 견딜 만하게 해주는 진통제 같은 게 들어 있었다. 오직 참척이 고통에만 전혀 감미로움이 섞여 있지 않았다. 구원의 가망이 없는 극형이었다. 끔찍한 일이었다.
- 어리석은 이는 한평생을 두고 어진 이를 가까이 섬길지라도 참다운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 마치 숟가락이 국맛을 모르듯이. 지혜로운 사람은 잠깐이라도 어진 이를 가까이 섬기면 곧 진리를 깨다는다. 혀가 국맛을 알듯이. - 법구경
- "나는 ㅗ이아들을 잃었답니다. 그래도 이렇게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살아 있습니다." (...) 나는 처음으로 타인에게 내 입으로 그 말을 하고 그 말을 내 귀로 들었음에 경악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그 사실에 승복하고 만 것이 소름끼쳤다.
- 세상사람들이 예서제서 자기들의 근심이나 걱정을 위로받으려고 내 불행을 예로 들어가며 쑥덕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남의 고통에 쓸 약으로서의 내 고통, 생각만해도 끔찍한 치욕이었다.
주여, 어찌하여 나를 이다지도 미천하게 만드시나이까. 나는 마음으로 무릎을 꺾으며 이렇게 탄식했다.
- 지금은 남을 위해 먹어주는 게 아니라, 내가 먹고 싶어서 먹고 있다는 자의식이 나를 한없이 부끄럽고 참담하게 햇다. 싫은 사람과 마주 앉아 커피만 마셔도 속이 거북하던 내 육신이 아니던가. 이렇게 정신과 밀접하고도 예민하게 맞물려 있던 육신의 이 뜻하지 않은 반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비빔밥을 꿀같이 달게 먹고 내 방으로 도망치듯 돌아온 나는 나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너는 이제 살고 싶으냐'고, '아니야, 절대로 아니야'라고 나는 강하게 부인했다.
- 참척을 겪은 기막힌 애통과 절망은 당연히 에미의 목숨을 단축시킬 줄 알았다. 살고 싶지 않은 게 조금이라도 거짓이 아닌 이상 육신은 의당 거기 따라주려니 했다. 그러나 내 육신은 내 마음과는 별개의 남처럼 끼니때마다 먹고 살고 싶어하는 게 아닌가. 나는 내 육신에 대해 하염없이 슬픔과 배신감을 느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를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나는 그 동안 딸들 생각을 너무 안했다. 어쩌면 피해왔는지도 모르겠다. 외아들을 잃었다는 무서운 사실을 차마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떄, 만일 딸들 중의 하나를 잃었다면 이렇게까지 비참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치밀려고 했었다. 사람의 수효가 모래알처럼 흔하다고 해도 각자에겐 일회적이고 고유한 목숨을 바꿔치기한다는 것은 아무리 가상일지라도 절대로 해서는 안될 생각이었다. 설사 제왕을 위해서라도 노예가 그의 생명을 바꿔치기 당하지 않ㅇ르 권리가 있거늘, 하물려 같은 자식을 놓고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하늘 무서운 짓인가.
- 송별연에 나와준 수녀님들 중에는 조 테레사 수녀도 끼여 있었다. 그는 착해보인다는 것말고는 드러나지 않는 평범한 수녀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특별한 수녀였다. '하필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나'하는 원망으로 똘똘 뭉친 내 마음에 '왜 당신이라고 그런 일을 당하면 안되는가?'라는 당돌한 반문을 불러일으킨 수녀였다. 그는 알까. 그가 무심히 던진 한 마디가 내 딱딱한 마음에 일으킨 최초의 균열에 대해.
- 역설적인 얘기가 될지도 모르지만 나의 홀로서기는 내가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 "주여, 저에게 다시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주여 너무 집착하게는 마옵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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