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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 130년 지정학

Varsika 2024. 2. 13.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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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역사시대 구분

헤이안시대 : 천황이 직접 통치하던 시대. 794 ~ 1185

가마쿠라 막부 : 1185 ~ 1335, 9대 150년무로마치 막부 : 1336 ~ 1573, 15대 240년에도 막부 : 1603 ~ 1868(메이지 유신), 15대 265년

 

약 700년간 막부의 시대가 있었다. 

 

○정이대장군

정이대장군은 본래 일본 동북쪽을 토벌하는 군대의 수장으로 임시직이었다. 가마쿠라 막부의 초대 지도자인 미나모토가 1192년 정이대장군에 임명되면서 정이대장군을 수장으로 하는 정부를 막부라 부르기 시작했다. 

 

□ 노부나가는 수확고 기준으로 가장 강성한 다이묘가 아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약 30여 년이 흐른 뒤 1548년 당시의 수확고를 분석한 것이라 오차는 있겠지만 노부나가는 당시 57만석 수준으로 65만석의 타데 마사무네, 39만석의 우에스기 겐신, 65만의 다케다 신겐, 70만석의 이와가와 요시모토, 120만석의 오우치 요시타카, 161만 석의 호소카와 하루모토에 비하면 전혀 압도적인 수준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노부나가는 통일을 거의 이룩했다. 

* 1석은 쌀 150kg이다. 노부나가의 57만석은 연간 85,599,000kg의 쌀을 생산할 수 있었다는 의미다. 

 

다만 이것은 1548년 전국시대의 초기 기준이고 훗날 오다 노부나가는 전성기에 364만석, 다케다 신겐 80만석, 시마즈 가문 150만석, 모리 모토나리 122만석 등으로 수확고가 기록된다. 에도시대 도쿠가와 가문은 직할령과 위임령을 합쳐 700만석, 시마즈 73만석, 오와리 도쿠가와 62만석 등으로 추정된다.

 

 

□ 일본의 주요도로

일본의 주요도로들은 7세기와 10세기에 걸친 나라 시대에 만들어졌다. 주요도로는 다음과 같다.

 

○ 후쿠리코도(北陸道)

○ 도산도(東山道)

○ 도카이도(東海道)

 

□무로마치 막부(=아시카가 막부)의 해체

무로마치 막부는 8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마시 시대에 오닌의 난의 기점으로 해체된다. 이는 곧 전국시대의 개막을 의미했다. 오닌의 난은 1467년부터 1477년 동안 10여 년에 걸쳐 이어졌으며 이 기간 동안 교토가 황폐화되어 각 영주들은 자신의 영지 안에 '작은 교토'를 만들기도 했다. 

* 1467년이 일본 연호로 오닌應仁 원년이었기에 오닌의 난이라고 부른다.

* 중앙에서 지방관으로 임명한 슈고守護의 권력이 비대해지며 영주화 되었고(슈고 다이묘) 이들이 아시카가 요시마시의 후계문제를 계기로 분란에 휩쌓여 난은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 1459년부터 1461년 3년 간 대기근으로 교토에서만 8만 명이 아사하였는데 이 역시 난을 일어나게한 하나의 동인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각지에서 교토로 난민이 몰려들었다. (먼 남쪽 해저화산이 폭발한 것이 기후에 영향을 주었다.)

* 하급무사인 아시가루는 오닌의 난부터 급부상하기 시작한다. 

 

○ 작은 교토와 성하도시

대표적인 성하도시로는 야마구치 성하도시, 와다와라 성하도시, 이치죠다니 성하도시 등이 있다. 전국시대 영주들은 성을 짓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면서 지역의 통치권을 행사했다. 강력한 영주가 나타나면 세력이 변경될 우려가 적어지고 이런 후에야 농민들은 안심하고 상인들도 몰려들기 시작했다. (성하도시 조성은 상업 장려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다 노부나가 역시 이러한 점을 잘 이용했고 실제로 기요스성 이후 노부나가가 거처하는 성은 모두 새로 얻은 영토의 중심부에 지어진다.

 

□ 구쓰기(무로마치 막부 쇼군들의 도피 및 피난처)

와카사만과 교토를 있는 요충지로 이곳을 다스리던 구쓰기 가문은 대대로 막부의 가신 집안이었다. 이러한 까닭에 교토에서 난이 일어나면 쇼군들은 구쓰기로 피신했다. 

 

□ 이치죠다니(아사쿠라가의 군사도시)

오닌의 난을 피해 교토의 지배층이 이치죠다니로 피신했다. 이곳은 협곡으로 이루어진 군사도시이자 호쿠리쿠도와 미노가도美濃街道(지금의 나고야와 기후현을 잇는 길)가 이어지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북쪽 교토로 불리기까지했다. 

 

□ 무로마치 막부는 1336년부터 1573년까지 15대에 걸쳐 일본을 통치했다.

과거 고다이고 천황과 가마쿠라 막부의 갈등 사이에서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이들 모두를 제압하고 권력을 장악한다.

이후 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쓰가 교토 무로마치에 궁을 지어 무로마치 막부라 불린다.

1573년 쇼군 요시아키가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패퇴하여 멸망한다.

 

□ 화승총

당시 고가의 무기였기에 대량으로 보유하고 운용하기가 쉽지 않았다.

전투에 사용될 때는 주로 공격용 보다는 위협용이었다.

화승총은 불을 붙여야 탄환이 발사되는데 연중 습도가 높고 비가 많은 일본 특성상 무용지물일 때가 많았다.

전래 이후 급속도로 퍼졌지만 대규모 철포대가 편성되지 않은 이면에는 이런 사유가 있었다. 

 

□ 호조 가문(당주 호조 소운)

호조 가문은 100년간 간토 지방을 다스렸다. 오다와라성이 그 중심이었다. 하코네 협곡부터 바다까지 이어지는 드넓은 영지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오다와라성은 둘레9km에 이르는 외성곽을 구축했다. 육군뿐만 아니라 이즈 수군 역시 유명했다. 4대 호주 우지마사는 240만석 규모의 간토 8주를 장악한다. 호주 가문이 요충지 중 하나였던 미우라 반도에는 지금도 미군 제7함대와 일본 해상자위대가 주둔하고 있다.(요코스카항)

 

가마쿠라 시대의 호조가문과 구분하기 위해여 전국시대의 고호조(후호조)라고 부른다. 

 

□ 산성과 신사

 

○ 산성

가스가 산성 - 우에스기 겐신

지하야 성

아카사카 성

 

○ 신사

아쓰타 신궁 - 오다 노부나가

기리시마 - 시마즈 요시히로

미시마타이사 - 호조 소운

스와타이사 - 다케다 신겐

치쿠부시마 신사 - 도요토미 히데요시

닛코도 쇼궁 - 도쿠가와 이에야스

 

□ 시마즈 가문의 류쿠 정복

시마즈 가문은 1609년 3천 명의 병력으로 류큐를 정복한다. 명목은 류쿠 일대를 자신의 영지로 하사받았다는 것이었지만실제로는 대명무역의 이권을 차지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 오사카

오사카 서부인 사카이는 상업과 철포를 만드는 제조업으로 유명한 곳이었고, 지금의 오사카성이 있는 도시 중심부는 본래 이시야마 혼간사를 중심으로 한 종교도시였다. 훗날 이시야마 혼간사의 자리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사카성을 축성한다. 

 

□ 가이의 호랑이 신겐

다케다 신겐이 북쪽의 우에스기 겐신과의 견제에 힘을 소진하지 않았담녀 천하를 통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신겐과 겐신은 1553년부터 1564년까지 약 10여 년간 5차에 걸쳐 맞붙었다. 

 

신겐은 내치에도 뛰어난 역량을 보였는데 가이국 내의 풍부한 광산을 개발하여 경제력을 확보했고 고슈킨甲州金이라 불리는 통일된 화폐를 만들었다. 또한 광산 기술자들을 전투에 참여시켜 성곽을 무너트리거나 갱도를 파는데 활용했다. 그밖에도 곡식의 계량형을 통일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능력을 보였다. 

* 당시 대장장이나 주물공들 역시 각지의 다이묘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겐신의 영지는 항상 경제적 불안을 내포하고 있었는데 이는 그의 영지인 가이국과 시나노국이 모두 바다로 통하지 않는 내륙이었던 것에 기인한다. 이러한 지정한적 결함이 끝내 신겐의 발목을 잡았다.  

 

신겐은 제방을 쌓아 치수사업도 진행했는데 신겐제방은 일본 최초의 치수사업이라 평가받는다. 마에미다이강에 지금도 그 흔적(단애절벽)이 남아있다.

 

책에서 말하는 단애절벽의 위치, 미다이강은 miteshi 강으로 검색해야 나온다.

 

가이국에는 말이 많아 신겐은 목장을 양성하기도 했다. 가이국의 흑마는 어디서나 명마로 여겨졌다. 이를 기반으로 기마대를 편성하여 전쟁에서 큰 효과를 보았다. 

 

전국시대에는 전투가 많아 산길이 많은 곳에 나라를 세웠지만 전국시대 중기로 넘어오면서 군대 이동을 위해 직선도로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신겐은 말 두필이 나란히 갈 수 있는 가도를 정비했는데 상부가도, 중부가도, 하부가도가 그것이다. 상부가도는 현재에도 남아있다. 

 

쓰루가만을 장악했던 이마가와 요시모토와 동맹을 체결했으나 후에 신겐은 이곳을 공격했고 이게 반발한 이마가와와 호조(고고슌 동맹의 다른 한축)가 신겐과 대항하게 된다. 이들이 남쪽의 바닷길을 막고 소금을 차단하자 신겐 지방은 소금 부족에 시달렸다. 북쪽의 겐신이 가이국에 소금 거래를 허용함으로써 다행히 신겐은 위기에서 벗어난다. 소금이 공급되었던 길은 지쿠니가도로 불린다. 이때가 1560년대이다.

 

이처럼 전국시대에는 다이묘들 간에 정략적인 혼인 동맹이 많았는데 이 폐단을 우려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다이묘 간의 혼인을 금지시켰고 이는 도쿠가와 막부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다케다 신겐은 1573년 병사하고, 그의 4남이 후계자로 지정되었으나 1575년 오다 노부나가와의 전투에서 패배해 세력이 크게 줄었고 1582년, 오다-도쿠가와-호조 연합군의 공격으로 인해 가문 전체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 다테 마사무네

다테 가문의 16대 당주인 데루무네의 적자로 1567년 테어났다. 마사무네政宗란 이름은 다테 가문을 중흥시킨 시조, 9대 당주 마사무네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당주가 된지 5년만에 최전성기를 구가하여 도호쿠 지방을 제패했으나 그 시기 도요토미는 이미 간토와 시코쿠, 규슈를 모두 평정해 천하통일의 기반을 완성한 뒤였다. 마사무네가 5년만 빨리 태어났다면 히데요시 대신 천하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자 도쿠가와 진영의 영지를 공격하고는 마치 잇키가 봉기한 것처럼 공작을 꾸몄지만 곧 발각된다. 이에야스가 이를 분문에 붙이고 영지를 보존케 함으로써 마사무네는 도호쿠의 다이묘로 생을 마감한다. 

 

□ 전국시대 주요 용병

 

네고로슈根來衆

기이국 북부의 네고로사(절) 중심으로 일대에 거주하던 승병 군단. 많은 양의 청포와 탄약을 소유했다.

 

사이카슈雜賀衆

기이국 북서부 용병, 수천 정이 넘는 철포를 소유하고독자적으로 무역도 했다.

 

로닌슈浪人衆

다케다 신겐에 의해 편성된 타 지역 출신의 용병부대

 

모로아시가루슈諸足輕衆

호조 가문에 소속된 독립 무장조직. 보수를 받고 고용된 아시가루 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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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 가문은 이세만을 통해 해상과 육로 물류를 모두 장악했다.

노부나가의 조부때부터 3대에 이르기까지 오와리국을 안정시켜 경제 기반을 닦아 놓았는데 이 덕분에 노부나가 때에 크게 세력을 넓힐 수 있었다. 

 

조부때 쓰시마미나토 지역을 다스리게 되었다. 이곳은 지금은 내륙이지만 당시에는 항구로 기능했다. 오다 가문은 정략결혼을 십분 활용하여 경제권력을 강화하였는데 노부나가의 숙모, 조부의 딸이 쓰시마 지역의 오하시 가문(大橋家)과 결혼했다. 본래 쇼바타성이 거점이었던 노부나가의 조부는 이 정략결혼을 발판으로 쓰시마까지 다스리게 된다. 

 

오다 가문이 신관 출신인 점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당시 사찰과 신사세력은 들기름 교역을 독점하고 있었기에 항구였던 쓰시마미나토 지역의 보호자로 안성맞춤이었다. 노부나가 본인은 이코마 가문의 딸과 결혼했는데 그들은 육상 교역을 담당하던 가문이었다. 

 

○ 오다 노부나가의 거성

오다 노부나가는 4차례 거성을 옮기며 경제를 황성화 시켰다.

1552년 나고야성, 1554년 기요스성, 1563년 고마키 산성, 1567년 기후성, 1576년 이지츠성까지 여러 차례 거점을 옮겼다. 전국시대 무장 중에서 이렇게 많이 거점을 옮긴 사례는 드물다. 오다의 거점은 모두 교통의 요충지에 있었다. 거성을 중심으로 행정력을 과시하고, 백성들을 안심시켜 정주인구를 늘리고 세수를 확보했다. 권력과 권위를 드러낼 수도 있었다. 다른 다이묘들은 수성에 열을 올릴 때 오히려 오다 노부나가는 '천하포무'라는 인장을 쓰며 계속 움직였다. 

* 오와리국을 평정한 이후 천하포무라는 인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전국시대 성은 주로 평지의 평성 혹은 산지의 산성인데 오다 노부나가는 이 둘의 절충안인 평산성을 고집했다. 방어력을 어느 정도 양보하면서도 도시의 경제 발전을 우선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누부나가와 사카이

노부나가는 상업에 관심이 많았기에 자연스레 오사카 인근 사카이에도 관심이 많았다. 사카이는 자체적인 철포 생산라인을 갖추고 있었으며 해자로 둘러쌓여 뛰어난 방어막을 형성했다. 거기다 내륙으로 향하는 5개의 가도가 도심을지나 무역도 활발했다. 무로마치 막부 후기인 1419년, 주민들이 영주로부터 자치권을 얻은 후 자력으로 도시를 발전시켜 왔다. 

 

○ 라쿠이치·라쿠자(樂市·樂座)

노부나가는 시장독점을 금지하고, 세금명목의 상납금을 차단했다. 자신의 영지 내에서는 자유로운 상업을 보장하였고 상업에 필요한 기반시설을 개선, 정비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기존 도산도 루트에 스리하자 고개 지선을 만들어 동선 12km를 단축시켰다. 물리적으로, 제도적으로 물류를 정비한 것이다.

 

○ 불교 탄압

노부나가는 불교를 경계해 엔랴쿠샤를 불질렀다. (1571) 종교적인 목적보다 군사적인 위협을 제거한다는 명목이 더 강했다. 당시 사찰은 승병을 보유하고 자체적으로 무장이 가능한 조직이었다. 실제로 1536년 법화종의 난 때 엔랴쿠샤 승병이 교토를 침공하여 법화종 사찰 21곳을 파괴하고 최대 1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때 교토의 절반이 불탔다. 천태종인 엔랴쿠샤와 법화종 간의 논쟁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반대로 불교를 견제하고 해외무역의 수입을 얻기 위해 기독교 포교는 허가했다. 그러나 반대로 히데요시는 기독교가 세력화되는 것을 경계해 신부 추방령을 내린다. 기독교가 세력화 될 경우 훗날 잇코잇키 같은 반란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걱정햇기 때문이다. 또한 일부 다이묘가 무역을 통해 세력을 확장하고 영지내 백성들에게 개종을 강화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다만 히데요시는 무역을 허가했다. 선교사들이 당시 상인을 겸하고 있었기에 완전히 종교를 차단할 수는 없었고 실제로 일반 백성들에게는 기독교 신앙을 허용했다. 

 

○ 비와호 네트워크

노부나가는 비와호를 중심으로 4개의 성을 쌓아 사방을 경계했다. 오미조성, 사카모토성, 이즈치성, 나가하마성이 바로 그것이다. 이 4개의 성은 서로 10~20km 정도 떨어져있었는데 가장 멀었던 나가하마성과 사카모토성 간을 제외하고는 맑은 날에 서로를 육안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노부나가는 도산도와 핫푸가도가 이어지는 교통의 요충지 이즈치성에 주둔했다. 나가하마성에는 하시바 히데요시가 주둔했다. 본래 성의 이름은 이마하마였는데 노부나가의 이름에서 한 글자를 따와 고쳤다. 

 

○ 혼노지

오다 노부나가가 자유로운 상행위를 위해 영지내의 관문을 모두 철폐하는 바람에 반란군을 이동을 눈치채지 못했다. 관문은 통행을 통제하는 역할과 통행료를 징수하는 두가지 역할을 했는데 노부나가가 통행료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관문을 철폐한 것이 화근이었다. 훗날 도쿠가와는 관문을 다시 부활시키되 통행료는 걷지않는 절충안을 적용한다. 

 

○ 히데요시의 전략전술

 

- 일야성

호조 가문을 공략할 때 이시가키산에 성을 쌓았다. 축성 초기에는 나무로 엄폐해 그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성이 다 완성되자 나무를 베어 성의 모습을 드러냈다. 상대인 호조 측에서는 하루만에 성이 완성된 것으로 착각하고 겁에 질린다. 4개월 간의 항전이 허무하게 무너지고 호조 가문은 멸망한다. 이를 히데요시의 일야성이라 부른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

○ 도쿠가와가 에도로 간 이유

에도는 육로와 해로 교통을 모두 확보할 수 있고 후지산을 바라보기 좋은 곳이었다. 도쿠가와는 간다산을 깎아 에도만의 습지대를 매립했다. 1590년에 에도성을 거점으로 삼았다. 그 전에는 미카와 통일 후 하마마쓰성을 본거지로 삼았었다. (그 전에는 오카자키성)

 

도쿠가와는 어린시절 이마가와 가문의 인질로 잡혀 시즈오카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후지산에 대한 향수가 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 오사카 공방전

- 사나다마무(眞田丸) / 오사카성의 방어시설

 

- 사나다 노부시게가 활약했으나 전사하고 결국 도요토미 군은 패배한다.

- 히데요리는 전장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고, 오사카성 공방전 당시 화약 소리에 놀란 요도기미는 화친을 주장하는 패착을 저지른다.

 

○ 영지 몰수

다테, 우에스기, 모리, 시마즈, 사타케 5개 가문을 제외하고는 모두 에도 막부 시절 영지를 몰 수 당한다. 2대 쇼군 히데타다가 다이묘를 통치하는 13개 법을 공포한다. 또한 각 다이묘는 1개의 성만 보유할 수 있도록 일국일성 정책을 발표한다.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심지어 성 수리를 구두로만 승인받고 정식으로 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명목으로 영지가 몰수 당한다. 세키가하라 전투까지 도요토미 가문의 편이었던 도자마 다이묘였기에 이런 가혹한 형벌을 받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 치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에 상수와 저수지 시스템을 정비하였는데 에도에 흐르는 강 하류의 물은 바닷물과 섞여 농업에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야스의 치수사업 덕분에 에도는 농업이 번창하게 되었고 1800년 당시 베이징의 인구가 90만 명일 때 에도는 100만 명의 인구를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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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전개 순서가 역사적 순서와 조금 다르고, 인물들에 대한 설명도 연결성이 떨어지는 아쉬움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 한권을 읽으면 전국시대에 주요 전장과 지리적 요충지에 대한 이해가 생기고 지도가 많은 것이 좋았다.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지명이 있는데 지명이 바뀐 것이라면 현재의 지명을 병기해주는 것이 필요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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